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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난 아이
사노 요코 글 그림, 임은정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도 언젠가 태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였을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처럼 별과 태양에 부딪혀도 아프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무섭지도 않았고, 배고프지도 않았다. 바쁘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어떤 욕망도, 아픔도 없었지만 그것이 좋거나 나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반창고. 대구역에서(대구역에서 공사가 있었다) 일꾼 아저씨가 옮기던 철막대에 아기가 맞아서 상처가 났다. 놀랄 만한 일이었고 그에 상응하는 울음소리, 아이가 운다. 대구역이 다 울렸다. 마침 나는 그림이 그려진 반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에게 하나를 붙여주고,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는 단번에 울음을 그쳤다. 알록달록한 그 반창고에 넋이 나갔다. 반창고는 아이에게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아마 나는 반창고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인상적이었을 순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니 그냥 반창고 때문이었다고 해두자. 알록달록한 반창고를 붙이고 싶었을 뿐인데 반창고, 반창고 라고 말했을 뿐인데 태어났다. 바람도 강아지도 엄마도 모두 살아 움직이고, 나는 그 속에서 이 이야기 속 아이처럼 아프고, 배고팠다. 나와 이 아이는 거의 비슷한 과정을 통해 태어났다.
그런데 나는 점점 변해갔다. 아프지 않아도 반창고를 떼려고 하지 않고, 물고기를 보면 그냥 쫓아가지 않고 잡으려고 하고, 모기에 물리면 가려워하기만 하지 않고 모기약으로 걔네들을 죽이려고 했다. 이야기 속의 태어난 아이는 "태어난다는 건, 참 피곤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잠든다. 아마도 그 아이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을 때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해버린 나는 무척 피곤해졌는데도 곤히 잠자지 못하고 쉴새없이 생각을 해대고, 돌아다닌다. 이러다 태어나고 싶지 않을 때도 태어나게 되는 건 아닐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거나, 태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거나 하는 것들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태어난 것들은 태어난 대로 살고, 태어나지 않은 것들은 태어나지 않은 것대로 있으면 된다. 그러나 태어나고 싶은데 못 태어나고, 태어나고 싶지 않은데 태어나는 것들은 몹시 피로하다.
이야기 속의 태어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창고! 그러니 반창고로만 기뻐해. 바람이 부는데 깔깔 웃네. 빵 냄새가 나니 빵을 먹네. 처음 내가 태어났을 때도 이 아이처럼 엄마 하고 외치고, 반창고로 으시대곤 했겠지. 그래, 바람이 부는 대로 깔깔대고, 배고프면 먹고...잠들 땐 꿈도 없이 푹 잠드는구나. 이제 깨어나면 그 아이, 다시 태어나고 싶으면 태어나고, 태어나고 싶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겠지.
이봐, 태어난 아이. 나도 이렇게 태어나 있어. 모기가 물면 그냥 좀 가렵고 말걸 그랬어. 모기 죽이려고 모기향을 샀거든. 모기향을 사려고 일을 하고. 자꾸 자꾸 이런 저런 근심과 일 속에 파묻혀 버렸지 뭐야. 나도 너처럼 엄마의 입맞춤을 받으며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래. 태어난다는 건, 재미있기도 하지만 네 말대로 참 피곤한 것 같아. 재미있기만 해도 피곤한 것에 더 피곤한 일들을 이제는 쌓지 않을련다.
기왕 태어났으니 우리 인사나 할까? 안녕, 세상에 태어난 아이.
아, 참! 니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너와 함께 지구로 온 그 강아지는 어디로 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