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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 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씩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씩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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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로 2006-08-1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적은지 아는 그는 큰 사람!
 

그 집앞


이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


오가며 그 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그 짚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 버리려
불빛에 빛줄기를 세며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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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p.109(이사야서 11장)

인간들 마음상태가 겨우 이 정도이니 어쩔 수 없이 하느님도 천국과 지옥이란 상벌을 정해놓고 다스려보시는지는 몰라도, 내 생각으로는 하느님께서도 다시 한번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아직 철이 안들어 그런지 아니면 철이 들어 그런지 상벌이 없는 세상은 그리 어려운 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p.134

그가 바라는 세상은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다. 상벌이 없는 세상.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세상에 상벌이 있다면 하느님도 다시 생각해보시라고 한다.  

모든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이든, 알라이든, 예수님이든 칼을 들게 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p.151

저자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평화다.

나무와 바위한테 절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하느님의 자식되기에 부족함이 없다.-p.178

저자의 하느님은 나무요, 바위요, 풀이요, 인간이요, 하느님이요, 이 모든 것이 뒤엉킨 우주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했거든요. 그래서 그는 진리대로 살다보니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고요.......자유라는 게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네요.-p.190

조금 불편하고 어울려 살며, 조금 덜 가지고 나눠 살자고 하던 저자가 자유에 이르러 자유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한다. 평화와 자유...자유...

어디서나 언제나 인간은 아무도 고통 없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p.185

[레미제라블]을 읽고나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안목에 대한 저자의 말이다.

결국 우리는 평화라는 환상을 어떻게든 현실에서 이루어보려 하지만 안된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한 이후 결코 한번도 평화는 없었다. -p.53

평화란 무엇일까? 노예처럼 숨죽이며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삶이 평화가 아니라면 투쟁으로 평화를 쟁취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싸움은 정당한 것일까? 그리스도의 비폭력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저자는 묻고 있다. 그도 고민중이다. 고통이 따르는 자유?, 자유가 필요한 평화?...평화에 필요한...? 마음과 몸은 한 덩어리이고, 나와 지구는 한 덩어리인데 지구는 한번도 평화롭지 않았는데 내 맘은 평화로운 때가 있지 않았던가...평화는 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전쟁 없는 외적인 상태를 이르는 것인가? 혹시 우리가 평화라는 말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모르는 것 투성이다. 섣불리 답을 내리지 않으련다.

어쨌든 저자의 말대로 한번도 평화가 없었던 이런 세상에서 동물처럼, 식물처럼, 그런 자연처럼 어찌 살아갈까? 고민중인 투쟁은 뒤로 두고서라도 오늘 어찌 실천할까? 덜 소비하고, 더 나누고, 자연을 자연으로 두고 그리고...이 책 속에선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실린 단편 같은 장면들이 몇 차례 나온다. 가난한 이웃이 알고보니 예수였다는..."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사람도 자연도 모두 하느님이니 하느님 대하듯이 고개 숙이고, 나누고, 예배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사춘기 때 나는 톨스토이의 책을 읽고 실천했다. 억지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겨져서 실천할 수 있었다. 술취해 누워 있는 아저씨를 보다가도 예수께서 저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시면 나는 어쩔까, 이 추위에 저가 얼어 죽기라도 하면 어쩔가...어디에서 용기가 솟는지 술취한 아저씨가 무섭지 않고 가엾게 보였다. 아저씨의 어깨를 치며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그러고보니 그때는 두려운 게 별로 없었다. 이웃들이 죄다 예수가 되었더니 두려운 게 없어졌었다. 내게는 하느님이 무서운 분이 아니었나 보다. 하느님이 이웃이 되고, 이웃이 하느님이 되었구나.

읽는 내내 조금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한 저자의 목소리가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와 자연과 아름다움과 정겨움으로 가득찬 이야기 속에 전쟁과 폭력과 이기와 편견이 마주 서 있었다. 내 사는 곳 이야기라 편하지 않은 게다. 

그런 불편함 가운데에서도 사춘기 때의 순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렇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어디에 숨어 있다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순수와 평화가, 우리들의 하느님...이 손을 잡는다. 아야, 너무 꽉 잡았잖아요? 이렇게 잡지 않으면 제가 놓쳐 버린다구요? 그래요, 저는 자주 놓쳐 버린 것 같아요. 다시 잡아요, 제가 먼저 잡을께요. 생각보다 부드러워요, 하느님의 손...하느님,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면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닿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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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7-2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그런 세상에 닿게 되겠죠. 잘 읽었습니다.

달팽이 2006-07-27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느님 손은 너무 많아서 누구나 어디에서나 뻗기만 하면 잡을 수 있겠죠?

왈로 2006-07-28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이 아저씨께 물어 봤대. 어떤 글이 좋은 글이냐고. 읽고 나서 마음이 불편해 지는 글이라고 대답을 하셨다는군. 이 분의 강아지똥이 내겐 많이 불편했었고 몽실언니는 그래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거든. 그나마 이 책은 좀 나았는데 너는 아닌것 같네. 이분의 의도와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누아 2006-07-28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분명" 닿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진 님 때문에라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달팽이님, 뻗는 것조차 귀찮게 여기지만 않는다면요.^^
왈로야, 독서란 게 저자와의 대화라기보다는 자기 마음과의 대화에 가까운 거 같다. 어쨌든 네 말대로라면 이분 의도에 잘 맞게 책을 읽은 것 같다. 고맙다, 잘 읽었다. 그리고 서재 방명록 확인 요망.
 
아무 일도 아니야
고이즈미 요시히로 지음, 김지룡 옮김 / 들녘 / 2003년 10월
구판절판


사랑은 이런 것이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
어떤 일이든 결론을 내려고 해.
답을 내면 우선은 안심할 수 있고
마음이 안정되거든.
답을 내는 것으로
안심하는 것은 '마음'의 나쁜 버릇이야.
기댈 수 없는 '마음'이 정한 답에 기대어 사물을 보고 있으니까
불안해지는 거야.
.
.
.
답을 내는 것으로 놓쳐 버리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

-148, 154쪽

아무래도 우리 모두는
자신이 '누구'가 아니면 불안해하는 것 같아.-176쪽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돼지는
가볍게 기뻐하고 있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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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1996.

이와 같이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세계 만물을 보살펴오셨다.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 ..p.19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나는 떳떳하게 모든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 섬기며 살고 싶을 뿐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원하셨기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서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며 그것을 위해 피흘려 희생하신 것이다. 이 땅위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다.-p.21

====================

왈로야, 이제야 니가 보내준 책을 손에 들었다. 기독교에서 걸어나와 기독교건 뭐건 우리 안에 내재한, 우리들의 하느님 이야기구나. 우리들의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그러다 어쩌다 하느님이다, 부처님이다 하는 말이 생겨나 이리저리 세상을 훑고 다니나 싶어진다. 

재생지에 씌어진 글이라 그런지 책을 드는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러고보니 녹색평론사가 가까운 곳에 있구나. 어쨌든 재미있게 읽을 것 같아. 고맙다, 왈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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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로 2006-07-24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그래서 '하나님' 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하신 것 같아.
이사는 어쩌고 책 을 손에 들고 있는지...

이누아 2006-07-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할 일이 아득한데도 남해로 휴가를 다녀왔다. 신랑이 휴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해서.^^ 휴가 동안 틈틈이 다 읽었다. 덕분에. 짧은 리뷰라도 쓰려고 했더니 알라딘이 좀 이상하네. 그리고 내 생일선물로 되어 있네, 이 책. 내 생일은 여름이 아니고, 겨울이다. 호적에 다르게 올라가 있다. 그래서 정말 이른 생일선물이 되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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