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도 더 된 얘기야. 큰언니가 포항에서 주택 2층에 세를 살았어. 2층 마당에 햇살이 비치고 아이들 신발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데 언니는 그 평화가 깨어질까 두려웠다고 했어. 그때 돈도 별로 없고, 시댁과의 관계로 마음고생도 심했는데 언니는 그 순간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순간을 기적이라고 부르면 지나친 걸까?

 

알라딘 서재지인 중에 혜덕화 님이 있어. 그분과 딸이 기적에 관해 얘기하는 글을 본 적이 있어. 딸이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하자 혜덕화님이 "엄마가 아파서 기적적으로 낫는게 좋겠니? 그냥 안 아프고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사는 게 좋겠니? 우리가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기적이란다" 라고 말하셨어. 생사를 오가다 살아나는 것보다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게 훨씬 더 큰 기적이야. 인상적인 글이어서 자주 생각나. (http://blog.aladin.co.kr/777032133/4330843)

 

중국에 유명한 의사 편작(扁鵲)이라고 들어봤지? 편작의 형제들은 모두 의사였어. 편작의 명성이 가장 높았지만 편작은 형들이 훨씬 훌륭한 명의라고 했어. 큰형은 환자의 병세가 나타나기 전에 원인을 없애버리고, 둘째형은 병의 초기에 치료를 하는데 치료가 간단하게 보여 사람들이 그들의 의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대. 반면에 편작은 병세가 위중해지고 난 뒤에야 치료하기 때문에 세상이 자신을 명의로 생각한다는 거야. 기적이 그런 것 같아.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누리는 삶에 대해선 무심하고, 사고가 난 후의 삶에는 경탄을 보내고.

 

동네 한의사가 환자 두 사람에게 똑같이 침을 한 번 놓고 아픈 다리를 낫게 했는데 한 사람은 고마워하고, 한 사람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대. 고마워한 사람은 다른 병원을 전전하다 그곳에서 겨우 나았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처음 가서 바로 치료가 된 거였어. 쉽게 주어지면 그 가치를 알기 어려워. 건강이나 공기처럼.

  

큰애가 아람단 활동으로 제주도에 다녀왔어. 가족끼리 여러 번 제주에 갔었는데 한 번은 태풍이 와서 34일이 67일이 되었고, 또 한 번은 눈에 갇혀서 숙소에만 있었어. 여러 병원 전전한 환자처럼 제주에서 사고 없이 돌아온 아이를 보니 얼마나 감사한지. 건물이 무너지고 태풍을 만나고 건강을 잃기 전에 이 일상의 평온함이 기적이라는 걸 매순간 깨닫고 싶어.

 

물론 무조건 지금에 만족하라는 식의 얘기는 아니야. 무너진 건물에서는 일단 뛰쳐나와야지. 그건 이미 사고가 난 거니까 수습을 해야지. 아픈 다리를 낫게 하듯이. 부당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면 편작의 수술이 필요할 거야.

 

큰애는 아직도 자고 있어. 작은애는 큰애가 따온 귤을 먹으며 만화를 보고. 그때의 언니처럼 나도 이 순간이 아주 소중하게 느껴져. 기슭아, 너도 햇살 속에 있기를 기도해.

 

    

   

내 말 잘 들어, 친구.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걸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거야. 세상 일이란 게 늘 그러니까.”-더글라스 케네디, 빅 픽처(밝은 세상, 2010), p.159

 

 

 

   

기적

_심재휘

 

 

병실 창밖의 먼 노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네

 

그후로 노을이 몇 번 더 졌을 뿐인데

나는 그의 이른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하루가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것 같아도

눈물로 기운 상복의 늘어진 주머니 속에는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볼 노을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술집을 지나

닭갈비 타는 냄새를 지나

그의 사라진 말들을 지나 집으로 간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고

점자를 읽듯

아직 불빛을 만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한집으로 모여든다

 

-심재휘,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문학동네, 2018),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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