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켜두는 것은 피로롭은 일입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윤동주의 돌아와 보는 밤중에서

 

 

불을 켜두는 것만으로 피로하다고 느낀 적 있어? 우리가 만났을 때가 20대였으니까 피로와는 거리가 있을 나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피로와 친한 편이야.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극심한 피로에 시달린 시기가 있었어. 잦은 이사로 정리된 책 중에 피로에 관한 책이 많았는데 제목이 딱 떠오르지 않아. 그중 한 책은 부신호르몬에 관한 책이었는데 거기에는 매일 자신의 생활을 점검할 수 있는 질문이 있었어. 뭘 먹었는지 얼마나 쉬었는지 누구를 얼마나 오랜 시간 만났는지 그날 기분은 어땠는지......매일 그걸 적은 적이 있어. 올 여름에 이사하면서 그 종이뭉치를 봤는데 건강해지려고 애썼던 내가 대견하기보단 왠지 안쓰러웠어.

 

피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 같았어. 피로가 그치지 않을까 봐 두려웠어. 모두가 해내지만 나는 해낼 수 없다는 아득한 느낌. 피로보다 피로를 이겨내고 뭔가 해야 할 때 오는 압박, 아니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더 힘들었을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괜찮아. 간혹 피로하지만 매일 그렇지는 않으니까. 그런데도 산사의 그믐이 그리울 때가 있어. 캄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 그믐이란 그런 날이야. 직장 그만두고 영천에 있는 절에서 주역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절은 비구니 스님 혼자 계신 아주 작은 암자였어. 내가 켜지 않으면 불빛이 없는 곳. 나도 어둠이 되어 버리는 그런 어둠에 묻히고 싶을 때 그 절의 그믐이 생각나.

 

오늘도 어깨에 피로를 메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오늘 특별한 약속이 없고, 해야 할 일을 미룰 수 있으니 피로와 함께해도 괜찮은 날이야. 햇살이 비치네. 얼마나 가만히 있으면 피로가 햇살에 녹아내릴까?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p.72(피로사회(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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