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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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0일


    그러고 보니, 늘 상상의 편이었다. 열여덟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도를 그렸고, 톨킨에 빠진 후로는 잘 읽지도 못하는 원서들을 모으고 있다. 가족과 해리포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상이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또 다른 지도다. 소설이 다 뭐고, 환상은 다 뭐냐는 이른바 ‘상상판 세속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별 매력이 없었다. 잠시 혹하더라도 이내 백지 앞에 앉아 산과 숲, 늪지와 강을 그렸고, 토성을 떠올리며 수많은 달이 있는 세상을 상상했다. 상상은 그 자체로 무한이고, 자유다. 유년과 닿아 있기 때문에 그걸 유치하다느니 쓸모없다느니 치부하는 건 온당치도 않을뿐더러 때론 가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상상’이란 단어 뒤에 즐겨 붙이는 단어가 있다. 나래. 문인들이 날개를 칭하는 부드러운 단어. 인간에게 날개는 없다. 그러나 문학의 전통 아래 수많은 펜촉, 그리고 입과 입이 이 표현을 반복해온 건, 알베르토 망겔이 말했듯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데는 아무런 물적 기반도 필요치 않은 것”(알베르토 망겔·자니 과달루피, 최애리 옮김,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 11쪽)이 바로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의 산물이 머릿속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라는 물적 기반이 필요하다. 데이빗 예이츠 감독의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Fantastic Beasts and Where to Find Them)≫에는 본의 아니게 마법세계를 알아버리는 (그저 빵집 하나를 차리고 싶어 했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수많은 신비한 동물들을 직접 보더니 마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뉴트, 난 지금 꿈꾸는 게 아니에요. 내 머리로는 이런 걸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다고요.(Newt, I don't think I'm dreaming. I ain't got the brains to make this up.)


    바닥 카펫이 동그랗게 말려 마치 동굴의 입구처럼 보이자 위대한 상상가 톨킨은 아이들을 위한 소설 『호빗』을 썼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In a hole in the ground there lived a hobbit.” 그러나 이 짤막한 소설을 둘러싼 톨킨의 방대한 세상은 유럽 각지의 고전 신화와 전설, 민담, 그리고 고대 영어와 룬 문자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현실인지 상상 속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보르헤스의 환상적인 단편들 역시 마찬가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993년에 『상상력 사전(원제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이라는 책을 냈다. 인간 세상을 우주에 투영해 역대급 인기를 누린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시리즈는 벌써 40년 째 이어지고 있다. 굳이 조지프 캠벨의 신화집, 혹은 천병희 선생께서 번역하신 고대 그리스 신화들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리고 주호민의 『신과 함께』를 이불 속에서 훌쩍이며 한 장 한 장 넘겨보지 않아도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현실과 맞닿은 상상을 즐겨했는지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감히 장담했다. 그의 성격과 기행, 비범한 작품들을 보면 그는 상상을 실천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실천이 바로 ‘아이처럼 그리기’다. 피카소도 수재였다.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그러나 잘 그리지 않기 위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떻게든 못 그려보려고 했다. 물론 이 말에 어폐는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판단하는 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여정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상상의 실천이었다. 아이 같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의 이해를 받지 못했다.


    정현종 시인은 이와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며 얇은 시집 하나를 번역했다. 책을 만져봤거나 펜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누군가에게서라도 한 번 쯤 들어봤을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시들은 하나 같이 다 짧은데, 한참 쥐고 있어야 따뜻해지는 손난로 같다. 네루다의 『질문의 책(원제 : Libro de las Preguntas)에는 움켜쥐면 놓고 싶지 않은 구절들이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하버드 강연록을 『음악의 시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먼저는 프랑스어로, 그 다음에는 영어로) 펴냈는데, 이 책에는 창작과 상상에 관한 중요한 조언이 있다. “창작의 전제는 상상이지만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창작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운좋은 발견이 필요할지도 모르나, 이 발견을 온전히 현실화하는 것이 창작이다. (중략) 고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창조적인 상상이다.”(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 박종성 옮김, 『생각의 탄생』) 상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의 역량에 따른 무한과 자유의 도구이자, 또한 특권이다. 하지만 이걸 수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작’이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저 단어에 목을 맨 것이 바로 예술이다.


    언젠가는 꼭 자신의 상상을 세상에 내보이리라 잔뜩 벼른 사람들이 있다. 창작에 심장을 내맡긴 사람들이다. 괴짜. 엄동의 산 속에 혼자 펴있는 개나리 같은 사람들. 드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창작과 상상이 원래 그런 속성의 ‘몹쓸’ 것인 까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로운 사람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긋거나 없애기도 하면서 이 뫼비우스 같은 공간에서 혼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 답습하지 않겠다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발붙여 살면서 늘 자기만의 ‘낯설어지기’를 아프도록 반복하는 사람들. 비슷한 건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비슷해질 수밖에 없는 위대한 ‘과거’를 추앙하기도 하는 소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하지만 누구보다도 큰 꿈 세계가 있는 사람들. 이중적 삶. 갇혀 있는 듯, 원대한 사람들.


    이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나는 그림 그리는 동생과 종종 글 쓴다는 것과 그림 그린다는 것, 통틀어 창작한다는 것을 넋두리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질문의 책』은 동생의 서재에서 집어든 책이었다. 세상에 나올 때에는 비범하여 누구나 매료시켰던 상상의 세계가 나중에는 비근하게 보인다. 시간은 무섭다. 동생은 무뎌지지 않기 위해 이 작은 시집을 서재에 꽂아두고 있었다.


    『질문의 책』은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엉뚱함.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분수와 관련된 두 번째 의미를 빼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거나”“사람, 물건, 일 따위가 현재 일과 관계가 없다.”라는 것인데, 여기서 『질문의 책』의 엉뚱함은 마지막 사전적 의미를 뒤엎는다. 요컨대, 네루다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과 관계한다. 자신이 잊어버린 미덕들로 옷 한 벌을 꿰맬 수 있을 것인지 성찰하다가, 사과꽃이 사과 속에서 죽는 걸 보지 못했을 누군가를 걱정한다. 자신이 더 느리다는 걸 거북이에게 말하기 위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고민도 한다.


    “상상력의 특징을 엉뚱함이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가 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상상력은 그동안 이 세상에 없었던 생각과 관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차원을 번개처럼 열어보이기 때문이다.”(파블로 네루다, 정현승 옮김, 『질문의 책』, 158쪽)


    이 엉뚱함, 이 질문들은 네루다가 세상과 맞닿으며 일으킨 독특한 반응이다. 정현승 시인은 그걸 ‘정서적 파동’이라 했다. 하나의 질문이 물가로 여러 겹의 파동을 보내고, 뭍의 독자들은 그 너울에 마음을 실어 무한의 호수로 나아간다. 몸이야 여기 이곳에 있겠지만 질문은 파동이 시작된 곳까지 마음을 이끈다. 그곳이 궁극임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정현승 시인처럼 나 역시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질문의 책』의 물음표가 시작되는 지점을 본다. 수십 편의 보르헤스 단편들에서도 본 환상(環象)의 종착점. 죽음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네루다는 죽음을 향하는 우리의 질문을 ‘시작’하게 하면서 필연의 비극을 영원한 아이들의 놀이로 바꿔버린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위의 책, 95쪽


    마크 오스번 감독의 애니메이션 ≪어린왕자(The Little Prince)≫에는 꼬마 숙녀 주인공이 사하라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봤다는 비행사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어른이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Well, I'm not so sure I want to grow up any more.)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한다. “어른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니야. 잊어버리는 게 문제지.(Growing up is not the problem. Forgetting is.) 상상, 엉뚱함, 유년, 죽음, 창작, 예술, 그리고 삶과 궁극.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은 이 그물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거나, 한 뿌리에서 뻗어나간 인간의 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효용을 논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마법의 서랍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두 마리가 아니라는 건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비밀인데) 달 속의 토끼를 보기 위해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꺼내온다. NASA는 인간의 내핵이 상상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위의 책, 49쪽) 『질문의 책』을 심심풀이로 읽으면 (정현종 시인도 심심풀이로 번역하던 거라고 했으니) 우리는 신기하게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고도 긴 너울에 몸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11월은 몇 살이나 된 것인지 알려줄 신비의 인물을 만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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