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19
 


  내가 ‘리프킨’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해보건대 고등학생 때였다.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 중 한 명이 “리프킨의 책 같은 걸 읽고 싶어. <소유의 종말> 같은 책 말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적이 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간 중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멋도 모르고 맞장구를 쳐줬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개 그렇다. 막연한 관심으로부터 여러 가능성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는 대학생이 되면 대개 깨닫게 된다. 지대한 관심을 애초부터 가졌던 이들은 강의 토론시간에 낭중지추가 된다. 다른 학생들이 어느 정도 위화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전공과목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며 쩔쩔 매던 나는 함께 다니던 너덧 명의 친구들과 함께 “걔는 아마 사회학 전공일 거야.”라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소극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안이한 태도였다. 

  제대 후,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뭐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을 때, 나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문제들에 관심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 다시 읽은 진중권, 박노자의 책이 마중물이 되었고, 보다 거시적 시각들이 필요했을 때에는 우연히도 교내 독서경시대회에 나가겠다고 벼렸던 것이 도움이 되 <자유론>과 같은 원칙적 고전을 읽을 수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수의 추천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사실 추천이라기보다는 “맹렬한 비판과 비추” 탓에 호기심을 갖고 읽은 것이라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건 리프킨의 <엔트로피>였다. 

  따지고 보면 리프킨은 훌륭한 저자가 아니다. 중복되는 표현이 책의 절반을 차지할 것 같은, 어찌 보면 괜한 내용 부풀리기를 위해 비슷한 주제를 가진 내용을 챕터별로 나눈 것 같은 면도 없지 않았다. 쉽게 쓰고자 한 그의 전략이 오히려 적절한 예시에 대한 그 나름의 코멘트를 가볍게 보이게 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통독한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에서 리프킨은 성공한 저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교수의 ‘비추’의 근거는 리프킨의 글쓰기에 있지 않다. 

  과학에 정통한 이들 중 대부분은 리프킨이 과학 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사회과학에 적용하려고 한 시도 자체가 그른 것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는 자연중립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자의적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수는 “타분야의 사람이 자신이 전공하지도 않은 분야에 대해 책을 쓰고자 할 때는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책”이라며 한 권의 과학 도서를 위해 300여 권의 예비독서를 한 빌 브라이슨의 노력과 비교하며 리프킨의 안이한 태도를 비꼬기도 했는데, 그 강의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 날 집에 돌아와 강의 리뷰를 썼던 기억에 오늘 그것을 다시 읽어보니 나 역시 리프킨을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비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읽지도 않고 비판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말이다. 

  교수의 말처럼 엔트로피 법칙을 사회로 끌어온다는 것이, 문학으로 지차면 일단 ‘비유의 오류’를 범한 셈인 것은 분명하다. 사회과학의 통계에 대해 회의를 갖는 사람들은 대개 “통계를 산출할 대상 집단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에서 비판의 근거를 찾는데, 리프킨의 <엔트로피>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가령 이렇다. 사회과학계에서 엔트로피가 포함된 열역학 법칙을 그들의 분야에 가져다 쓰기 위한 시도는 1960~70년대에 거의 세계적인 붐으로 일어난 바 있다고 한다. ‘엔트로피’라는 개념 자체가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 입장에서는 “이걸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인간은 ‘투영의 동물’이다. 떨어지는 낙엽에서 저무는 인생을 논하는 오래된 문학적 관습은 인간이 주변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뉴턴 이래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온 바에 따르자면 자연법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우주에 걸친 법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삶을 ‘법화(法化)’시키는 원칙으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아마 이 점이 <엔트로피>의 가장 큰 오류일 것인데, 인간의 집단인 사회는 열역학에서 다루는 통계집단인 분자보다 훨씬 작다. 사회과학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내세우는 통계가 다룰 수 있는 최대의 숫자는 고작 70억이다. 반면, 열역학에서 다루는 분자집단은 천문학적인 표본을 대상으로 한다. 간단한 예로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종이컵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물의 최대량에는 대략 10의 23승이나 되는 물 분자들이 존재한다. 10의 23승이라는 숫자는 태양이 초당 발산하는 에너지를 kw로 환산했을 때나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인간들을 물 분자 정도 크기로 줄여 컵에 담는다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얄팍하게 깔릴 것이다. (70억은 10의 9승이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규모는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엔트로피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통계가 열역학의 법칙을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형’이라는 문제가 있다. 평형이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겉으로는 변화가 없는 상태”이다. (열역학의 첫 번째 법칙은 열적 평형이다. 평형은 ‘equilibrium’으로 보통 균형, 즉 ‘balance’로 오역되곤 하는데, 균형은 좌우의 개념이 있어야하는데 반해 평형은 그렇지 않다는 큰 차이가 있다.) 가령, 컵 속의 물을 보자. 컵 속에는 H2O라는 물 분자가 앞서 말한 것처럼 10의 23승개나 들어 있다. 물이 증발한다는 것만 예외로 하면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다. 아니, 증발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외부에서 관찰이 가능한 ‘닫힌계(clossed system : 물질의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의 수조를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넣었다고 하자.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 물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실제 물속에서는 어마어마한 변화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물 분자는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분자끼리 부딪혀 서로 수소나 산소 원자를 바꿔치기도 하고, 물 분자 입장에서는 마치 우주와도 같을 수조 안을 우주선처럼 열심히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를 일컬어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가 없으나, 내부는 활발한 상태”라는 뜻의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고 한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시스템들은 대단히 어지럽게 움직이는 내부를 가졌으나, 결국 육안으로는 평형을 이루고 있는, 즉 이모저모 다 따져 봐도 평형인 것들이다.  

  사회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회과학이 어려운 것이겠으나) ‘사회’라는 것은 육안으로 봐도 끝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상태이다. 지난 봄, 서울 지하철역 보관함에 폭탄을 넣어두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당시 시리아에서는 연일 끔찍한 폭력적 탄압이 계속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주검으로 거리에 나뒹굴고 있고 있었다. 인류는 지금까지 대략 천 여 개 안팎의 전쟁을 겪어왔으며, ‘지구’라는 것도 모자라 지금은 ‘제 2의 지구’를 찾기 위해 몇 개의 도구를 손으로 삼아 우주공간에 내보내고 있다. 인간의 사회는 결코 평형 상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엔트로피의 평형 개념을 무시한 채 인간 사회의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로 엔트로피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런 점들이 <엔트로피>의 ‘불성립’을 주장하는 여러 과학자들의 과학적 근거이다.   

  사회과학적 주장은 정확한 근거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주장들은 분명 <엔트로피>를 읽을 미래의 독자들, 혹은 읽었던 독자들이 생각해봐야 하는 명제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리프킨이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했고, 그것은 전(全)지구적 차원의 각성을 호소하는 글이었으며, 사람들이 열역학을 대체로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우리는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고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열역학 법칙의 사회과학 적용을 끝까지 고수했던 것인지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메시지에는 총체적인 시대의 경고가 들어 있다. 과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봤으니, 이번에는 리프킨의 주장을 들어봐야 할 차례이다.

  <엔트로피> 초판이 나온 해가 1980년이다. 리프킨은 당시를 ‘기계의 시대’라 정의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류의 사고를 점령했을 때, 서양에서는 비약적인 기술발전이 이뤄졌었다. 그 결과 ‘운동하는 물체’만을 고려한 편향적 발전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기계론적 세계관을 완성한 이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뉴턴이며, 이것을 국가의 패러다임에 적용한 이는 로크, 그리고 경제를 설명할 때 사용한 이가 아담 스미스이다. 로크는 “개인 생산물이 늘어나면 사회의 부도 늘어난다.”는 이른바 ‘트릭클-다운(trickle-Down)’을 주장하며 부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도록 했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강조하여 경제에서 도덕성을 제거하는데 일조했고, 실용주의 경제사관을 건축했다. 리프킨은 이들을 ‘근대의 적’으로 지목한다. 

  열역학 법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워낙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 일일이 게재할 사항은 못 되는 것 같아 리프킨이 왜 엔트로피를 이용해 사회를 설명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적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열역학 법칙이란, 쉽게 말해 우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한데, 엔트로피의 총량, 즉 무질서의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에너지는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하며, 형태만 변화한다. 인간이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를 무용한 에너지로 만드는, 즉 ‘오염’을 뜻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우리보다 더 ‘오염된’, 즉 “에너지가 적은” 세상을 살게 된다. 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보다 빨리 변형되면 진보도 더욱 빨라질 것이고,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되며, 따라서 시간은 절약된다.” 리프킨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일갈한다. 

  리차드 윌킨슨은 그의 저서 <Poverty and Progress>에서 “구하기 쉬운 원료에서 어려운 원료로 넘어감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처리 및 생산기술을 이용해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에너지 발전사를 통시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가령, 리프킨이 예시로 든 것처럼 나무를 원료로 사용했을 무렵, 석탄을 이용했을 무렵, 그리고 원전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지금을 서로 비교해보면 인류는 점점 수집하기 어려운 자원을 이용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고, 또 다른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 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마치 진보를 이루는 것처럼 광고되어도 정작 근로자 계급은 그들이 공장에서 만드는 양모로 된 옷을 전혀 입지 못한다는,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를 묻게 되는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리프킨은 엥겔스의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를 참조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자크 엘룰(Jacques Ellul)의 <The Technological Society>의 내용 발췌를 통해 알려준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모든 기술은 당초부터 예측불가능한 2차 효과를 품고 있다. 2차 효과는 차라리 기술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엘룰의 주장이다. 

  에너지 대란이 점차 현실화되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갈수록 높아지는 유류세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최근 KBS는 우리나라의 해외 원전 개발 사업의 ‘자랑스러운’ 청사진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해준 적이 있다. 중국에 비하면 한참 뒤쳐져 있지만 언젠가는 목표치에 근접할 것이라는 잠재적 국가경쟁력의 선전인 셈이었다. 한편, 중국,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국제 에너지 세력판도의 변화도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으며, 이로써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전 세계적인 공포감이 확산되어 있다. 각 나라들의 ‘덩치’는 점점 커지고 있는데 비해 사용가능한 자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최악의 상황이 가까워지자 예년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는데도 왠지 수확을 덜한 것 같은, 이른바 ‘수확체감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미국이 이 현상의 가장 큰 피해국이라 알려졌다. 다국적 기업과 엄청난 규모의 중앙정부관료 체제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슈퍼 아메리카’의 맹점이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리프킨은 이렇게 말했다. “지구상에 미국이 또 하나 있다면 지구는 지탱할 수 없다.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발명하고 개발한 것들이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광고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발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화학비료와 현대식 화장실의 상관관계(질소화합물과 관련이 있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은 별로 없다. 새로운 에너지 생산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데도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새 에너지가 나오나보다.”고 생각할 뿐, 에너지 생산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이 결국 자유시장의 전체적인 물가를 인상시킨다는 경제의 메커니즘은 이해하지 못한다.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량과 거의 24시간 가동을 중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에 현혹된 사람들은 발전소를 돌리는 돈이 우리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감춰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리프킨은 “결국 가장 큰 부담을 지는 것은 납세자이다.”고 단언한다. 

  이런 방식으로 수송, 도시화, 군대, 교육, 컴퓨터, 보건 등 각 분야의 엄청난 수준이 ‘낭비’와 ‘오염’을 고발하는 리프킨의 주장은 1980년에 이미 제기된 것이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방해하는 심각한 요인들로 실체화되어 있다. 리프킨이 로마를 예로 든 도시화 비판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당시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도시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타지의 노동력과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당시의 로마는 오늘날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 주요도시들에 비유된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현대 도시들은 인근 지역의 에너지 환경이 갖고 있는 생산용량을 훨씬 초과해버렸기 때문에 일단 국내 및 해외의 에너지 기반이 한계에 달하면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I♡NY’이라는 테마로 방영한 KBS의 한 다큐멘터리가 갑자기 기억났다. 뉴욕의 신화를 설명한 영상이었는데, 리프킨의 주장을 듣고 보니 저 거인이 얼마나 많은 식량을 빼앗아 먹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뉴욕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서울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한 학자(Herman Daly)는 위의 문제점을 낳은 서양식 발전 모델이 지구의 미래를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세계 인구의 6%밖에 안 되는 미국인들이 세계 광물자원의 약 1/3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미국의 생활수준에 도달하려 애쓰고 있다. 자원 생산량이 현대재로라면 미국과 동일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세계 인구의 18%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82%에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으로, 나는 미국인들이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세계의 기아인구 10억 명이 하루 세 끼를 챙겨먹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비유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이는 에너지 독점이다. 리프킨은 이러한 독점이 엔트로피의 법칙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 현재의 사고 개념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류는 자원이 0이 될 때까지 남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전쟁”을 치룰 것이며, 기아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당시는 태양 에너지가 인기를 얻고 있던 때였으므로 리프킨은 그것이 대안이 되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식의 변화를 촉구했는데, 그것은 태양 에너지를 사용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술이 보유한 효율이 지극히 낮다는 것에 근거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운용대비 효율이 좋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세계의 인식이 바뀌면서 독일은 자국 내 모든 원전을 폐쇄하겠다고 했고(하지만 독일의 경우는 특별하다. 우리나라는 원전 폐쇄의 트렌드를 따라갈 대체 에너지 개발이 부족하나, 독일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지의 땅을 구입해 태양열 발전소를 직접 세워 그것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에 여러 대체 에너지가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가장 원전의존률이 높음에도 트렌드에 맞춰 정치적 전략들이 제기되는 곳이다. 지금껏 태양열 에너지로 소위 ‘재미를 본’ 나라는 없다. 미국은 화력 발전소의 천국이고, 중국은 사상 최대의 원전 보유국이 될 야망을 꿈꾸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리프킨의 ‘전 인류적 호소’는 사실상 힘을 잃은 듯하다. 

  리프킨이 제시한 대안들, 아니 ‘혁신’들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원칙적이라는 뜻이고,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원칙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참담한 현실을 씁쓸하게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인구의 전면적 감소와 농촌의 활성화, 민주적 기업조직,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소비 최소화, 세계 인구의 큰 감소(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불성설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등이 리프킨의 대안이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남긴 최악의 유물들을 거둬내기 위해 필요한 고통과 희생의 방안들은 이 정도의 무모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대안들은 그가 내리고 싶었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다. 

  “궁극적인 도덕률이란 가능한 한 에너지를 적게 쓰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독자들은 리프킨의 호소문이 아주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근검절약’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절실한 실천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프킨이 경계했던 낙관주의자들, 즉 “진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전기와 물을 낭비하고 사치와 오염을 일삼고 있다. 이 책이 시대의 경종을 울려 많은 이들의 손에 들려졌었지만 종소리는 얼마나 오래 울리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창피함과 곤혹스러움에 한숨을 쉬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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