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아래서 기다릴게
아야세 마루 지음, 이연재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당신에겐 안심하고 돌아갈 곳이 있나요?"

 

자극적이지 않고 무척 평범하지만 끝맛 담백한 소설 <벚꽃 아래서 기다릴게>. 금요일, 도쿄발 신칸센을 타고 고향으로 간 다섯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단편 취향이 아닌 저로서는 음... 초반엔 이 소설이 확 끌리지는 않았는데, 마지막 장을 넘길 무렵엔 안 읽고 넘겼으면 아쉬웠겠다 싶을 정도로 괜찮았어요. 

 

토호쿠 지방으로 가는 그들. 토호쿠 지방은 도쿄 위쪽, 일본 동북부를 일컫는데 아오모리 현, 이와테 현, 미야기 현, 아키타 현, 아마가타 현, 후쿠시마 현을 아우른 곳입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관광객 발길이 예전만치 못한 곳이죠.

 

 

 

첫 번째 이야기 <목향장미 무늬 원피스>. 대학생 토모야는 시골 할머니 댁으로 갑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지내던 할머니가 뒤늦게 좋은 사람을 만나 그분을 따라 간 곳이라 연고 없는 그곳은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토모야는 할머니가 입은 목향장미 무늬 원피스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께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자 했을 때 찬성이냐 반대냐 가족 간의 다툼이 심했는데 토모야는 궁금하기만 합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낯선 곳으로 떠날 용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토모야에게 할머니의 말씀은 잔잔한 울림을 줍니다. "새로 산 예쁜 원피스를 입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거, 오랫동안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단다." 그제서야 토모야는 홀로된 어머니나 아버지의 인생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변함없이 자식 뒤치다꺼리하다 곱게 늙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우리의 부모님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인간인 것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늙어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님을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리츠코는 약혼자 유키토와 함께 그의 부모님 댁, 후쿠시마로 갑니다. 그녀의 마음속엔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후쿠시마 이름만으로도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방사능 수치 등 나름 공부를 해가지만, 그곳에 사는 그의 가족들에게 실례를 할까 두렵습니다. 예비 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초밥의 생선을 보면서도 멈칫하는 리츠코.

 

그런데 그곳의 일상적인 모습과 이미지는 TV에서 보던 후쿠시마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뉴스에서는 나쁜 이야기만 나오니까요. 평범한 이야기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후쿠시마의 피해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일상을 겪은 리츠코의 이야기 <탱자 향기가 풍기다>입니다.

 

 

 

어머니의 기일에 고향을 방문한 타케후미 이야기 <유채꽃의 집>.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느꼈던 감정과 기억들을 다시 꺼내듭니다. 어머니를 어머니의 껍질을 벗어던진 여자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것에 괴로워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니까 무조건 우리들을 받아 주었으면 했으니까요.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라면 이상하니까...... 어른이 되고 나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처럼 바라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목향장미 무늬 원피스>와 비슷한 주제인데, 타케후미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섭섭한 감정이 어떻게 해소되는지 보여줍니다.

 

 

 

초등학생 치사토의 이야기 <백목련 질 때>. 어리다고 얕잡아 볼 수 없는, 깊이 있는 스토리였어요. 이모 결혼식에 가느라 어머니의 고향에 간 치사토. 얼마 전 함께 어울리던 학교 동생의 죽음으로 마음의 충격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 아이의 아픔을 이해해서가 아닌, 그런 사고를 자기도 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꿈속에서 동물이 되어 몇 번을 죽고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며 다음 생엔 더 강한 것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납니다.

 

피어 있는 시간이 짧아 더 소중한 백목련을 좋아하는 할머니, 미야자와 켄지의 동화마을에서 켄지가 여동생의 죽음을 기리며 썼다는 <영결의 아침> 시를 읽어준 엄마 덕분에 치사토는 서서히 이겨냅니다. 무섭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눈앞의 반짝임을 절대 놓치지 않고 끌어안는 켄지의 시가 특히 묘약이었어요. 

 

 

 

책 제목으로 쓰인 마지막 이야기 <벚꽃 아래서 기다릴게> 편. 앞서 네 사람 이야기 때마다 잠깐씩 등장하는 신칸센 차내 판매원이 이번 편 주인공입니다. 사이가 좋지 않아 의지할 데라고는 남동생뿐이었던 그녀의 어린 시절. 그녀가 성인이 되자마자 이혼한 부모님으로 인해 가족의 연이 없습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피로에 찌든 평범한 아줌마일 뿐입니다. 남동생 역시 결혼관과 가정관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긴 하지만 부모님처럼 될까 머뭇거리게 되죠. 게다가 어머니의 재혼은 그들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없다는 것만 남겼습니다.

 

신칸센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생각합니다. 인연이 있는 장소로 가는 그들의 표정은 무장해제된 느낌이라 그들의 고향은 어떤 곳일지, 어떤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푹 잠든 모습이 나쁘지 않게 보이는 겁니다. 사실 고향에 남아 있는 이들과의 사이가 불편하거나 귀찮아서 마음 편히 고향에 가는 사람은 드물 수 있지만  그녀가 못 가진 진짜 따뜻한 가정에 대한 이상적 모습을 꿈꾸는 겁니다.

 

 

 

읽으면서 기차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훅 치고 올라옵니다. "플랫폼에 내린 순간 몸을 감싸는 따스한 공기에 이끌려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돌려보았다."처럼 저도 기차역을 나가는 순간 맡게 되는 그곳만의 냄새, 좋아합니다.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지역 명물은 토호쿠 지방을 여행한다면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겠다 싶을 정도로 감칠맛 나게 잘 그려내고 있어요.

 

안심하고 돌아갈 장소로서의 고향. 어긋나있던 관계도 고칠 여지가 있는 고향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다섯 편의 이야기. 밋밋할 정도로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일상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담백한 에세이 같은 소설입니다.

 

내가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보다는, 편안하게 해 줄테니 누군가가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 저 먼 곳에서 신칸센을 타고 와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발견한 예쁜 것을 함께 보고 즐겨 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걸 해 보고 싶어서 가족이 가지고 싶은 걸지도 몰라. - 책 속에서

 

저는 처음에 당신은 안심하고 돌아갈 곳이 있는지 물었죠. 이번엔 질문을 바꿔봅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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