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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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든을 넘기며 블로그에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한 어슐러 르 귄 작가. 2018년 88세로 영면에 들기까지 이어진 날카로운 사색, 반려동물 파드와의 일상이 더해져 감칠맛 나는 글이 담긴 노작가의 마지막 에세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스시 연대기, 헤인 시리즈 등 빛나는 작품들로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거장으로 불린 어슐러 르 귄. 저는 유려한 문장으로 묵직한 대서사시를 보여준 <라비니아>로 르 귄 작품을 처음 만나 반해버렸답니다. 거장의 판타지 소설에 빠져들기 전에 냥집사라는 동질감을 불러일으킨 이 에세이를 먼저 읽어보게 되었네요.

 

 

 

2010년 하버드로부터 받은 50회 동창회와 관련한 설문조사 에피소드로 시작합니다. 르 귄은 말도 안 되는 질문들 일색이라며 일침을 놓습니다.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질문들에 일일이 토를 다는 르 귄. 그 속엔 미국 정치, 경제 및 페미니즘 같은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르 귄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서 르 귄의 인내심은 폭발합니다. 질문의 보기는 골프로 시작합니다. 르 귄의 직업인 글쓰기 같은 창의적 활동은 한참 뒤에 있습니다.

 

전업작가인 르 귄은 은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질문에 대해 르 귄 스스로의 생활을 생각해보자면 '할 일이 없는 시간'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잠을 자고, 읽고, 쓰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고, 걷고, 여행하고, 이따금 영화도 보고, 고양이와 노는데 쓰는 시간은 여가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년 시기에 여가 시간이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직장에서 일하지 않는 시간을 뜻하는 여가시간. 그렇다면 은퇴한 사람들이 많은 여든이 된 그들에게 '남는(spare)' 시간 외에 뭐가 있을까 하며 말이죠. 늘 해왔던 너무나 쉬운 일들이 노년이 되면서 점차 어려워짐을 몸소 느끼는 노년 시기. 르 귄은 말이 명언입니다.

 

나는 시간을 남겨둘 수가 없다.  하버드 대학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다음 주면 여든하나가 된다.  내게는 남겨둘 시간이 없다. - 책 속에서

 

 

 

길고양이나 유기묘에게 간택당해 오랜 세월 고양이와 함께 한 작가. 그동안 간택 당하기만 했던 그에게 드디어 선택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동물 보호 단체 휴메인 소사이어티에서 한 살 넘은 턱시도 고양이가 눈에 들어온 겁니다. 귀여움 종결자라며 첫눈에 반해버린 고양이는 그렇게 르 윈의 반려 고양이가 됩니다.

 

묵직한 주제마저도 위트 넘치는 글맛으로 선보인 어슐러 르 귄. 반려동물 파드와의 에피소드도 르 귄 작가가 쓰니 색다른 맛이!!

 

노작가라면 모름지기 고상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깡그리 없앱니다. 욕설과 과격한 표현을 담은 작품, 의미심장한 답변을 바라는 독자의 질문, 위대한 미국 문학이라 불리는 작품, 판타지 문학 장르에 대한 편견에 대한 대처 등 르 귄은 솔직하게 지릅니다. 블랙유머도 꽤나 나오네요. 암튼 노작가의 에세이라 해서 고리타분하거나 우수에 젖은 감성팔이일 거란 편견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어스시>에 관한 짧은 언급과 함께 판타지 글쓰기에 대한 힌트를, 영웅 외에는 잊어버리는 위대한 고전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의견은 베르길리우스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새롭게 조명한 <라비니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와 증오에 대한 이야기는 묵직합니다. 남자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시대에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할머니가 된 르 귄 작가 역시 길거리에서 무관심, 혐오 혹은 적의를 담은 시선을 느낀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의 눈빛은 자신과 다른 동물 종을 바라보는 동물들의 눈빛과도 같습니다. 노인과 함께 살아보지 않은 아이들은 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인간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가치를 짚어줍니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불필요한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노작가의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탁월한 사냥꾼임에도 사냥감을 죽여야 한다는 것도, 죽이는 방법도 모르는 살짝 허술한 턱시도 고양이 파드. "내게 대놓고 반항하는 고양이는 처음이다."라며 한탄을 하다가도, 흠잡을 데 없는 본능과 기술도 아직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것뿐이라며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그러다 얼떨결에 죽은 쥐를 위해 르 귄 작가는 시를 짓습니다. 르 귄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작가 특유의 품격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만날 수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여든을 넘기며 자신의 노화에 대한 감정, 작가로서 하고 싶은 말들,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 그리고 일상의 단상들을 엮은 에세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라고 밝히며 시작하지만, 정작 본인은 남겨둘 시간이 없기에 하나하나 다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더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어 아쉽지만, 어슐러 르 귄 작가의 옆집 할머니 같은 면모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책이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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