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찾기


야근을 했다. 감기 기운이 있어 머리가 멍했고, 일을 하려고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어도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하던 일을 끝내고 가고 싶어서 계속 앉아 있었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거의 막차 시간이 다 되었다.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서류 하나를 놓고 온 것이 떠올랐다.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서 또 일을 할 건 아니니까 그냥 가자고 생각했다. 그 잠깐의 망설임 때문이었을까? 열심히 뛰어서 지하철 역에 개찰구를 통과해 승강장에 내려셨는데, 막차의 문이 닫히고 열차가 떠나버렸다. 단 1분만 더 빨랐어도 탈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피고감이 몰려왔다. 터덜터덜 걸어서 다시 개찰구를 향했다. 지하철을 타지도 못했는데, 요금은 내고 나갔다. 큰 길로 나가서 택시를 기다렸다.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는 빈차는 많았으나, 이쪽으로는 빈차가 오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몸을 때렸다. 몸이 덜덜 떨렸다. 겨우 빈 택시를 잡아 타고 집에 오니 새벽 1시였다.


문득 찾아볼 내용이 생각나서 책 한 권을 찾기 시작했다. 이사하고 나서 아직 책 정리를 하지 않아, 책은 제멋대로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래도 평소에 대충 어디쯤 있을거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어렵지 않게 책을 찾아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성대앞 사회과학전문 서점인 풀무질에서 책을 샀고, 조금 읽다가 말았던 기억이 있는데, 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리가 없는데, 여기 어디쯤 있을텐데 하고 찾고 찾고 또 찾았는데 없었다. 피곤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책 찾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쯤하고 그냥 잤어야 했는데, 결국 모든 책장을 다 훑기 시작했다.


한시간 반 동안 모든 책장을 다 뒤졌지만 원하던 책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사무실에도 없을텐데. 이상하다. 없을 리가 없는데, 어디 갔을까? 결국 그 책을 다시 사야하나, 도서관에 있을까 등을 생각하느라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눈을 뜨니 새벽에 내가 왜 그 책을 찾아 헤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어떤 부분을 찾아보고 싶었던 건데, 그게 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난 그 늦은 시간에 무슨 짓을 한걸까?

 

달콤한 휴식


2월 초는 정말 죽을만큼 피곤하고 힘든 나날들이었다. 특히 2월 3일, 월요일은 최고였다. 년초에 정리해야 할 업무들이 밀려 있었고, 월초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주초에 처리해야할 일상업무들 역시 미뤄둘 수 없었다. 그러나 연휴때 제대로 쉬지 못한 몸은 월요일 아침부터 휴식을 원했다. 입 속과 코 속의 헐어버린 상처들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일주일의 중간인 수요일 저녁에는 중요한 행사가 있었고, 금요일에는 지역 녹색당 총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총회를 준비하면서 여러가지 일을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낮엔 회사일을 하고, 저녁엔 행사나 회의가 있었고, 밤에는 녹색당 일을 해야했다. 술을 마시거나,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나서, 새벽에 집에 들어오면 다시 녹색당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드디어 금요일, 함께 준비한 여러 당원들 덕분에 성공적으로 총회를 마치고, 뒤풀이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술도 술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로 밤을 지새웠다. 토요일 아침에 집에 들어갔고, 그대로 뻗어서 잤다. 늦은 아침에 아이들 밥을 차려 먹이고, 오후에는 아이들과 잠시 놀아주다가 다시 낮잠을 잤다. 또 아이들 밥을 차려 먹이고, 책을 한 권 펼쳐 들었다. 오래전 알라딘 이웃으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었는데, 받았을 당시 조금 읽다가 말고 방치해두었던 책이었다. 한동안 집중해서 책을 읽다가 아이들에게 늦은 저녁을 먹이고, 씻긴 후, 아이들과 함께 잠들었다.

 

전날 일찍 잠들었음에도 일요일엔 늦잠을 잤고,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덕분에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대충 챙겨먹고, 졸리면 자고, 깨면 다시 책을 읽었다. 오후 늦게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읽던 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책을 어서 읽고 아이들과 놀다가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자가 왔다. 지역 시민신문에 연재하던 글의 마감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사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건 아니고, 마음 한 켠에서는 고려를 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당장 몸이 피곤하니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주말 이틀간 그토록 원했던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는데, 일요일 밤에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야하다니 갑자기 우울해졌다. 해야할 일이라면 빨리 해치우는게 낫다. 1년간 계속했던 시민신문 연재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아직 글감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했던 터라 빈 화면에 커서만 깜빡이는 상태로 제법 오래 시간이 지났다. 그러다 뭔가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거의 쉬지 않고 빠르게 글을 써나갔다. 중간에 한번 분량을 확인하느라 잠시 쉬었을 뿐 30여분 많에 정해진 분량을 살짝 초과한 상태로 글을 마쳤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조금 남아있던 책을 마저 읽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써놓은 글을 고치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문장과 표현들을 지우고, 어색한 내용을 바꾸고, 비문이 없나, 오타는 없나 꼼꼼히 살폈다. 대략 세 번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펴본 후에 글을 저장했다. 이메일을 보내고 나니 시간이 제법 늦었다. 월요일을 위해 자러 가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푹 쉬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몸을 뉘었다.


책, 낮술, 저녁술


다음 한 주도 바빴다. 저녁에 회의나 술자리가 있었고, 아이들과 보내는 날도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는 작은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졸업식을 겸한 음악발표회가 있었다. 제목은 음악발표회이지만 괴상한 영어 노래를 틀어놓고 아이들에게 해괴한 옷을 입히고 춤을 추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행사다. 큰 아이때부터 벌써 몇 해째 참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젠 대충 무슨 무슨 순서로 진행될지도 뻔히 다 외울 지경이다. 올해도 장미 한 송이를 사서 행사가 진행되는 교회 강당으로 갔다. 저녁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다. 처음 이 행사에 참석했을 때, 늦은 시간까지 행사를 진행하는 원장에게 화가 많이 났었다. 어른들도 배가 고프지만, 아이들이 그 늦은 시간까지 밥도 못 먹고 무대에 올라 춤을 추게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는 그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원장에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늦게까지 행사를 해야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 해부터는 조금 더 일찍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저녁을 먹기에 늦은 건 변함이 없다.


작은 아이는 아직 어려서 무대에 오르는 횟수도 적고, 언니 오빠들에 비해 일찍 순서가 끝나 옷을 갈아입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다른 부모들과 달리 우리는 서둘러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아이들은 피자를 원했고, 택시를 타고 근처에 있는 맛있는 피자집을 향했다. 작은 아이는 꽃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고, 큰 아이도 자신이 했던 공연들을 하는 후배들을 보느라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나는 무척 피곤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얼른 아이들을 씻기고 일찍 잠들었다.


토요일에는 누워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었다. 아, 정말 행복했다. 주말에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쉴 수 있다니! 아내는 일이 있어서 나갔고, 아이들 점심을 차려주고 나는 책을 계속 읽었다. 별로 입맛이 없었는데, 책에서 자꾸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오고, 주인공의 비극적인 처지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나도 술이 땡겼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청하가 한 병 있었다. 낮술을 마시면서 책을 계속 읽었다. 술병은 금방 비었고, 더 마시고 싶었으나 술 사러 나가기가 귀찮아서 다시 누워서 책을 읽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고, 아이들 저녁을 차려줘야 했는데, 집에 마땅한 반찬이 없었다. 음식을 만들기가 너무 귀찮았다. 대충 어떻게 때워볼까 싶어서 냉장고를 뒤졌는데, 별로 쓸만한 게 없었다. 아이들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라면을 원했다. 라면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서 계속 고민을 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마땅한 메뉴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분식집에 갈까? 치킨집에 갈까? 마침 길 건너편에 새로 치킨집이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곳으로 갔다. 아이들에게 치킨과 감자를 시켜주고 나는 맥주를 마셨다. 


벽에 붙어있는 큰 티비에서 쇼트트랙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 동계올림픽을 하고 있었구나. 집에 티비가 없기도 하고,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서 일부러 만들어놓은 얼음판 위에서 운동을 하는 모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올림픽이라는 행사 자체가 사실은 전쟁이다. 국가별로 누가 금메달을 더 많이 따는지를 놓고 경쟁하는 모양새도 영 보기 싫다. 생각은 그렇지만 막상 경기를 보니, 선수들이 트랙을 빠르게 도는 모습은 흥미롭긴 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고기와 감자를 먹으면서도 티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맥주를 두 잔째 마셨다. 간혹 쇼트트랙 경기를 보기도 하고, 폰으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맥주 세 잔을 마시고 나니, 아이들도 대충 접시를 비웠다. 집으로 돌아오니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낮술에 이어 저녁술까지 먹은 덕분이었다. 재빨리 아이들을 씻기고 함께 잠들었다.


일요일엔 등산을 다녀왔다. 북한산엔 정말 사람이 많았다. 오랜만에 산에 올라 기분이 무척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파른 바윗길이어서 제법 힘들었다. 내려와서 산에 다녀온 시간만큼 술을 마셨다. 적당한 피로감과 적당한 취기로 기분이 제법 좋았다. 집에서는 읽던 책을 마저 끝내고, 일찍 잠이 들었다.


또 다시 바쁜 한 주가 이어졌다. 사실 이 글은 이주째 쓰다 말다, 또 이어서 쓰다 말다 하는 중이다. 어제는 회의를 마치고 친한 선배 집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 말고 누군가 티비를 켜서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봤다. 김연아 경기를 보는 건 처음이다. 나는 평소 김연아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가끔 언론이나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왜 다들 김연아에 열광하는 걸까? 혹시 내가 경기를 보지 않아서 모르는 건가? 만약 그의 경기를 본다면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관심은 없었지만 술을 먹다말고 김연아의 경기를 봤다. 피겨스케이트라는 경기의 룰과 기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경기가 얼마나 훌륭한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랬다. 그의 기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지만, 별로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오늘 보니 김연아의 은메달을 두고 각종 언론과 SNS가 난리였다. 여전히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또 다시 돌아온 금요일. 이번 주말과 다음 주말에는 또 일정이 있다. 그래도 하루는 꼭 비워두고 누워서 책을 읽을 거다. 책 읽으면서 맥주도 마셔야지. 퇴근하면서 읽을 책과 마실 맥주를 고르는 것도 재밌겠다.
















2월 초에 과천에서 이 책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가고 싶었고, 가려고 했다. 당일 아침까지도 고민을 햇지만, 쉬고 싶었기에 그냥 집에서 책을 읽었다. 서형원 선배는 현재 과천 시의원이다. 무소속으로 재선까지 당선된 것은 대단하다 싶다. 그리고 이번에는 녹색당에서 과천 시장으로 출마한다. 그는 한때 내가 몸담았던 단체의 선배 활동가였고, 한때는 이웃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가끔 마주치기도 했다. 그가 과천에서 새로운 녹색 정치를 펼쳐갈 수 있도록,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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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4-02-2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아무리 봐도 너무 바쁘게 사시는 분이어요^^*
그 가운데 글쓰고, 책 읽고 하는 게 가능하다는 게 대단하게 보여요.
저질 체력에, 게으름이 습관화된 저 같은 이 크게 반성합니다.^^*
늘 반성문만 쓰는 게 문제지요ㅠ

감은빛 2014-02-24 17:54   좋아요 0 | URL
흠, 저만 바쁘게 사는 건 분명 아닐테고,
다들 바쁘게 살지만, 저처럼 유난떨지 않는 거겠죠.
직장일과 집안일과 녹색당과 취미 등을 다 놓지 않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욕심이 많다는 거죠.
게다가 능력도 안되는 주제에 욕심만 많으니 늘 제대로 하는 게 없네요.

팜므느와르님, 저야말로 게으름쟁이입니다.
그저 이불 속에 누워서 안나왔으면 좋겠어요. ㅠ.ㅠ

transient-guest 2014-02-26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주독서는 참 좋은데, 책을 읽기에 무리가 없는 접점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어요. 가끔 맥주나 와인을 곁들이면서 책을 읽다가 종국에는 책을 덮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감은빛 2014-02-26 11:1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술이 점점 들어가도보면 책을 덮을 때가 있죠.
제 경우에는 주로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에 작정하고 책을 골라 읽는데,
그땐 술을 아주 적당히만 먹고, 책에 집중하곤 합니다.
이것도 습관인 것 같아요.
 


지난 해 10월 중순 경 아스팔트 균열에 걸려 넘어지면서 무릎을 크게 다쳤다.(이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했다.) 한창 운동에 재미를 붙인 시기였건만, 무릎 상처로 인해 약 한 달 반 이상 운동을 하지 못했다.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무릎을 크게 덮었을 무렵에 작은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아이가 발로 상처 부위를 찼는데, 이때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짙은 분홍색 혹은 보라색의 흉터가 크게 부풀어 있었다. 대략 1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작은 크기. 문제는 부풀어 올라있는 상태였다. 흉터는 일반 피부보다 얇아서 겨울에 더 시리고, 부딪히거나 쓸렸을 때 무척 아팠다. 여러모로 불편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상관없지만, 여름이 되면 무척 보기 싫을 것이다. 그땐 아무생각없이 시간이 지나면 이 흉터가 가라앉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는데, 시간이 지나도 이 부풀어 오른 흉터가 가라앉지 않았다. 더 기다려도 소용없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나는 병원 가기를 망설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만 뒤로 미루고 있었다. 마침내 지난 1월 어차피 가야할 거라면 더 늦기 전에 가자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무릎이니까 아무래도 정형외과를 가야지 싶어서 방문했더니, 의사는 성형외과로 가란다. 무성의한 태도. 왜 이렇게 된거냐 물으니, 내 체질이 특이 체질이라서 흉터가 그렇게 된 거란다. 나는 자라면서 많은 상처를 입었고, 여기저기 흉터도 많은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라고 말했더니, 더 설명이 없고, 그냥 성형외과를 찾아가면 된다고 하고 내보낸다. 무척 기분이 나빴다. 이래서 병원에 오기 싫었던 거다.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했더니, 우리가 가입한 의료생협의 병원에서도 치료가 가능할 거라고 찾아가 보란다. 곧바로 갔어야 했는데, 한번 기분이 상했던 것 때문인지 다시 병원을 찾기가 싫었다. 물론 바쁘기도 했다. 계속 잡히는 각종 모임과 회의와 술자리들이 있었고, 약속이 없는 날엔 일찍 와서 아이들과 지내야 했다.


최근에서야 다시 병원을 가봐야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살림의원(살림의료생협의 병원)은 일주일에 한번 화요일에 야간 진료를 하길래, 어제 퇴근 후 병원을 찾았다. 마을 주치의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오랜만에 뵈어요."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어머 진료 받으러 오신 건 처음이시네요?" 라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렇네. 의료생협 조합원이 된지 2년이 좀 넘었고, 아이들 진료받으로 몇 번 온 적은 몇 번 있었는데, 내가 진료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왔냐는 말에 작년에 10월에 다친 상처 얘길 꺼냈더니, 고맙게도 내가 다쳐서 한동안 다리를 절고 다녔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흉터를 보여줬다. 손으로 만져보고, 눌러보더니 "이건 켈로이드가 맞는 것 같아요." 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었더니,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대충 들어보니 지난 달에 정형외과 의사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켈로이드 피부는 피부 속에 있는 섬유질이 과도하게 비대해지는 현상인데, 주로 유전적인 요인에 의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고 한다. 또 피부 손실이 많았던 상처(즉, 상처가 큰 경우)나 무릎처럼 상처에 벌어지는 힘을 지속적으로 받는 상처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정형외과 의사에게 했던 말을 다시 했더니, 대개는 체질적인 요인이 많은데, 내 경우에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치료 방법은 스테로이드 주사를 놓는 것이라고 했다. 스테로이드가 켈로이드를 수축시켜서 부풀어오른 흉터를 작아지게 만든다고 한다. 한번에 끝나지 않고 여러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치료실로 자리를 옮겨 주사를 맞았다. 백원 동전보다 조금 작은 흉터에 주사바늘을 찔러넣고 스테로이드를 살짝 투여하고는 주사바늘을 살짝 뺐다가 다른 방향으로 다시 찔러서 투여하고 또 빼서 다른 방향으로 또 찌르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흉터이긴 하지만 생 살을 주사바늘로 이리저리 헤집는 터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 뇌를 강타했다. 순간순간 아팠지만 내색을 할 순 없어서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주사를 다 놓고 나서 되도록 흉터 주위를 거즈나 밴드로 덮어 두라고 한다. 켈로이드는 자꾸 닿고, 부딪히면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고 직접 물리력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주사를 다 놓고 간호사가 거즈를 붙이고 있는데, 아내가 작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들어왔다. 치료실 문 밖에서 아이가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가 문을 살짝 열었고, 작은 아이가 나를 쳐다봤다. "아빠, 아퍼? 저번에 내가 차서 아픈거야?" 그 얘길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이가 발로 차서 딱지가 떨어졌던 날, 무척 아파서 아이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났다. 너 때문에 아빠가 아프다는 말을 아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인데. 그래서 얼른 "아니야! 우리 이쁜이 때문에 아픈거 아니고 다른 일로 아픈 거야." 라고 말해줬다. 아이는 내가 치료실을 나온 후에도 또 한번 물어본다. "나 때문에 아픈거 아니야?"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아니라고 다시 한번 확인해줬다.


병원을 나와서 운동을 마친 큰 아이를 기다리면서 분식집에서 배를 채웠다. 아이들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주사를 맞은 자리가 불편해서 조금씩 다리를 절으며 걸었다. 참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 넘어져 다친 상처가 벌써 몇 달째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지. 게다가 다시 또 몇 달간 주사를 맞아야 한다니. 잠들기 직전에는 주사바늘로 찌른 자리가 쿠쿡 쑤시면서 아팠다.


치료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을 씻으러 들여보내고, 어제 택배로 받은 봉투를 뜯었다.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선물로 받은 책이었다. 언젠가 응원 댓글을 쓰면 신간을 보내준다는 이벤트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운 좋게도 당첨이 되었다. 책을 조금 살펴보고, 아이들과 잠시 놀아주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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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4-02-1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켈로이드에요. 팔뚝에 주사자국. 엄마 닮았답니다. ^^ 주사도 맞아보고, 말캉한 파스 비스므리한것도 있어요. 그것도 해봤는데, 사실 저는 전혀 신경 안쓰고, 심지어 매끈한것보다 안심심하잖아, 그러고 있습니다. 엄마는 그 연세까지도 콤플렉스라고; 여튼, 주사 오래 맞아도 다시 돌아올수 있는데, 병원에선 그런얘기 안하던가요?

하이드 2014-02-1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따라 다른데, 서울대병원에서는 의사선생님이 매우 놀라시며 ㅎㅎ 어떻게 그걸 그냥 맞았냐고, 마취해주셨어요.

감은빛 2014-02-14 18:06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도 켈로이드군요.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저도 처음 주사를 맞을 때는 그냥 참을만하겠지 싶었는데,
계속 주사바늘을 뺏다가 방향을 틀어서 다시 꽂아 넣기를 반복하니까
좀 견디기가 힘들더라구요.

살짝 마취는 왜 안해줬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2014-02-12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4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5 0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팜므느와르 2014-02-13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마다 한 가지씩 고질 체질(?)은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켈로이드 저는 잘 모르지만 엄청 성가시고 힘들겠어요.
언능 나으시어요.
전 기관지 천식이 심해요. 아부지한테서 물려 받았지요.
봄도 다가오는데 아이랑 꽃놀이 하려면 건강부터 챙겨야지요.
그러고 보니 봄이 오고 있어요. 닷새 째 봄을 시샘하며 뻣대는 저 눈발의 향연ㅠ

로긴하지 않은 상태에서 덧글 씁니다. 감은빛한?! 오후입니다.^^*

감은빛 2014-02-14 18:10   좋아요 0 | URL
완벽한 사람은 없겠지요.
누구나 불편하거나 안 좋은 면은 갖고 있을 것 같아요.

감은빛 오후를 보내셨군요. ^^

오늘은 금요일이고, 곧 퇴근입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놀고 싶어서 주말을 기다렸는데,
요새는 쉬고 싶어서 주말을 기다려요.

팜므느와르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2014-02-14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4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빗길 운전


명절 중간이었던 토요일 어른 6명과 아이 5명의 대가족이 차 2대로 움직였다. 아침부터 누군가 서울대공원을 가자고 말을 꺼내는 바람에, 아이들을 동물원에 밀어넣고, 어른들은 미술관에 가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혀서 준비시키는 일은 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게다가 집에서 서울대공원은 너무 멀다. 분명히 도로는 막힐 테고, 길에 버리는 시간과 기름이 아깝기도 하고, 주차장이 되어버린 도로에서 시달리는 일이 너무 피곤해서 싫었다. 누군가 대안으로 비교적 가까이 있는 실내놀이터를 제시했고, 부모님보다 더 상전인 아이들을 모시고 우리는 실내놀이터를 찾아갔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처음엔 내렸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였는데, 이동하는 도중에 쏟아부었다는 표현이 적당할만큼 상황이 바뀌었다. 하필 앞 창의 빗물을 닦는 와이퍼가 움직일때마다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와이퍼의 고무가 많이 닳아서 유리와 마찰할 때 소리가 심해졌다. 즉, 갈아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비는 쏟아 붓는데 와이퍼 소리가 거슬리니 좀 짜증이 났다. 게다가 시야가 자주 흐려져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작은 차에 많은 사람들이 타 있으니, 평소보다 실내에 성에가 더 심하게 끼었다. 눈이 많이 오거나, 비가 많이 오는 날 운전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이 이 성에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겨울이라 습관적으로 히터를 켜놓고 있었는데, 따뜻한 공기 때문에 성에가 더 심해졌다. 급하게 에어컨을 켰다. 에어컨 덕분에 성에는 곧 사라졌는데, 뒷자리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춥다고 한다. 잠시 에어컨을 끄면 또 성에가 생기고, 다시 켜면 또 춥다.


비 때문에 좌우거울과 뒷거울들이 잘 안보이는 것도 무척 신경쓰이는 일이다. 특히 차선을 바꿔야하는데, 옆 차선에서 차가 오는지 안오는지 잘 안보이면 들어갈 수가 없다. 낯선 길을 달리다가 네비가 시키는대로 지하차도로 진입하기 위해 왼쪽으로 차선을 바꿔야 하건만, 빗방울과 성에 때문에 거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방향지시등(깜빡이)을 켜고 서서히 들어가면서 계속 거울을 살폈건만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장님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차가 없음을 확인하고 지하차도로 진입하면서 빗길 운전이 위험한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무척 신경을 많이 쓰고, 힘겹게 운전을 했지만 그래도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왔다. 우리 차는 그랬는데, 같이 움직였던 매체 차는 타이어 펑크가 났다. 돌아오는 도중에 도로에 움푹 패인 구덩이가 있었는데, 비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서 피하지 못했고,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타이어 휠이 찍혀서 깨졌다고 한다. 안그래도 돈 들어갈 일이 많은 연초에, 타이어와 휠 값으로 적잖은 돈을 쓰게 되어 동생과 매제는 얼굴이 어두웠다. 무척 재수가 없었다는 말 밖에 해줄 수가 없는 경우인데, 이것도 비만 아니었으면 분명히 피해갈 수 있었지만, 빗길 운전이라 일어난 사고다. 


한 7~8년 전에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에 군산으로 내려가야 할 일이 있었다. 차에 동료를 태우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정말 어마어마한 폭우가 쏟아졌다.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올려도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가시거리가 채 10미터도 안되었다. 차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는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비상등을 켜지 않으면 앞 뒤 차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겁이 났다.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고속도로를 달린다는 사실이. 속도를 확 낮추고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희미하게 보이는 앞 차의 비상등만 줄곧 쫓아갔다. 빗길 운전이 얼마나 위험하고 겁나는 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날이었다. 


진짜 연휴가 필요해!


작년 11월즈음 새 달력을 받았을 때, 누군가가 휴일을 찾아보며 내년 설에는 4일이나 쉬네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4일이나? 4일 밖에가 아니고?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설과 추석은 고향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명절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다 움직이는 시기이므로 말 그대로 교통대란이 일어난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맞은 설날에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어쩔수 없이 고속버스를 탔다가 17시간 동안 갇혀 있었던 생각을 하면 정말 몸서리가 쳐진다. 다시는 고속버스를 타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지만, 기차표를 구하는 일은 늘 어려웠고, 그 후로도 가끔 12시간에서 15시간을 갇혀 있었던 때가 있었다. 고속버스가 이랬으니 일반 승용차는 더 오래 걸렸으리라. 


이런 교통대란은 짧은 시기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동할 수 있는 기간을 좀 더 길게주면 교통란은 훨씬 줄어든다. 그래서 연휴를 하루라도 더 주면 도로 상황은 더 좋아지는 것이다. 사실 딱 4일 동안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하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를 지내고, 처가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면 잠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연휴라는 단어의 '휴'는 분명 쉰다는 뜻인데, 이렇게 움직이면 아주 고강도 노동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1년에 두 번씩 해마다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유럽에서는 대체로 12월과 1월에 한 달에서 한 달 반 동안 일을 안한다고 한다. 아예 사무실 문을 열지 않는단다. 여름에도 또 약 한 달 가량 휴가를 간다. 일년 열두 달 중에 두 달의 휴식을 갖는 것이다. 부러웠다. 우리는 한 달은 바라지도 않고, 설과 추석에 딱 일주일씩만이라도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그럼 훨씬 살만한 명절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각 보름씩 연휴를 줘서 1년에서 한 달을 휴식기간으로 정하는 건 어떠까 싶기도 하다.


작년부터 우리 가족이 부산으로 가는 대신, 부모님께서 서울로 역귀성을 하기로 했다. 제사를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한 거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표는 여유있게 구할 수 있고, 비록 짧은 시간만 열어두고, 몇 편 배정이 안되어 있긴 하지만, 철도공사가 역귀성 할인도 제공한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힘드시겠지만, 해마다 기차표 구하는 전쟁이 더 치열해지고 심각해져서 너무 힘들었던 상황에, 많이 고민하고 의논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조금 더 수월할 줄 알았는데, 물론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만큼 수월해진건 틀림없긴 한데, 그래도 명절을 지내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연휴 전날 저녁 서울역에서 부모님을 모셔오고, 그 전까지 장을 다 봐둬야 하고, 연휴 첫 날엔 하루종일 제사음식을 만들었고, 둘째날인 설날에는 제사를 지내고 오후에 처가에 다녀왔다. 저녁 늦게 동생네 가족이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아이들의 소란이 시작되었다. 아이들 5명은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효과적으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아이 돌봄 노동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절실히 깨달은 시간이다. 다음 날엔 앞서 말했듯이 실내놀이터를 다녀왔고, 연휴 마지막 날엔 점심을 먹고 동생네가 떠났고, 오후 늦게 부모님을 서울역으로 모셔다 드렸다. 집으로 돌아와서 청소를 하고 집안 정리를 하다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다음날인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여러 감정이 북받쳤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랬다. 연휴를 돌아보니 반나절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했다. 아니 30분 이상 쉬어보지 못한 것 같다. 사실 명절 전부터 몸이 썩 좋지 않았는데, 억지로 억지로 버텼건만 그대로 출근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는 게 너무 짜증이 났다. 분명 연휴였건만 나는 왜 하루도 쉬지 못했을까! 결국 월요일 아침에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피곤해서 입 안에 두 군데가 헐었고, 코 속에도 크게 한 군데가 헐었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이를 닦을 때마다 헐은 자리가 쓰라렸고, 세수를 하거나, 안경을 매만지다가 손이 코 끝에 닿으면 굉장한 고통이 느껴졌다. 누가 들으면 뭐 그런걸로 엄설이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세수를 하지 않고 그냥 출근하면 안될까 고민할 정도로 고통을 느꼈다.


그렇게 맞이한 월요일은 무척 바쁜 날이었다. 주초와 월초와 년초에는 일이 몰리는 시기인데, 하필 그날은 세 개가 다 겹치는 날이었다.(아직 2월이니 년초다.) 그리고 이번 주는 유난히 바쁜 시기다. 녹색당 지역 모임에서 1년에 한번 총회를 여는 시기라서 그 준비 때문에 계속 일을 해야했다. 회사 일, 녹색당 일, 집안 일, 일, 일, 일, 일, 일, 일, 일!!!!


나는 좀 쉬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어디 섬에 가서 딱 한 달만 아무생각없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 현실적으로 한 달은 불가능할테니 3~4일만이라도 좋다. 진짜 쉴 수 있는 연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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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2-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년전 한 여름에 폭우속을 달리는데 무서워 죽는줄 알았습니다. 시속 20킬로로 엉금엉금 간듯요. 오늘은 주말 전날, 내일 푹 쉬세요~~~~

감은빛 2014-02-12 15:10   좋아요 0 | URL
폭우 속에서 운전을 해야 한다는 건 정말 악몽 같아요!
세실님 말씀 덕분에 푹 잘 쉬었습니다. ^^

맥거핀 2014-02-0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길운전 힘들죠. 저는 요새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지만, 예전 기억을 되살려보면 빗길에는 겁이 많이 났었죠. 감은빛 님에게 제대로 된 휴식이 있기를 저도 바랍니다. 명절은 정말 많은 분들에게 휴식이 아니라 또하나의 일인 것 같아요.

감은빛 2014-02-12 15:11   좋아요 0 | URL
네, 빗길은 시야확보가 잘 안되니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명절은 쉬는 날이 아닌 중노동하는 날이죠.
고맙습니다! 지난 주말에 조금 쉬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1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은빛님 페이퍼 읽으니 진짜 휴식이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어요.
휴가 최대한 낼 수 있는대로 내서 맘껏 책 읽으시고, 휴식 취할 수 있음 좋을텐데
그마저 쉽지 않으신가 봐요.^^*

남자나 여자나 명절은 힘들다는 걸 실감하는 페이퍼에요. 고맙습니다.^^*

감은빛 2014-02-12 15:12   좋아요 0 | URL
저는 휴가를 맘껏 쓸 수 있는 사람이 제일 부럽습니다.
1년에 딱 한번 여름휴가도 눈치 봐가면서 써야하죠.
네, 남자나 여자나 명절은 힘든 것 같아요.
저도 고맙습니다~!
 

 

가만보니 2번 연속 졸음운전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럼 이젠 음주운전에 대해 써야하나 생각했다가, 아냐! 이건 술자리에서나 떠들만한 얘기지. 글로 남길 얘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고친다. 그러다 우연히 전륜구동과 후륜구동에 대한 대화를 듣게 되었다. 예전에 자동차 잡지 기자였던 분이 두 방식의 차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다가 후륜구동의 장점으로 드리프트에 대한 얘기까지 이어졌다.

 

전륜구동, 후륜구동, 4륜구동은 모두 엔진의 위치에 따라 직접 힘을 받는 바퀴의 위치를 말한다. 전륜구동은 앞바퀴 두 개가 엔진의 힘을 받아 움직이고 뒷바퀴 두 개는 힘을 받지 않고, 그냥 앞바퀴를 따라 움직이기만 한다. 반대로 후륜구동은 뒷바퀴 두 개가 엔진의 힘을 받아 움직이고 앞바퀴는 아무런 힘을 받지 않고 있다가 뒷바퀴가 밀어주면 따라 움직인다. 4륜구동은 모든 바퀴가 힘을 받아 움직이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차는 대부분 전륜구동이다. 엔진이 차 앞쪽에 있고 앞바퀴가 그 힘을 받아 움직인다. 즉 차체에서 앞쪽에 무게중심이 실린다는 뜻이다. 앞바퀴가 힘을 받기 때문에 눈, 비 등 미끄러운 도로 상황에서도 원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이 쉽다. 반면 후륜구동은 앞이 가볍고, 뒤가 무겁다. 뒷바퀴가 밀어주는 힘으로 움직이는데, 뒷바퀴로 방향을 바꿀수는 없다. 눈, 비로 미끄러운 도로에서 가벼운 앞바퀴가 겉돌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봉고나 트럭 같은 후륜구동 차들이 미끄러져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다.

 

후륜구동의 이 특징을 이용해 곡선도로(코너)를 미끄러지듯 주행하는 것이 드리프트다. 위키에 의하면 다카하시 쿠니미츠라는 일본 자동차 경주 선수가 1970년대에 처음으로 드리프트 기술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 후 드리프트 킹이라는 츠치야 케이치 선수가 드리프트 기술을 더 개발하고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 츠치야 케이치라는 사람이 바로 유명한 모터스포츠 만화 [이니셜 D]의 모델이 되는 실제 인물이다. 츠치야는 주로 고갯길을 달리면서 드리프트 기술을 연마했다고 하는데, 만화에서 주인공 역시 고갯길을 오가면서 드리프트 기술을 익힌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원리는 간단하다. 후륜구동 차량은 방향을 바꾸는 앞바퀴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래서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도 곧바로 차량이 휙 돌아가지 않고 뒷바퀴가 밀어주는 힘으로 천천히 돈다. 그 원리를 이용하면 곡선도로에 진입하면서 먼저 급하게 방향을 틀어놓으면 뒷바퀴가 관성에 의해 천천히 그 방향으로 돈다. 곧이어 다시 핸들을 차가 도는 방향의 반대로 틀어 앞바퀴가 미끄러지도록 한다. 차가 도는 동안 핸들은 도는 방향의 반대로 향하다가 차가 거의 다 돌았을 때 즈음에 다시 방향을 바로 잡아 곡선도로를 빠져나가면 된다. 설명중에 천천히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즉시 돌지 않는다는 뜻일 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코너를 도는 기술이기에 빠른 시간안에 이뤄진다. 고도의 순발력과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하는 고급 기술이다. 이 기술을 위해서는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핸들을 움직이는 카운터 스티어링(Counter Steer)에 능해야 한다.

 

설명을 듣고, 검색을 해보니, 이 드리프트란 기술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우리 차는 전륜구동이다. 뭐 전륜구동도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차의 특성상 쉽지 않아 보인다. 후륜구동은 주로 수입차에서 볼 수 있다. 돈을 아주 많이 벌어 외제차를 사지 않는 이상 현실에선 어렵다는 얘기. 드리프트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방법은 레이싱 게임이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오락실에서 레이싱 게임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코너를 돌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래서 이 드리프트와 유사한 방식을 터득했던 것 같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코너에 진입하면서 핸들을 한번 꺾어주고 이후엔 미세하게 조절하면서 빠르게 코너를 빠져나가는 방식 말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난 이미 레이싱 게임을 통해 드리프트를 써본 적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게 순수하게 내 머리속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게임하는 걸 보았거나, TV를 통해 레이싱 경기를 보고 따라한 것일 수도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미국에서는 장거리 운전을 하다가 졸리면 핸들과 기어뭉치를 옆 사람에게 전달해 옆 사람이 이어서 운전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진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령 음주운전을 하다가 저 멀리 단속하는 경찰이 보이면 얼른 술을 마시지 않은 옆 사람에게 운전대를 넘기면 된다는 얘기다. 이 방식은 기어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바닥에 있는 우리나라에 흔한 승용차에서는 불가능하다. 기어가 핸들 옆에 붙어 있는 방식을 컬럼 시프트라고 하는데, 이 방식의 차량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도 사람이 앉을 수 있어서, 앞 좌석에 3명이 앉기도 한다. 기어가 핸들 옆에 붙어 있으니 핸들을 옆으로 밀면 기어도 함께 넘겨줄 수 있다. 생각만해도 신기해서 이런 방식의 차량이 정말 있는지 검색해봤다. 아쉽게도 여러가지 검색어를 조합해서 한 시간 이상을 찾았는데, 나오지 않았다.(혹 이런 차량을 아시는 분이 계시면 제보 좀 부탁!)

 

컬럼 시프트를 검색하다가 발견했는데, 요즘은 아예 핸들 양쪽에 작은 레버를 달아 이걸로 기어를 조작하는 패들 시프트 라는 것도 있었다. 최신 차, 고급 차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기어 스틱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조작한다니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운전하는 맛은 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차량의 속도에 따라 자동으로 기어를 바꾸는 오토 차량도 재미는 별로 없다. 차가 많이 막히는 도시에서는 정말 불편하지만, 속도가 오르내림에 따라 기어를 딱딱 바꿔주는 수동 차량이야 말로 운전하는 재미가 있겠다.(물론 우리 차도 오토라서 이런 재미를 못 느낀다.)

 

[이니셜 D] 만화를 조금 밖에 못 봤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찾아 읽어야겠다. 근데 동네에 만화방이 없으니, 어디서 빌려봐야하나 모르겠네. 한때 흔했던 수많은 도서대여점과 비디오대여점들은 또 언제 다 사라져버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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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2-06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거리 운전을 하다가 졸리면 핸들과 기어뭉치를 옆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멋지네요.
언젠가 우리나라의 차도 그렇게 만들어질 날이 올 것만 같네요. 편리함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으니까요.

이 글은 꽤 전문적인 걸요. 잘 읽고 갑니다. ^^

감은빛 2014-02-12 15:14   좋아요 1 | URL
멋지죠? 저도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두 시간 가량을 검색해봤습니다만,
그 차가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찾지 못했어요.
나름 검색에는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언젠가 알게된 날이 있겠죠.

천재님 2015-09-07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천재님은 자전거드리프트도 할 줄 안다 클라쥬 보소 날 경배하라
 

 

미친 짓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운전하면서 미친 짓을 딱 두 번 했는데, 이번이 세번째 미친 짓이다. 또 이런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살다보면 또 생기겠지. 이번에도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작년 연말부터 질질 끌어온 업무가 자꾸만 내 몸과 마음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저번 주에 기필코 끝내리라 생각했지만, 날마다 새로운 일은 자꾸 생기고, 우선 순위에서 자꾸 뒤로 밀렸다. 월요일 아침 출근 하면서 다짐했다. 오늘은 밤을 새서라도 이걸 마무리 하겠다고. 낮엔 다른 일상 업무들 하느라 제대로 열어보지도 못했고, 저녁 먹고 야근에 돌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일하다 중간에 이번 달 취재할 분께 연락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에 통화할 때 이번 주 중 평일 낮에 언제든 괜찮다고 하셨으니, 수요일 오후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 계신 분이 수요일은 안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목요일나 금요일을 여쭤봤더니 다 안된다고 하신다. 그럼 언제? 바로 내일인 화요일만 시간이 좀 난다고 하신다. 다른 방법은 없다. 취재를 하려면 그 분 일정에 맞춰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화요일 오후로 약속을 잡았다. 급하게 취재 준비를 해야하게 생겼다. 사전 자료 조사를 하고, 질문지를 뽑는데 적어도 너댓시간은 걸릴 터인데, 이를 어쩌나?

 

게다가 애초에 나는 화요일 오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작년에 마치지 못한 일을 끝내리라 다짐했다. 지금 끊지 못하면 이 일을 1월 말까지 끌고 갈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뭐 다른 방법은 없다. 어쨌든 하려고 했던 일을 해야지. 한참을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눈이 아파서 고개를 들어보니 자정을 넘겼다. 곧 집에 가는 지하철 막차 시간이다. 지금 접고 집에 가느냐, 새벽까지 좀 더 하느냐 잠시 고민했다. 일을 끝내려면 아직 멀었다. 편의점에 가서 에너지 음료를 하나 사왔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중간에 눈이 아프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잠시 엎드려 있긴 했지만, 최대한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5시가 넘어 있었다.

 

중간 중간에 모니터 구석의 시계를 보면서 3시 쯤엔 집에 가야지, 4시 넘으면 가야지 생각했는데, 벌써 첫차가 다닐 무렵이 되었다. 하던 일도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서두르면 한 시간 안에 끝나겠다 싶었는데, 집중력이 너무 떨어졌다. 다른 일로 뇌를 환기 시킬 겸, 잠시 취재 준비를 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좀 찾아보고, 질문할 내용들을 키워드로 툭툭 던져 보았다. 5시 즈음부터 다시 하던 일을 시작해서 6시를 살짝 넘긴 시간에 대충 일단락을 지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번 더 살펴보려고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중간중간에 있었다. 이걸 다시 보기에는 지금 너무 피곤했다. 일단은 집에 가서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와서 봐야지 싶었다.

 

지하철 역에 내려서 집을 향해 걷는데, 모든 사람들이 나와 반대 방향인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거 참 묘한 느낌이었다. 남들 출근할 때 퇴근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도 금방 다시 출근해야 했다. 아산으로 취재를 가기 위해 차를 몰고 나와야 했고, 아직 어린이 집을 옮기지 못한 작은 아이를 예전에 살던 동네로 데려다 줘야 했다.

 

사무실을 향해 차를 몰고 가면서 든 생각은 중간에 한 시간만이라도 잠을 잘 틈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 점심을 먹지 않고 출발해서 아산 근방 어딘가에 차를 대고 잠시 자다가 시간 맞춰 가야지 싶었다. 쉽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운전 중 나도 모르게 졸다가 사고가 나면 안되니 준비는 철저하게 해야지 싶었다.

 

사무실에서 오전에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취재 준비를 최대한 간단하게 했다. 급하게 질문지를 작성해서 메일로 보내고, 전화로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밤새워 마친 일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쉬웠지만 그냥 그대로 넘겼다. 나중에 미숙한 부분에 대해 한 소리를 듣더라도 어쩔수 없다. 틈이 나면 잠시 졸려고 했는데, 그럴 틈은 없었다.

 

졸음 운전을 벗어나는 방법 2

 

앞서 쓴 글에서 졸리면 오히려 속도를 높여 곡예운전을 하는 방법이 있다고 썼다. 어느 술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그 얘길 열심히 떠들었더니, 술집에서 일하시는 분이 참견을 했다. 그런 걸 바로 '칼치기'라고 부른다고, 그걸 당하면 무척 기분이 안 좋다고. 그 이야길 들어주었던 후배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사실 나는 그 '칼치기'란 것을 자주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졸리면 히터를 끄고, 창문을 살짝 열고, 껌을 씹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목을 살짝 돌려주는 등의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대개 껌을 씹는 것만으로도 졸음은 쉽게 달아난다.

 

그러나 나는 밤을 꼴딱 샜고, 단 한 숨도 잠을 자지 못했으며, 대략 2시간 반 가량 운전을 해야 했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신호가 없고, 길이 단조롭기 때문에 쉽게 졸리다. 솔직히 겁이 났다. 졸음 운전이 가장 나쁜 건 나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상관 없는 남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야 해 졸음을 막아야 했다.

 

껌 : 껌은 기본이다. 앞서도 말했듯 나는 웬만큼 졸린 상황에서도 껌 하나만 씹으면 제법 오래 졸음을 참으며 버틸 수 있다. 씹는 속도와 방식을 자주 바꿔주면 더 오래 버틴다.

 

초콜릿 : 예전에 자주 출장을 다녔던 후배가 그랬다. 야간 운전도 자주 하던 친구였는데, 졸리면 무조건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초콜릿을 왕창 산다고 했다. 초콜릿을 계속 먹으면서 운전하면 밤샘 운전도 가능하다고 했다. 난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워낙 경험도 많고 운전도 잘 했던 친구라 그의 말을 믿으며 출발하기 전 편의점에 들러서 초콜릿을 샀다. 판형 초콜릿은 뜯어서 먹기 불편하니 패스, 개별 포장된 작은 초콜릿도 운전 중에 포장 풀기가 불편하니 패스, 플라스틱 통에 든 카카오 함량이 높은 제품을 골랐다.

 

에너지 음료 : 출근하자마자 진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긴 했지만, 출발 직전에 에너지 음료를 하나 마셨다. 혹시 모르니 하나 더 사서 차에 놔둘까, 엄청 졸릴 때 마실 수 있도록 하는 생각에 냉장고 앞에서 잠시 고민했으나, 내려 가는 동안엔 괜찮겠지 싶었다. 올라올 때 다시 사던가 하지 싶었다.

 

그리운 옛 동네

 

출발할 때는 아침에 생각했던 것처럼, 근처 어딘가에 차를 대고 좀 쉬려고 했다. 점심때가 다 되었지만 너무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입맛도 없었다. 밥 보다는 잠이 우선이었다. 예상대로 고속도로에선 계속 비슷한 속도로 달린다는 점과 도로가 단조롭다는 점 때문에 졸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껌을 씹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도 따라 흥얼 거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네비가 평택즈음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라고 안내했다. 안중읍 방면으로 달리다가 아산호 방조제를 건너는 길을 안내하는 듯 했다. 문득 한동안 살았던 시골 마을이 생각났다. 안중 읍내 가는 길목에 있었다. 당시 농사짓는 마을 빈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 집이 아직 남아있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나와 같이 살고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던 선배를 찾아 놀러온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 곳도 그 집이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넉넉했다. 익숙한 길이라 어렵지 않게 그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미소는 그대로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조금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큰 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그 길을 보면서 옛 추억에 잠시 잠겼다. 비록 짧은 기간을 살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길을 아침 저녁으로 오갔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도착해보니, 차를 댈 곳도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앞집 개가 자꾸 짖어대서 가까이 가질 못했다. 저 안쪽이 바로 살던 집인데 차를 대고 바로 앞까지 가보고 싶은데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수상한 눈길로 나를(내 차를) 본다. 개가 자꾸 짖어서 카메라로 조금 먼 발치에서 살던 집을 찍고는 다시 차를 돌려 나왔다. 외관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한데 빈집 느낌은 아니었다. 그 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빈집이었는데, 지금은 누군가가 살고 있는 듯 했다. 뭐 집에 들어가 볼 생각도 아니었으니, 그냥 그 집이 잘 있구나 하는 걸 확인 한 것으로 만족했다. 차를 돌려 나와서 마을 입구의 정미소 앞에 차를 대고 잠시 내렸다. 논과 밭을 휘휘 둘러보며 옛 추억을 꺼내보고 사진도 몇 컷 찍었다. 이왕 온 거 여기서 좀 쉬다 갈까 싶어 의자를 제끼고 몸을 뉘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안중읍에 가서 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밥을 먹고 다시 아산을 향해 출발. 도중에 졸리지는 않았다. 목적지에 20분 먼저 도착해서 알람을 맞춰놓고 의자를 제꼈으나 이번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려서 주변을 좀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고속도로 졸음운전

 

취재는 생각보다 잘 되었다. 준비가 부족해서 조금 걱정했으나, 편안한 분위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부지런히 받아 적고,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5시를 훌쩍 넘겼다. 장소를 바꿔 한 군데를 더 돌아보고 취재를 마쳤다.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전하고 아산을 출발 한 것이 5시 반이 살짝 넘어서였다. 생각보다 조금 늦어졌다. 사실 5시 이전에 취재를 마치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퇴근길 정체 상황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 커피나 에너지 음료를 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출발했다. 사실 근처에서 마땅히 살 만한 가게도 없었다.

 

일단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우려했던 대로 졸리기 시작했다. 아까 사두었던 초콜릿이 생각나서 두어 개를 집어 먹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이 입안에 퍼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았다. 역시 그 후배의 말이 맞았어! 초콜릿만 있으면 밤샘 운전도 하겠다 싶었다. 하나씩 하나씩 초콜릿을 녹여 먹으며 운전을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도로에 차가 많아졌다 싶더니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정체까지는 아니지만, 이 속도로 가다가 언제 도착하나 걱정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초콜릿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허, 설마 나 초콜릿 한 통을 다 먹는 건가 싶을 때쯤 이미 통은 비어있었다. 평소 단 음식을 즐기지 않고, 초콜릿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한 통을 다 비우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 속도가 나지 않는 지루한 고속도로, 초콜릿을 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졸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야 해!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나! 나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졸음을 쫓기는 쉽지 않았다. 껌을 씹었다. 처음 한 동안은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이 너무 피곤했다.

 

그건 아마도 찰나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잠시 눈이 감겼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 몸의 감각이 문득 차가 옆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뇌로 경고를 보낸 것 같다. 다행히 차선을 벗어나진 않았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구나 싶어서 뺨을 서너대 때리고 눈을 부릅 떴다. 잠시 괜찮았는데, 또 어느 순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무렵이 잠을 못 잔지 대략 30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차량은 느린 속도로 꾸준히 가고 있었다. 앞엔 끝없이 늘어선 차량의 행렬이었다. 어디서부터 밀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차량 후미 등의 빨간 불빛 수 백개가 눈을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다시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거의 좀비처럼 아무 생각없이, 겨우 최소한의 의식을 유지한 채 앞 차만 따라가고 있었는데, 또 한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차가 왼쪽으로 쏠렸고,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바로 잡으며 눈을 떴다. 다행히 이번에도 옆 차선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갑자기 엄청 부끄러웠다. 뒷차와 옆차가 얼마나 욕을 할까 싶었다. 차선을 바꿔 조금 가다보니 휴게소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그래, 시간은 좀 더 걸리더라도 일단 조금 쉬었다 가자. 8시에서 9시 사이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했지만, 아무리 차가 막혀도 8시 반이면 충분히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을 다녀오고, 커피와 에너지 음료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에너지 음료를 하나 사고, 초콜릿을 찾았는데, 아까 샀던 플라스틱 통에 든 카카오 함량이 높은 초콜릿이 없었다. 판형 초콜릿과 개별 포장된 초콜릿과 초코바만 있었다. 좁은 매장을 두세 바퀴를 돌며 뒤졌지만 없었다. 포기하고 그냥 차에 올랐다. 그래 오늘 하루 먹은 초콜릿이 아마 몇 달간 먹은 양보다 더 많았을거야. 그만 먹자.

 

집으로

 

잠시 쉰 덕분인지, 에너지 음료 덕분인지 몰라도 이제는 졸리지는 않았다. 다만 눈의 피로가 좀 심했고, 머리도 좀 멍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서 뻗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시간 안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데 집중해야 했다. 도로의 정체는 서울에 가까워질 수록 더 심해졌다. 지루했다.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았다. 배철수 아저씨의 선곡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아는 길이 막혀서 그런지, 네비가 다른 길을 안내했다. 이 길은 한참 돌아가는 길인데, 왜 이런 길로 안내할까? 그냥 내가 아는 길로 갈까? 분명 퇴근길 정체 때문이겠지? 그렇담 얌전히 네비 말을 들어야지. 그런데 역시 익숙치 않은 길에, 상태가 좀비보다 조금 나은 상황이라 그런지 길을 잘못 들어버렸다. 좁은 길이라 차를 돌릴 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달려보자. 한참을 달리다보니 익숙한 길이 나왔다. 예전에 일했던 단체 근처였다. 당시 차를 갖고 출퇴근 할 때 늘 다니던 길이었다. 한참을 돌아서 엉뚱한 곳으로 와 버린 것이다. 시간은 이제 빠듯해졌다. 늘 다녔던 길이니 시간은 대략 짐작이 갔다. 그래도 8시 반 전에 도착하겠구나.

 

아이들을 만나기로 한 건물 앞에 차를 세운 건 8시 15분쯤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긴장이 탁 풀려서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해보니 미친 짓이었다. 잠을 한 숨도 안 자고 차를 몰고 출장을 가다니! 고속도로에서 졸다니!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아이들 얼굴을 보니 왠지 미안해졌다. 녀석들을 차에 태우고 집에 가면서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아빠가 무척 피곤한 상태니, 도착하면 어서 씻고 잘 준비를 하자고. 그러나 부탁한다고 말을 잘 들어주면 아이들이 아니지. 녀석들을 씻기고 재우기까지 또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했다.

 

막상 애들을 누이고 나니, 나는 잠이 안왔다. 피곤하지만 잠은 안오는 상태. 그래 나 저녁을 안 먹었지. 점심때도 입맛이 없어 밥을 남겼던 터다. 초콜릿만 한 통을 다 먹었을 뿐, 달리 먹은 건 없었다. 밥을 퍼려다가 입안이 까끌거려 도저히 씹지 못할 것 같았다. 집 앞 슈퍼에 뛰어가 막걸리를 한 병 사왔다. 김치 몇 조각, 깍두기 몇 개에 한 병을 비웠다. 아이들은 누워서도 뭔가 장난을 치면서 떠들고 있었다. 두 녀석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꼬옥 껴안아 주고 나서 누웠다. 그리고 기절했다. 대략 10시 반쯤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한 시간만 더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억지로 몸을 일으키긴 했다. 결국 10분 지각했다. 지금 멍한 상태로, 퇴근도 안하고 이 글을 쓰는 건, 앞으로 되도록이면 이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지 하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의미다. 에휴! 취재 해온 내용 정리해서 기사를 써야할텐데, 기사는 안 써지고, 이런 글을 술술 잘 써지니. 한숨이 나온다. 기사 쓸 걱정은 내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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