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와 번데기


아침 알람이 울렸다.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멀리서부터 조용히 울리던 음악이 점점 커졌다. 아마 뭔가에 쫓기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달리다 말고 멈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이건 꿈이고, 알람이 울리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힘겹게 눈을 떠 전화기를 찾기 위해 손을 뻗어 더듬었다. 알람을 끄고, 왼쪽에서 자고 있는 큰 아이를 깨웠다. 녀석은 아직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이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작은 아이는 내 오른팔을 베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내 몸에 바짝 붙어 있었다. 새벽에 잠시 깨서 저 멀리 이불 밖으로 나가있는 아이를 안아서 내 몸에 바짝 끌어놓고, 팔베게를 해줬는데, 그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작은 아이를 깨웠는데, 요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작은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이어서 큰 아이의 이마에도 입술을 대었다가 몸으르 일으켰다.


곧 큰 아이가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들이 지난 번에 가져왔다가 먹지 않은 수제 쵸코 쿠키와 삶은 계란과 치즈를 준비했다. 쿠키를 세 조각으로 나누고, 삶은 계란 세 개의 껍질을 까서 한 접시에 담아 두었다. 치즈 세 개는 비닐에 포장된 상태 그대로 포개두었다.


최근 작은 아이가 우리 집에 오면 유난히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늦게 일어나면 또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울기도 했다. 지난 번에는 그렇게 울고 난리를 치는데, 억지로 보내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어쩔수없이 데리고 출근했었다. 오늘은 어떻게 깨워야 할까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켜고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유튜브에서 볼 빨간 사춘기의 <나만 안되는 연애>를 틀어서 잠시 듣다가 작은 아이의 가방을 챙겼다. 음악은 자동으로 다른 곡으로 바뀌었는데, 뒤이어 아이유와 울랄라 세션이 부른 <애타는 마음>이 나왔다. 큰 아이가 계란을 먹다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 했다.


"아빠, 나 일곱살 때 아이유 언니의 노래 좋아서 맨날 따라 불렀다." 큰 아이가 입에 든 계란을 다 씹고 물을 마시며 말했다. 기억이 난다. 당시 이 녀석이 아이유의 <좋은 날> 의 곡에 가사를 바꿔 불렀던 걸로 서재에 글을 쓰기도 했었다.


 한 이삼일쯤 전이었다. 아침에 작은애가 응가를 하는 통에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어쩌구 하느라고 아내와 내가 정신이 없을 때였다. 혼자 부엌(겸 거실)에 앉아서 놀고 있던 큰 애가 그 노래의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다.  


'왜 내 옆엔 아무도오 없는건지 ~ ♪ 빰빰빠바밤빰~빰~ ♪ 엄마 아빠는 모두 동생곁에 있는건지 ~ ♪~ 빰빰빠바밤~빰~♩~' 


동생이 태어난 지 이제 곧 1년. 약 5년간 독점하고 있던 엄마, 아빠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동생에게 빼앗긴 채 지나간 세월이었다. 그동안 숱한 설움과 고통과 화를 참아왔을 것이다. 가끔 백창우 동요집에 나오는 '애기때문에 못살겠어~ ♪ 애기때문에 못살겠어~ ♪ 할퀴고~ 차고~ 할퀴고~ 차고~ ♪' 이 노래를 종종 부르기도 했는데, 이번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노래가사를 바꿔가며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꼬마 여우 두 마리 (http://blog.aladin.co.kr/idolovepink/4729682) 2011-04-19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곱살 때 네가 그랬어. 기억나? 이렇게 묻고 싶었는데, 녀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와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다 온 모양이다. 아이는 입에 물고 있던 치즈를 빠르게 먹고, 후다닥 일어났다. 아이가 나가기 전에 유튜브를 검색해 <좋은 날>을 켰다. 그리고 작은 아이를 깨웠다. 작은 아이는 그냥 깨웠으면 안 일어났겠지만, 노래 소리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제일 먼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본다. 큰 아이가 나가고, 작은 아이를 화장실에 들여 보냈다.


내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작은 아이를 쳐다보니, 이불로 온 몸을 감싸고 얼굴만 내놓고 누워있다. 아이를 불러 가자고 하니, "저는 지금 번데기예요. 번데기는 움직일 수 없어요." 라고 말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시 장단을 맞춰 놀아주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나와서 잠바를 입고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저는 번데기예요. 아빠가 와서 꺼내주기 전에는 못 움직여요." 라고 했다. 아이의 가방과 내 가방을 현관 앞에 놓아두고 방으로 가서 작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안아 일으켰다. 녀석은 내 품에 꼭 안겼다. 사랑하는 이를 꼭 껴안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어 참 좋다. 어쩌면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아이들을 꼭 안아보기 위해 이 지겹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당신을 조종하는 '간디스토마 유충'은 누구?














업무 관련 책들, 글쓰기 위한 자료로 발췌 독서를 한 책들 외에는 책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 후 우리 집에 놀러왔던 친구는 내 책장을 보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앞으로 공부하러 도서관에 갈 필요 없이 우리집에 오겠다며, 자기가 원하는 책들 대부분이 다 있다고 했다. 속으로 못 읽은 책이 많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하나씩 천천히 읽어가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주에 뽑아든 책은 [너희들의 유토피아]였다. 출간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으니, 아마 2010년 겨울에 샀고, 사자마자 좀 읽다가 방치했었다. 다시 읽으려니 앞부분 내용도 하나도 생각이 안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머릿말에 나오는 간디스토마 유충이 개미의 뇌를 조작해 조종하는 이야기는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듣고, 의식하고, 기억하고, 믿는다. 똑같은 장면을 본 두 사람의 기억은 절대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함께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서로 다르다. 빨간 약을 선택한 네오와 파란 약을 선택한 네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을 알기전의 나와 알고 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것을 보고 의식한다.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의 나와 후의 나도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배우냐가 뇌를 움직이는 어떤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나의 뇌를 조종하는 '간디스토마 유충'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확실한 건 박근혜를 조종한 '간디스토마 유충'은 최순실이었다. 그럼 최순실을 조종한 건 뭘까? 이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으려나?


입맛이 없다


참 의욕이 생기지 않는 나날이다. 트위터는 각종 분야의 성폭력 사례로 폭발했고,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부검 영장 집행 때문에 또 계속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일터에서 몸은 바쁜데 이상하게 일이 자꾸 꼬여서 잘 풀리지를 않고 있다. 마을에서 이런저런 급한 일들이 자꾸 들어오고, 나는 이런저런 일정에 치여서 뭐하나 똑부러지게 해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최순실 게이트의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계속 담배만 피워댔다. 평소 일주일에 한 갑 가량 피우던 게, 요즘은 이틀에 한 갑 가량 피우고 있다. 물론 한창 담배를 피던 시절엔 하루에 한 갑 반 이상을 피웠으니, 비교하면 아직 양호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담배양을 확 줄인 몇 년 동안 이렇게 피운 적은 별로 없었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목이 아팠다. 그리고 며칠째 계속 입맛이 없었다. 뭘 먹어도 그게 맛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점심에 입맛이 없어, 그냥 안 먹으려고 했는데, 옆 사무실에서 밥을 했다고 와서 먹으라고 하시길래, 숟가락을 얹었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먹을 때는 괜찮았는데, 다 먹고 돌아서니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이다. 이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것도 스트레스 때문이려나. 뭐 그래도 저녁에 술 한 잔 들어가면 괜찮아지겠지.


저녁 약속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내일로 미뤄졌고, 5시에 회의에 참석하면, 아마 1시간 안에 마치고 뒤풀이를 갈 것이다. 거기서 배를 채우면서 가볍게 한 잔 하고, 친구나 후배를 불러 술을 좀 마셔야겠다.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날들이다.


※ 입맛이 없다는 내 문자에 친구가 오늘이 탕탕절이라고 탕수육이라도 먹으라고 했다. 탕탕절이 뭐냐고 물으니,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가 간 날이라고 탕탕절이라고. 그렇구나. 오늘이 그런 날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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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8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연속 충격 뉴스 접하느라 국민들은 입맛을 잃고 있는 중인데, 여당 사람들은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밥이 잘 넘어가고 있을 겁니다.

감은빛 2016-10-28 17:29   좋아요 0 | URL
네. 그 인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밥 잘 넘어가겠죠.

samadhi(眞我) 2016-10-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냄새 나는 아이를 안았을 때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꽉 차죠. 아이가 내게 안겼는데 내가 안긴 듯한 포근함. 생명체의 거대함을 느끼죠.

감은빛 2016-10-28 17:30   좋아요 0 | URL
그래요. 내가 안긴 듯한 포근함.
아이를 매일 보지 못하게 되고 나니,
그 잠깐 아이를 안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요!
 

그것이 알고싶다 1049화 "살수차 9호의 미스터리 -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의 진실"

https://www.youtube.com/watch?v=H9bBShHJ6Nw


백남기 어르신께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진실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 1049화'를 봤다. 보면서 만약 그렇게 쓰러져 다시 의식을 차리지 못한 게 나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물대포에 온 몸이 다 젖었고,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느라 손과 팔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이지만, 나도 그 분처럼 밧줄을 당겼고, 목소리를 높여 차벽이라는 불법을 저지른 경찰에 항의했다. 운이 나빴다면, 만약 내가 좀 더 앞 쪽에서 밧줄을 당겼다면, 물대포를 쏘는 경찰의 눈에 띌만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나역시 그런 처지에 놓였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그렇게 공권력의 폭력에 당했던 적이 많았다.


2008년 촛불집회


2008년 촛불집회 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서 밤을 새고, 곧바로 출근해서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거리로 나왔다. 당시 애들 엄마는 반은 농담으로 이런 약속을 했다. "당신이 열심히 해서 이명박이 물러나면, 둘째를 가지겠다." 꼭 그 말 때문은 아니지만, 그땐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거리에 머물렀다. 당시는 운동 단체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일할 때였지만, 나는 여전히 활동가라고 여겼고, 거리에서 함께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종로에서 경찰들과 충돌이 벌어졌던 어느 날, 누군가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다가 팔에 작은 방패를 달고 있는 일선에서 경찰들을 지휘하는, 좀 가벼운 방어구를 착용한 경찰이 자신의 팔에 매달린 작은 방패를 휘둘러 내 배를 가격했다. 맞자마자 휘청 뒤로 쓰러졌지만, 뒤쪽에 많은 시민들이 붙잡아줘서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를 가격한 그 경찰은 곧바로 내 오른쪽 어깨를 쥐고 나를 끌어내려고 했고, 그 행동을 본 뒤쪽 경찰들이 달려들어 내 오른팔과 다리를 잡으려 했다. 뒤쪽 시민들이 내 허리를 감싸고 내 왼팔을 잡아줘서 끌려가진 않았다. 내가 구하려 했던 분도 다행히 끌려가지 않았다. 긴장을 해서 그 당시엔 몰랐지만, 위험한 상황이 끝나고 나서 보니 배가 무척 아팠다. 나중에 옷을 들어 살펴보니 배에 크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 타원형의 방패가 날카롭지는 않았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그 날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저녁 늦게 정리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아침 배가 당기고 아파서 일어날 수 없었다. 당시 3살이었던 큰 아이가 배를 감싸고 괴로워하던 내게 다가왔다. 아이는 옷을 들춰 검붉은 피멍이 들어있는 내 배에 입을 갖다대고 "아빠, 아파? 여기? 호 해줄게. 호~ 호~" 불어줬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회에서 내가 다치면 아이를 돌봐줄 수 없겠구나. 아이에게 이런 미친 세상을 물려주기 싫어서 거리에서 더 열심히 싸웠던 것인데, 그러다 내가 잘 못 되면 더이상 내가 아이를 지켜주지 못 할 수도 있겠구나. 입으로 호호 불어주던 아이를 보며 괜히 눈물이 났다.


2008년 기륭전자 농성장


기륭전자 농성장에 되도록 자주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주말이면,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날은 10월 20일이었다. 그날은 아내가 일주일동안 독일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나는 혼자 아이를 돌보며 일주일을 보냈다. 아침이면 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준비물을 챙겨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퇴근하고 아이를 데려와 저녁을 먹이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놀아주다고 재우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홀로 아이와 지냈기 때문에 무척 피곤한 상태였고, 또 일주일 만에 아내를 다시 만날 예정인 월요일이었다. 


하지만 기륭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연락이 계속 왔다. 피곤했고,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모른척 할 수 없어서 기륭으로 달려갔다. 기륭전자 앞 골목은 수 백명의 경찰들로 꽉 차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 때처럼 시커먼 경찰들이 소수의 노동자들과 그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란 옷을 입은 용역 깡패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시민들의 통행을 원천 봉쇄했던 것과는 달리 용역깡패들에게 길을 터주었고, 그들은 요란하게 들어와 거칠게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둘렀다. 여성들을 위협하고 남성들을 직접 가격했다. 


어쩔수 없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용역 깡패들에게 맞서야 했다. 여기저기서 여성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욕설이 난무했다. 경찰들에게 고립되어 한참을 힘을 쓰다보니 어느새 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계줄이 끊어져 시계가 깨졌고, 손은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나는 건물 3층 높이로 아시바를 쌓아 올린 골리앗과 함께 고립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김소연 분회장과 당시 민노당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던 이상규 씨가 올라가 있었다. 용역들은 밑에서 그 골리앗을 발로 차거나 흔들며 위협하곤 했고, 나는 그 짓을 못 하게 막느라 계속 충돌이 일어났다. 


경찰들은 대부분의 시민들을 밖으로 밀어냈고, 골리앗 근처에는 소수의 시민들만이 남아서 저항하고 있었다. 깡패들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 소수의 시민들 중에 송경동 시인과 르포작가 박수정 선배가 있었다. 부부였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거길 빠져 나가야 했다. 혹시 둘 다 연행이 된다면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경동 선배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 경찰의 포위망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박수정 선배를 포위망 밖으로 보냈다.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깡패들의 폭력이 심해졌다. 회사 입구에서 대기중이던 수십명의 구사대(사측의 편에 선 노동자들)가 몰려 나왔다. 곧이어 무차별 폭력이 이어졌다. 나 역시 주먹과 발길질에 맞아야 했다. 한때 패싸움을 좀 해봤기 때문에 일대 다수 싸움에도 주눅이 들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건 뭐 워낙 상대가 안 되는 경우라 나도 두려웠다. 다행히 적당히 피하고, 뒤로 빠지며 맞섰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골리앗 근처에서 점점 뒤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고립되어 있던 소수의 시민들은 여기저기 뿔뿌리 흩어졌다. 밖에선 점점 소식을 듣고 몰려온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 수백명이 기륭 전자 입구를 굳건히 막고 있었다. 그들이 경찰과 힘겨루기를 이어가는 동안 안에서는 계속 깡패들의 폭력이 이어졌다. 어쩌다보니 곁에 문동만 시인이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선배는 많이 지쳐 있었다. 깡패들 힘이 장난이 아니라고 말했다. 힘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쪽수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맞서 볼텐데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한번 잘못되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시민이 깡패들에게 심하게 맞아 안경이 깨지고, 옷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경찰들은 그 장면을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문동만 선배는 그쪽으로 달려가 경찰들에게 항의를 했다. 그 장면을 찍기 위해 칼라티비 여기자가 다가왔다. 깡패들은 성적 모욕이 포함된 욕설로 여기자를 모욕했다. 여성 용역들이 다가와 여기자를 막아섰다. 남성 용역들은 마스크조차 안 쓴 녀석들이 제법 있었지만, 소수의 여성 용역깡패들은 그래도 마스크를 꼭 쓰고 있었다.


우리 뒤쪽에 함께 고립되어 있던 민노당 학생위원회 소속의 여학생이 두 명 있었는데, 덩치 큰 용역이 그들에게 성적 모욕을 담아 시비를 걸고 있었다. 문동만 선배와 내가 나서려했더니 근처에 있던 용역들이 위협적인 몸짓으로 막아서며 눈을 부라렸다.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경찰들이 시민들을 몰아낸, 수 백명의 경찰이 울타리가 된 이 안쪽 공간은 용역깡패들과 구사대들의 천국이었다. 


경찰들의 울타리 안에 갇힌 지 4시간이 가까이 지났다. 우린 지쳐 있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밖에서 안으로 진출하려고 계속 몸싸움을 이어가던 시민들은 오히려 경찰에게 밀려났다. 약 50미터 가량 울타리가 넓어졌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용역들이 심심했는지 또 간헐적으로 시비를 걸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갇힌 지 5시간이 지나, 밤 열시 반쯤 방송3사 카메라가 등장했다. 방송사의 값비싼 조명이 마치 대낮처럼 주위를 비췄다. 갑자기 구사대들이 종이박스로 얼굴을 가린 채 몰려오더니 방송 카메라를 종이 박스로 가려버렸다. 그 순간 일사분란하게 용역 깡패들이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치 선수 교체를 하듯 경찰들이 용역이 빠진 자리로 몰려 들어왔다. 약 5시간 동안 갇힌 채 당해야만 했던 무차별 적인 폭력이 드디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로도 경찰과의 대치는 계속 되었다.


2006년 한미FTA 반대 집회


여름 한창 집회를 이어갔던 시기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범국본 농성장을 지키기도 하고,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아직 아이가 어렸기 때문에 당시 아내는 홀로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고, 불만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늘 몸 조심하라고 염려해주고, 응원해줬다.


그날 시위대 본대는 종로쪽에서 광화문으로 진출하다가 차벽에 길이 막혀 골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길을 찾고 있었다. 나는 광화문 앞 문화예술인 100시간 문화행동을 진행하느라 텐트를 지키고 있었다. 그 텐트에는 값비싼 음향 및 영상 장비들이 많았다. 100시간 릴레이 문화행동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밤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난 밤새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했다. 잠도 못 자고 멍한 상태로 텐트를 지키던 나는 온통 차벽으로 둘러쌓인 도로를 보며, 차라리 시위대 본대와 함께 있으면 좋았겠다. 이건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함께 있던 선배는 진정하고 잠이나 자라고 했지만, 나는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맑아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시위대가 종로구청 방향 골목에서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내가 있던 곳의 차벽에는 사람이 옆으로 게걸음을 걸으면 지나갈 수 있을만한 틈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큰 소리로 불러 그 차벽의 틈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차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갑자기 저 쪽에서 시커멓게 경찰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서두르라고 빨리 뛰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차에서 자고 있던 운전병이 운전석에 앉아 차를 움직여 그 좁은 틈을 메우려고 했다. 누군가가 막 그 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우린 소리를 지르며 발로 문을 차고, 깃대로 창문을 쳤다. 사람이 지나가고 나서 움직이라고, 사람을 죽일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 멀리서 달려온 경찰들이 가까워졌다. 그들이 들고 있는 방패를 보는 순간 두려워졌다. 한 해 전 농민 두 분이 저 방패날에 맞아 돌아가셨다. 나는 사람들에게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왕좌왕 하던 차에 한 여성이 넘어졌다. 나는 얼른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여성은 바로 서지 못했다. 뒤에서 수십명의 경찰이 방패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다가 오고 있었다. 다행히 여성의 비명을 들은 사람 두어명이 뒤돌아 와서 여성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뛰었다. 나도 일어서서 뛰려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머리 위로 방패가 지나갔던 것일까? 순간적으로 몸을 굴렸고, 용수철처럼 뛰어나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바로 앞에서 여성을 부축한 일행은 속력을 내지 못해 뒤쳐졌다. 난 뛰다가 그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뒤돌아섰다. 경찰들은 이제 대열을 정비하고 열을 지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랜 경험으로 곧 저들이 각자 달려나와 방패나 곤봉을 휘두를 거라는 걸 알았다. 몸이 떨렸다. 뇌가 경고를 보냈다. 도망가야 한다고. 당장 뛰어야 한다고. 아니나다를까 누군가의 명령에 일제히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젠장! 뒤를 보니 그래도 여성을 부축한 일행이 조금 속력을 내서 가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방향을 바꿔 전속력으로 달렸다. 하지만 금방 그 여성의 일행을 만났다. 난 소리를 질렀다. 뛰어요! 여성을 부축했던 둘 중 하나가 바로 뒤까지 쫓아온 경찰을 보더니 빠르게 여성을 업었다. 그들은 조금 더 빠른 속력으로 달렸다. 나도 속도를 맞춰 달렸으나, 경찰은 금방 우리 뒤를 잡았다. 젠장! 지금은 싸워야 한다고 본능이 말하는 것 같았다. 바로 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드는 순간 몸을 돌려 방패를 발로 찼다. 균형을 잃어 넘어질 뻔 했으나, 다시 몸을 돌려 달리는데, 목덜미에 큰 충격이 왔다. 쓰러졌고, 본능적으로 두 팔로 얼굴과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발길질이 사정없이 몸으로 쏟아졌다. 다행히 방패로 찍는 놈은 없었다. 대신 무자비한 발길질이 몇 분이나 이어졌다. 대부분은 다시 추격에 합류했고, 한 녀석이 내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온 몸이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팔과 다리가 다 마비된 느낌. 질질 끌려가면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여성을 들춰업은 일행은 어찌되었을까 궁금했다. 얼마가지 못해 금방 잡혔을텐데. 녀석은 한참을 날 끌고 가서 전봇대 쪽으로 날 내동뎅이쳤다. 그리고 시위대와 경찰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서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면 다시 두들겨맞고 닭장차로 옮겨지겠지. 도망치려면 경찰이 저 녀석 하나 밖에 없는 지금 밖에 기회가 없다. 그런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난 웅크린 채 내동뎅이쳐진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은 채,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씩 손가락이 움직여졌다. 여기저기 아스팔트 바닥에 끌리면서 갈린 피부가 쓰라렸다. 그 고통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달렸다. 아! 그런데 다리가 풀려 있었다. 생각만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경찰은 곧 쫓아왔고, 나는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몸을 돌렸다. 녀석은 곤봉을 치켜들고 다가왔고,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면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왠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곤봉을 든 오른손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왼팔을 올렸다. 둔한 소리와 함께 뼈에 충격이 왔다. 지금 단 한 순간 밖에 기회가 없었다. 빠르게 오른손을 내질렀다. 녀석의 키가 더 컸기 때문에 오른발에 힘을 주고 살짝 뛰어야 했다. 오른손 주먹에 고통이 느껴졌다. 진압모의 앞쪽 쇠로 된 보호망을 주먹으로 쳤다. 녀석은 내가 반격할 거란 생각을 못 했는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왼팔 팔목과 오른손 주먹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지만, 그대로 돌려 달렸다. 


지하철 역은 모두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큰 길쪽으로 달려나가 교보문고 건물로 들어갔다. 서점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빠르게 화장실로 가서 몰골을 살폈다. 옷이 다 갈려서 해지고 찢어져서 그렇지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왼팔은 곤봉에 맞은 부위 뼈가 부풀어 올랐으나, 부러지진 않았고, 주먹 역시 부었으나 그만하면 괜찮다 싶었다. 팔과 다리에 갈린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상처를 물에 씻으려니 쓰라렸다. 이 몰골로 밖에 나가면 금방 다시 잡힐테니 잠시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갈아입을 옷이 필요할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다 버린 옷. 화장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제서야 목의 감각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 뒷덜미를 맞고 쓰러졌던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다. 손을 갖다 대 보려는데 크게 다쳤을까봐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만져보니 크게 부어 있었다. 곤봉에 맞았나보다. 방패에 찍혔으면 상처가 나고 피가 흘렀을텐데.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직원이 들어와서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고 싸울 힘도 없었기 때문에 다리를 절면서 걸어 나갔다. 종로쪽 출구로 나가면서 경찰이 없는지 살폈지만,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가판대에서 음료수와 담배와 라이터를 산 일이었다. 결혼 전부터 약 3년 이상을 끊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손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고 길게 내뿜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피웠다.


2004년 평택 미군기지 유치 공청회


농민회 형들과 평택에 몇 안되는 단체 활동가들이 모두 잔뜩 긴장한 채로 공청회장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공청회가 무산되도록 막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공청회가 시작되자 계획대로 한 명씩 나서서 이 공청회의 부당함을 알리고 무효라고, 불법 공청회를 중단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회자가 처음 한 동안은 그 발언을 무시하고 진행하려고 했으나, 계속 소란을 일으키니 결국 무대 양쪽에서 버티고 있던 경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새끼 끌어내!" 경찰들이 우루루 몰려들고, 발언을 하던 자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주위 주민들은 그 사람이 끌려가지 못하도록 함께 저항했으나, 경찰의 완력에 결국 그는 끌려갔다. 그냥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도록 주먹으로 배를 치거나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시 사회자가 진행하려 하자 또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이 항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또 명령을 내렸다. 그 사람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끌려 나갔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숫자가 적었다. 이렇게 빨리 끌려나가버리면 이 공청회를 무산시키기 어려울텐데. 차라리 처음부터 한데 뭉쳐서 저항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나 둘 셋 그렇게 계속 활동가들이 끌려나갔다. 사회자가 다시 공청회 순서를 진행시키려는 걸 보면서 일어나서 살피니 우리측 활동가들이 이제 진짜 몇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나서겠지. 아니 조금 진행되는 걸 보다가 다시 나서는 게 낫겠지. 이 공청회장에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사회자가 본격적인 진행을 하려는 순간 앞쪽에서 누군가가 또 나섰다. 경찰들이 좌우 양쪽 뒤편에 몰려 있느라 그는 조금 시간을 끌 수 있었다. 


그때 선배 활동가 한 명이 날 불렀다. 이제 정말 몇 남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그 전략을 쓸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뭉쳐서 함께 저항하고 버텨야 했다. 모여보니 고작 4명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할머니들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다 딸려나가면 끝장이라는 걸 그 분들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공청회장은 전쟁터처럼 변했다. 경찰들은 사방에서 우릴 에워싸고 끌어내려 했고, 할머니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호통을 쳤고, 우린 큰 소리로 이 공청회의 부당함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소동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경찰들이 잠시 물러섰고, 우리도 숨을 헐떡이며 조금 휴식을 취했다. 사회자가 경찰 간부를 부르더니 귓속말을 했다. 한참 후에 네 곳의 출입구에서 경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그래도 체면을 생각해서 전경을 투입하진 않고, 평택 경찰서 사복 형사들을 배치했던 것인데, 이젠 눈치볼 것도 없이 그냥 전경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형사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 전까지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는데, 이젠 우릴 노려보며 이죽거리는 표정일 지었다. 사회자가 다시 순서를 진행하길래, 내가 큰 소리로 발언을 시작했다. 왜 이 공청회가 불법인지를 크게 외쳤다. 덩치가 큰 형사가 달려들어 내 팔을 낚아채려 했다.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그는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다시 달려들었다. 할머니들이 내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그는 더 빨랐다. 오른 팔목을 붙잡혔고, 강한 힘으로 날 끌었다. 뒤에 있던 할머니들이 일제히 내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주위에 있던 다른 형사가 내 옷을 붙들었고, 곧 옷이 찢어졌다. 전경들이 달려와 다시 우리를 포위했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다른 형들은 다 붙들려가고 나 혼자 남았다. 미군기지를 찬성하는 주민들(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우리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특히 나에게 어린 놈의 새끼가 어디서 버릇없게 나서냐고 윽박질렀다. 


웬만하면 욕을 하지 않으려고 참고 있었다. 진행을 방해하는 발언도 계속 경어체를 유지하고, 논리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옷이 찢어지고, 다들 끌려나간 걸 깨닫은 후로는 눈이 돌아갔다고 표현해야 하나, 안전핀이 풀린 느낌. 나는 욕을 하기 시작했다. 찬성측 주민들에게, 형사들에게, 사회자에게 그야말로 미친 듯이 욕을 퍼부었다. 할머니들이 마치 계란의 흰자처럼 나를 둥글게 둘러싸고 보호해주고 있었기에 팔을 잡히거나, 옷을 잡혀도 끌려가지 않고 버틸수 있었다. 


사회자는 내가 혼자 남았다고 그냥 강행하려고 했다.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목이 찢어져러 악을 쓰며 진행을 막았다. 찬성측 주민들의 욕설이 다시 나를 향했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곧 목이 쉬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끌려가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목이 쉬어버려 더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해 행사를 저지하지 못하게 될까?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때쯤 전경들이 할머니들을 먼저 끌어내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비명소리와 호통소리가 넓은 실내에 울렸다. 곧이어 맨처음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날 노렸던 형사가 웃으며 내 팔을 낚아챘다. 난 힘을 주고 버텼지만, 곧 옆에서 다른 형사가 내 머리를 감싸 헤드락을 거는 자세로 날 쓰러트렸다. 안경이 벗겨져 땅에 떨어졌고, 다른 형사가 그 안경을 밟았다. 씨발! 있는 힘껏 욕을 하며 내 머리를 감싼 팔을 풀고 그 녀석을 밀쳤다. 주먹을 날리고 싶었으나, 형사를 패고나면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녀석들은 곧바로 주먹으로 내 배와 가슴을 쳤다. 배를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자세가 되자 뒤에 있던 녀석이 내 발을 걸면서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밟기 시작했다. 얼마나 밟혔을까? 웅크린 자세로 몸이 덜덜 떨렸다. 형사들이 물러나고 전경들이 달려들어 내 사지를 번쩍 들고 끌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사회자에게 욕을 퍼부었다. 


전경들은 나를 닭장차에 태웠고, 거기엔 두들겨 맞아 상처 투성이인 형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가 다 들려나와 버려서 결국 공청회는 찬성측 주민들의 일방적인 호응으로 진행되었고, 행사를 무사히 치룬 경찰들은 친절하게 우리를 풀어줬다. 그 이죽거리는 표정의 형사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담배를 잘근잘근 씹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2003년 새만금 제4공구


환경단체들의 계속된 반발 때문에 시공사는 공사를 앞당기기 위해 전국의 모든 덤프트럭을 모아, 밤낮없이 바위와 흙은 바다에 퍼부었다. 바위와 자갈과 흙만으로 바닷물을 막은, 물막이 공사가 막 끝난 4공구에 전국에서 환경 활동가 80여 명이 모였다. 작은 읍내인 부안에 너무 많은 외부인이 한번에 몰려들면 저쪽에서 미리 눈치챌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안 외곽에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다가 밤 늦게 조용히 부안성당으로 합류했다. 그곳에서 비상식량으로 쵸코바 서너개를 받고, 비옷을 걸치고 대기했다. 어선을 서너척을 얻어타고 4공구에 기습 침투한 이들은 아마 60여 명쯤 되었으려나.


비가 내렸고,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우리는 가지고 온 곡괭이와 삽을 이용해 물막이가 끝난 임시 방조제를 허물어 바닷물을 다시 유통시켰다. 포클레인의 삽질 몇 번이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을지 몰라도 우린 몇 시간 동안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고된 노동의 결과로 해수유통의 기쁨과 함께 아침을 맞았으나, 시공사 측의 신고로 경찰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왔다. 경찰은 방패를 앞세워 우리를 위협했고, 우리는 물과 장비를 제일 가운데 두고, 그 바깥에 여성 활동가들을 놓고, 제일 바깥에 남성 활동가들이 서로 깎지를 끼고 스크럼을 짰다. 경찰들은 동그란 모양의 우리를 밖에서 완전히 에워싸고 대치했다. 비와 땀에 젖은 몸,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이었다. 


경찰들이 방패로 우리를 밀고 들어왔을 때, 좀 이상했다. 어, 이거 밀면 어쩌라는 거지? 하나씩 끌어낼 줄 알았는데, 왜 밀지? 밀면 안쪽에 있는 여성활동가들이 다칠텐데. 우리보다 훨씬 수가 많은 경찰은 방패로 밀고 빙글빙글 돌면서 대열을 흩어놓으려 했다. 밀고 밀리는 상황. 억지로 짜낸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저쪽에서 포클레인이 나타났다. 우리가 경찰들의 벽 안에 갇혀 있는 동안, 포클레인은 우리가 허물어서 해수를 유통시켰던 틈을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우린 소리를 지르며 포클레인을 막으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 병력은 두텁게 우릴 에워싸고 있었고,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허무하게 삽질 몇 번에 바닷물은 다시 막혔다.


해가 점점 높아질 즈음, 군산환경연합에서 배를 타고 물과 빵을 갖고 왔다. 정말 배가 고팠다. 잠시 쉬면서 빵 좀 먹고 다시 하면 안될까? 생각할 즈음에 갑자기 여러 척의 배를 타고 새추협(새만금 추진 위원회) 편영수와 깡패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우리를 고립시키고 있던 경찰들이 갑자기 빠져나갔다. 새추협과 깡패들은 배에서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바닷물이었다. 짠 바닷물이 얼굴이 때리면 눈이 따가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때 깡패들이 달려들어 밖에 있는 남성 활동가들부터 끌어내서 패기 시작했다. 


수염을 길렀던 선배는 수염을 잡힌 채 끌려가서 구타당하고, 머리를 길렀던 선배는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바닷물이 눈에 들어가 눈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멱살을 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버텼는데, 그 녀석은 주먹으로 배를 쳤다. 자세가 무너져 앞으로 숙였는데, 목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리다가 앞으로 던져졌다. 얼굴이 흙 바닥에 쳐박혔고, 혀로 흙맛이 느껴졌다. 밣힐 줄 알았는데, 그 녀석은 나를 끌어낸 후에 내 뒤에 있던 다른 남성 활동가를 끌어내려 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달려들어 녀석의 허리를 붙들고 끌어냈다. 녀석은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당황해 끌려 나왔지만, 곧 나를 향하 주먹을 휘둘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같이 싸워야 하나? 같이 주먹질을 해도 되나? 이거 정당방위 아닌가? 녀석은 나를 밀쳐 쓰러뜨리고, 또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끌어내 바닥에 쓰러뜨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오고, 물대포가 귀를 때리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녀석들이 가운데 있던 식수와 빵을 다 뺏어가서 바닷물에 던지는 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봐야 했다. 아, 배가 고팠는데, 저 빵을 한 입라도 먹었다면 그래도 힘을 좀 더 써볼텐데. 화가 났다. 편영수는 메가폰을 잡고 계속 우리를 욕하며 빨리 물러가라고 협박했다. 경찰은 저만치 물러나서 그들이 우리에게 퍼붓는 폭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모여 아까와 동일한 대형으로 스크럼을 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놓치지 말라고 서로 격려하며, 할 수 있다고 소리를 냈다. 잠시 소강상태가 끝나자 그들은 다시 바닷물을 퍼부었다. 밤새 비를 맞고, 땀에 젖은 옷이 그나마 아침 햇살에 말라가던 중이었는데, 물대포 때문에 다시 젖었다. 놈들은 우리에게 뺏어간 플라스틱 생수병을 던지기도 했다. 안쪽에 있던 여성 활동가가 머리를 맞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린 욕을 내뱉으며 사람이 다쳤다고,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쓰러진 아이는 교육기수로 동기였고, 나와 동갑이었다. 너무 화가 났다. 


놈들은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공격을 해왔다. 이번에 나에게 덤빈 놈은 덩치가 작았는데, 내 머리칼을 쥐고 끌어내려 하길래, 스크럼을 풀고 발로 차 버렸다. 다행히 이 놈들이 급하게 오느라 사람을 많이 데려오지 못했나보다. 숫자는 우리가 훨씬 더 많았다. 


아침에 갑자기 시공사로부터 연락을 받았겠지. 웬 놈들이 방조제에 들어와 바닷물을 다시 유통시키고 있다고. 그래서 부랴부랴 사람을 끌어모았지만, 충분히 모으지 못했겠지. 게다가 일부는 깡패였겠지만, 일부는 그냥 찬성측 주민이었다. 만약 맞서 싸워도 되는 거라면, 스크럼을 짤 일이 아니라 그냥 하나씩 패버리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난 동기가 쓰러져서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발길질에 맞고 물러났던 녀석이 다시 덤비려하자 확 주먹이 나가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선배 활동가가 내 팔을 잡고 말렸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끌려가서 맞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했다.


또 다시 녀석들이 잠시 물러났다. 경찰들은 여전히 강 건너 불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이렇게 맞고 있어야 하는 걸까? 녀석들이 들이닥쳤다가 물러나길 반복하는 동안 또 한 명의 여성 활동가가 실신하듯 쓰러졌다. 나중에 해경의 배가 한 척 나타나 그 두 사람을 태워 나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 한 가운데 좁은 흙 방조제 위에 남겨졌다. 점점 해는 높아졌다.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씻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어렵게 들어온 이곳에서 쉽게 나갈 수는 없었다. 우린 여기서 며칠을 버티고 버텨서 결국 새만금 사업을 막아낼 작정이었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가 들어가 문재인 민정수석이 이곳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편영수는 계속 외부세력은 물러가라고 떠들어댔다.


한동안 녀석들도 쉬는 건지 공격이 없었다. 우린 대형을 유지한 채로 앉아서 쉬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건지, 그냥 물러가는 건지 녀석들이 배를 타고 빠져나갔다. 주머니를 뒤져 하나 남은 쵸코바를 꺼냈다. 껍질을 까서 반을 잘라 옆에 있던 형에게 건네고 남은 반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 군대에서도 쵸코파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건만, 이 반조각 쵸코바는 너무 맛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울 상황실은 청와대와, 이곳 처장단은 현장 경찰 간부와 협상을 벌이는 듯 했다. 경찰은 조용히 물러나기만 하면 아무도 연행하지 않을 테니, 빠져나오라고 요구하는 듯 했다. 우린 지치고 배가 고팠지만, 물러갈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바닷바람이 차가워도 여기서 며칠이라도 버틸 생각이었다. 


협상은 결렬되었나보다. 새추협과 깡패들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경찰 병력이 돌아왔다. 다들 지쳐서 서로 기대 앉은 채 쉬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젠 진짜 짜낼 힘도 없었는데, 경찰들은 다시 방패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밀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잖아! 밀지 말라고! 바로 앞 얼굴을 가린 철망 속 눈동자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하긴 그 눈동자가 무슨 잘못이랴! 뒤에서 시킨 놈이 원흉인 것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경찰 간부와 이익에 눈이 먼 정치인들과 노무현이 잘못이겠지. 거슬러 올라가 같은 노씨인 노태우가 문제의 원흉인 것이지. 


경찰들도 밀다가 빠졌다가 밀다가 빠지길 반복했다. 옆에 있던 선배는 그래도 이 동네 전경 애들은 시위를 많이 안 겪어봐서 생각보다 어설프다고 말한다. "왕년에는 이런 놈들 둘 셋은 그냥 갖고 놀았는데 말야!" 힘이 없어서 웃을 힘도 없었다. 싸워도 된다면 진압모 철망을 들어올려 목을 위로 올려버리고, 방패를 확 당기면 그냥 딸려올텐데, 그렇게 하나씩 상대하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숫자가 절대 부족해서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다시 생각한다. 게다가 저놈들은 점심밥도 먹었는데, 우린 굶어서 힘을 쓸 수 없잖아.


경찰이 빠지고 다시 협상 타임이 되었나보다. 우린 바닥에 널부러져 최대한 에너지를 아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후 늦은 시각, 현장 지도부(사무처장과 간부들)는 철수를 결정했다. 나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은 반발했다.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지금 나가면 이 미친 고생이 모두 헛 짓이 되어 버린다! 물론 현실적으로 다들 지쳐있고, 더 버티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서울 상황실과 현장 지도부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지 구체적인 정황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결정을 내린 선배들을 원망한다. 경찰들은 길을 열어줬고, 우린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서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방조제를 걸어나가야 했다. 거리가 얼마라고 했던가? 얼마나 걸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원망하는 마음과 어서 씻고 싶은 마음과 뭐라도 먹고 싶은 마음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리는 걷는 게 아니라 억지로 질질 끌면서 움직였던 것 같다.


그래도 젊었던 나는 제일 먼저 방조제에서 나왔는데, 문정현 신부님께서 짚차를 몰고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뭐라고 하셨던가? 고생했다고 어서 타라고 했던가? 조수석에 오르니 신부님께서 담배와 라이타를 건넸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아, 담배가 이렇게 꿀 맛이었구나. 차를 타고 돌아간 부안성당에는 김밥 상자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했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올 때까지 김밥을 몇 인분을 먹었는지 모른다. 7인분? 10인분? 아마 지금까지 평생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많이 먹었던 날이 아니었을까?


또 언젠가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만 끄집어 냈다. 이 외에도 현장에서 국가 폭력에 당한 일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많을 거다. 국가 권력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테고, 나는 저항해야만 하니 맞아야 하는 일은 끊임없이 이어지겠지. 그래도 운 좋게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겠다. 그래야 아빠로써 부끄럽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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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10-25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이 폭력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만드셔도 되겠네요. 여태 살아 남으신 (?) 것, 장합니다.

감은빛 2016-10-26 14:37   좋아요 0 | URL
책으로 만들기엔 너무 패턴이 비슷할 것 같아요.
이 글에 적은 것들 외에는 딱히 적을 게 별로 없는 흔한 경우들이라 볼 수 있어서요.
결혼 전에는 몸 안 사리고 열심히 싸웠는데,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겁이 나더라구요.
내가 다치는 건 괜찮은데,
아이들 곁은 지켜주지 못 하는 건 겁나요.

samadhi(眞我) 2016-10-26 14:44   좋아요 0 | URL
조금만 다듬으면 될 듯한데요. 투쟁사.
당연하죠. 아무리 높은 뜻이라도 모두가 윤봉길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2016-10-25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6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견지명 2016-10-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0월 29일 토요일 6시 광화문이 아닌 청계광장에서 평화적 촛불 집회가 열립니다 http://cafe.naver.com/2mbanti/47582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루밖에 남지 않아 여러곳에 도배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__)

감은빛 2016-10-28 17:31   좋아요 0 | URL
당연히 널리 알려야 할 일이죠!
고맙습니다!
 

한 이주 전쯤에 아이들과 식당에서 보쌈을 시켜 먹고 있었다. 큰 아이가 그날 따라 꼭 보쌈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막걸리를 시켜 마셨고, 아이들은 밥과 고기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는데, 한참 후에 남자 하나가 들어와서 주문도 하지 않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아마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었겠지. 그러고도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내가 막걸리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갈 때 쯤에 그 남자의 친구들이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세 사람이 큰 소리로 떠들어서 본의 아니게 그 이야기들을 주워듣게 되었는데, 제일 마지막에 온 남자만 기혼이고, 나머지는 다 미혼인 듯 했다. 근데 그 유일한 기혼인 남자가 최근 아내와 부부싸움을 좀 심각하게 한 모양이다. 자세한 내막까지 듣진 못했지만, 그 싸움 때문에 아내가 이혼을 들먹였고, 급기야 이혼 서류까지 준비한 모양. 그 남자는 계속 어떻게 자기에게 그럴 수 있냐고 목청을 높였다. 아직 어린 아이가 있는 모양인데,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막걸리를 마시다가 목에 탁 걸리는 느낌이었다. 헛기침을 하며 아이들 눈치를 살폈다. 아이들은 다행이 지들끼리 스티커를 갖고 놀고 있었다. 아직 아이들에게 이혼 얘기는 한 적이 없다. 다만 사정이 있어서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살게 된 것이라고만 했다. 정말 다행히도 아직 아이들이 이 일로 상처를 받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 오래 되었다. 큰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작은 아이는 거의 태어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바로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한 단 한번도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부는,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고, 만나도 인사는 커녕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않는 모습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른다. 가끔 의견 다툼이 생기면 큰 소리로 싸운 적은 있지만, 말 한 마디 따뜻하게 주고받는 모습 조차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늘 엄마나 아빠 한 사람과 시간을 보냈지, 둘 다 함께 뭔가를 한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이 아이들에겐 그리 이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집에서 나온 지 네 달째. 일이 바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지내고 있어서, 이별 후의 애들엄마와 내 관계에 대해 제대로 깊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뭔가 불편한 감정들은 있었지만, 그 감정을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날 막걸리를 마시다가 뭔가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던 날, 하나하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과연 결혼을 선택했을까? 그 사람을 만났던 시간들은 정말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행복했다. 사랑한다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지난 시간에서 배운 것은 이것 하나일 것 같다. 함께 사는 일은 사랑의 영역이 아니라 생활의 영역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함께 살다보면 거슬리는 부분, 보기 싫은 부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생길 수 있다.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오해와 갈등이 쌓여가고, 그것을 푸는 일이 너무도 힘겨워, 그냥 쌓아놓고 무시하고 지나쳤던 시간들이 결국은 관계를 부숴버렸지만,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얼굴을 마주 대하면 불편하니,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함께 있어야 할 시간에는 뭔가 일을 만들어 거기에 집중했다. 말 한 마디 썪지 않았고, 눈길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시간들이 힘들었지만,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더 겁났던 것 같다. 그러면 진짜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어느날 너무 늦은 시점이었지만, 그래도 이 관계를 다시 회복해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노력을 했다. 말과 행동을 바꾸려고 애썼고, 조금은 상냥해지려고 애썼다. 그때 계속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가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였다. 어쩌면 다시 회복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노력을 하지 않고, 회피해 와서 그랬지, 노력을 하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어느날 충북 지역으로 취재를 갈 일이 있었다. 전날까지 교정 원고를 넘기고 가야 했지만, 밤을 새워 작업을 해서 아침에 간신히 원고를 넘기고 곧바로 차를 몰고 출발해야 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이틀씩 밤을 새도 버틸만한 체력이 있을 때였다. 에너지음료를 마시고, 혹시 몰라 껌과 초콜릿을 챙기고 출발했다. 도중에 네비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가는 길을 알려줘 평택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곳은 평택에서 활동하던 시절, 농사짓는 마을 빈 집에 들어가 살 때였다. 익숙한 길이 보이니, 문득 그 집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여유는 있었다. 가서 그 집의 사진을 찍어서 메일로 보내며, 우리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어, 다시 시작하자는 메세지를 보내고 싶었다. (자세한 내용은 당시에 쓴 서재 글을 참조 ttp://blog.aladin.co.kr/idolovepink/6823647) 


무사히 그 집과 그 마을의 사진을 찍고 돌아와서 메일을 보냈다. 내 간절한 마음이 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가 메일을 보내고 조금 시간이 지난 어느날, 술에 취해 새벽에 늦게 들어온 날, 그는 평소와 달리 안 자고 일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게 그러지 말라고, 이미 우린 끝났다고,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왜 금방 답이 오지 않을까를 고민하며 불안해하던 참이엇다. 그 새벽 우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정말 돌이킬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멸망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나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나는 존경이 아니라 사랑을 원했지만, 그는 사랑을 포기하고 존경을 택했나보다. 그리고 그 존경마저도 나의 태도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옅어진 것 같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 그냥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타인이 되어 버렸을까? 그럼 나는 어떨까? 나 역시 이젠 그 사람을 별 감정없이 대한다. 


확실히 같이 살지 않고, 늘 얼굴을 대하지 않는 것이 훨씬 편한 것 같다. 그 사람은 나와의 관계를정리한 이후로 외모를 많이 바꿨다. 머리 스타일과 색깔을 바꿨고, 귀걸이를 끼고, 목걸이를 걸었다.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러 식당에 가서, 아이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득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낯설었다.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다른 사람일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또 함께 살았던 그 사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다만 하나 억울한 것은 이런 거다. 그는 저렇게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기분이 우울해 슬픈 노래를 들으며 울고 싶었다. 친구가 보내준 노래 중에 이 노래가 계속 마음속에 남았다. 볼빤간사춘기 처음 듣는 팀인데, 목소리가 참 좋다. 그리고 이어서 김동희의 [썸데이]를 듣고, 스탠딩에그의 [넌 이별 난 아직]을 듣고, 셀린 디온의 [think twice]를 듣고, 박기영의 [그대 때문에]를 듣고, 데비 깁슨의 [will you love me tomorrow]를 듣고, 엊그제 알게 된 노래 릴리 알렌의 [Littlest Things]를 반복해서 들었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의 질문에 답을 하다가 이 이야기를 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한 건 거의 몇 명 되지 않는다. 말을 하면서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나 그렇게 많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글로도 쓸 수 있겠구나 싶었다. 굳이 누군가 읽기를 원해서 쓰는 건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적어본다. 


이 글은 부득이 두 개의 버전으로 적는다. 공개할 수 있는 수위의 글과 공개할 수 없는 수위의 글. 하나는 여기에 공개하지만, 다른 하나는 영원히 나 혼자만 열어볼 수 있는 공간에 둘 것이다. 술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내 손을 잡고 "많이 힘들었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네, 저 무척 힘들었어요 하고 싶었다. 그 위로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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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4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6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토요일 아침에 잠을 깼더니 온몸이 다 아팠다. 어깨, 등, 허리, 엉덩이까지 기분 좋은 피로감은 아마 최근 다시 시작한 운동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팔목이 뻐근하게 아픈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아! 나 엊그제 이사했구나. 나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 거냐. ' 저 수많은 책들을 옮기고, 책장과 냉장고를 옮겨놓고, 게다가 이사한 집, 낯선 집에서 자고 일어나서 내가 왜 온몸이 뻐근한지 이유를 몰랐다니.


동네에서 평소 나를 아껴주는 선배가 세탁기를 사줬다. 이전 집에 있을 때부터 사주겠다고 했던 건데, 그땐 화장실에 놓을 공간이 애매해서 그냥 거절했었다. 여름엔 어떻게 손빨래를 하면서 버텼는데, 날이 쌀쌀해지고 몸이 바빠지니 도저히 세탁기 없이 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사 하기 전날 선배가 주문했고, 이사한 다음 날 낮에 배송한다는 기사님의 연락을 받았다. 한창 바쁜 날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도중에 세탁기를 받으러 갔다.


버스에서 업무용 카톡과 이메일을 들여다보다가 안내방송을 듣고 부리나케 벨을 누르고 내렸다. 배송기사님이 거의 다 왔다고 하셨으니, 서둘러 가야지 생각하고 횡단보도를 향해 뛰었다. 길을 건너고 나서야, 잘못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내방송만 듣고 무심결에 이사하기 전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린 것이다. 새로 이사한 집은 거기서 걸어서 7분 남짓 거리이지만, 버스 정류장으로 치면 세 정거장이나 차이가 난다. (이상하게 정류장 사이 거리가 가깝다.) 이미 늦었기 때문에 3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면 더 나았을텐데, 나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거구나 생각하며 뛰기 시작했다.


많이 문제야!


다시 토요일로 돌아와 아직 풀지 못한 이삿짐 정리를 해야 하는데, 정말 하기가 싫었다. 전날 밤 술을 좀 많이 마시기도 했고, 몸이 뻐근하니 피곤하기도 했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 누워있다가 폰을 들여다보니 이런저런 연락이 많이 와 있었다. 그중에 새벽에 도착한 시민신문 편집장의 기사 교정 부탁이 있었다.


신입 기자가 쓴 기사인데, 자신은 도저히 손을 대지 못하겠다고 교정을 봐달라는 얘기였다. 익숙한 일이다. 벌써 여러 번 그런 부탁을 받고 글을 고쳐줬다. 이 신입 기자의 기사가 대체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취재기자 출신인 편집장 입장에서는 글을 고치기가 난감할 거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그 연락을 무시하고 누워 잠을 청했다.


전화가 왔다. 편집장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교정을 볼 만한 상태가 아니예요. 전화를 무시하고 잠이 들었다. 점심때가 지나서 깼더니 전화가 여러 통 와있었다. 다시 울리는 전화. 더는 무시할 수가 없어 받았더니, 대뜸 바쁘냐고 묻는다. 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피곤하다고 했더니, 기사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웬만하면 하고 싶은데, 지금 아직 술이 덜 깨서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변명을 했더니, 밤까지 해주면 된다고 한다. 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뭐가 문제냐고 물었더니, "많이 문제야!" 라고 말한다.


노트북을 켜고 그 기사를 열어봤다. 아, 첫 문장부터 비문에다가 기사의 구조가 영 이상했다. 이 기사를 살리려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기사 안에 팩트가 부족했다. 자료를 더 찾아봐야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료를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거 제대로 쓰려면 하루는 부족할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노트북을 덮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저녁때 아이들이 오기로 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 좀 덜 어지럽게 정리를 하고 싶었는데, 몇 시간을 매달렸는데도 어지럽다는 측면에서는 그닥 나아진 것이 없었다. 애들엄마에게 연락했더니, 며칠 전에 조정했던 거 기억 안 나냐고? 오늘이 아니고 내일 가기로 했다고 한다. 아, 나 진짜 정신없이 살고 있구나.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배가 고팠다. 아이들이 오면 같이 밖에서 뭔가 맛난 것을 사 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밖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졌다. 주방을 정리해야 뭔가를 해먹을 수 있을 텐데, 씽크대가 너무 더러워서 싹 청소를 하기 전에는 정리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밖에 나가 밥을 사 먹고 와인을 사서 돌아올 생각이었다. 간밤에 소주를 많이 마셔서 오늘은 소주를 떠올리는 것도 싫었다. 여기저기 작은 구멍이 난 낡은 티셔츠에 시커먼 잠바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섰다. 


돼지국밥과 밀면


해장을 하려고 새로 생긴 순대국집에 들어가 순대국을 시켰다. 순대국은 서울에 올라온 후로 술 마신 다음날 주로 먹는 메뉴다. 부산에서는 거의 먹은 적이 없던 음식이다. 부산에선 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문득 시장 어느 허름한 가게에 앉아 먹는 돼지국밥 생각이 간절했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음식이 둘 있는데, 돼지국밥과 밀면이다. 못 먹으니까 더 간절한 건지는 몰라도 가끔 먹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진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순대국과 냉면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지만, 내가 진짜 먹고 싶은 건 이런 맛이 아니었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거 어쩌면 향수병이려나.


맛없는 순대국을 억지로 떠먹고 있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막 올라온 길이라고 얼굴을 보자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보자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단다. 난 집에 가서 씻고 옷도 갈아입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아니 그 전에 나온 김에 새 집에 필요한 생활용품들도 좀 사야 하는데, 어쩌지 싶었다. 우선 물건들을 사러 갔다. 빨리 사서 집에 돌아가서 옷 만이라도 좀 갈아입고 다시 나와야지 싶었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고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결국 친구가 도착해버렸다. 녀석은 내 몰골을 보더니 자기 평소 몰골이랑 비슷하다고 막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았다. 술자리는 길어졌고, 녀석은 결국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아직 짐 정리가 다 되지 않아 엉망이니 욕하지 말라고 했다. 녀석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게 무슨 엉망이냐고, 자기 집이 평소에 이보다 더 엉망이라고 했다. 너 생각보다 깔끔하게 사는구나 하길래, 아이들이 오가는 집이니 당연하다고, 오늘도 원래 애들이 올 예정이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정리를 해놓고 싶었는데, 다 못 끝낸 거라고 대꾸했다.


교정은 어려워!


집에서 또 맥주를 한참 마시다가 뒤늦게 시민신문 기사 교정 건이 떠올랐다. 편집장은 지금쯤 기사를 달라고 했는데, 어쩌나? 지금 다시 본다고 뭔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기사를 열어봤다. 역시 손을 대기 어려웠다. 시민신문 기자 출신인 친구도 옆에서 그 기사를 함께 들여다봤다. 곧바로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저런 글은 고치기 어렵다고 한 마디 한다. 나는 그래도 고쳐볼 여지가 있는지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었다. 무리였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이 되어 있었고, 술이 그리 세지 않은 친구는 이미 주량을 채운 후, 자려고 누웠다. 나는 남은 술을 다 먹고 자려고 유튜브로 음악을 틀어놓고 홀짝이고 있었다. 새벽 2시 경이었던가, 편집장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도저히 안 되겠다고 설명을 했다. 편집장은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냐고 했고, 나는 왜 안 되는지를 설명했다. 통화가 길어졌다. 결국, 편집장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지면을 채우기 위해 다른 글을 더 쓰던가, 이 글을 고쳐 쓰던가 해야 하는데,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한 편 화가 나기도 했다. 주말도 반납하고 신문을 내기 위해 기사를 쓰고 교정을 보는 편집장의 상황 때문이다. 그 새벽까지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편집장과 그 새벽 술을 먹다가도 기사 교정을 걱정하는 편집위원인 내 입장이 화가 났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다시 활동가의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반 토막 난 급여를 채울 수 있는 건, 꾸준히 부업으로 외주 편집 작업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활동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랐다.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일상이었다. 외주 작업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시민신문 편집위원을 비롯해서 동네에서 뭔가 교정볼 일이 생기면 모두 나를 찾았다. 


지난주 원고를 넘겼던 소책자의 교정도 내 몫이었다. 일하는 시간을 쪼개 교정을 봐야 했다. 최근 또 하나의 편집 업무를 맡았다. 짧은 시간안에 완성해야 하지만, 인건비는 최소한의 비용만 책정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은 전문 편집자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이 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기도 하다. 해당 활동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편집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작업을 해야 할 10월 말에서 11월 초에는 업무상 무척 바쁠 예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인건비가 책정되어 있으니,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겠지. 일을 맡은 이상 미리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 이 글을 써놓고 글에 교정 이야기가 있으니, 편집자들이 이 글을 읽고 비웃지 않을까? 자기가 쓴 글은 이렇게 엉망이면서, 무슨 교정을 본다고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교정을 보려고 했더니 머리가 아프다. 역시 교정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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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편집자가 겁나요..ㅎㅎㅎㅎ그 끝없는 지적과 까임...그래도 굳굳하게..ㅎㅎ// 네 이사하셨다니 몸살 날만도 하죠..
이사후 정리 다하고 안정될 때까지 거의 한 달 정도가 걸리는듯 하더라구요..^^..

고생하셨습니다..

감은빛 2016-10-26 14:27   좋아요 1 | URL
편집자는 꼼꼼해야 하고, 끊임없이 지적하고 요청해야 하는 사람이죠.
저는 편집자가 저자를 많이 괴롭힐수록 책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

이삿짐 자체는 벌써 정리 했는데,
자잘한 것들을 찾기 쉽게 분류를 못하고 있네요.
큰 짐들을 다 풀어놓으니 작은 건 손대기 귀찮네요.

samadhi(眞我) 2016-10-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이라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글 보면 난감하죠. 그냥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게 낫거더라구요.

감은빛 2016-10-26 14: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안 나니까 문제예요.
이 글에 언급한 저 글은 내년에 다시 손 보기로 합의 했어요.
과연 내년에 할 여력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ㅎㅎ
 

I'd like to see you naked


지난 주였다. 어느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새벽,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싫고, 술 한 잔 더 마시고픈 생각이 간절한데 같이 마실 사람은 없었다. 물론 집에서 혼자 마실 수도 있겠지만, 그땐 그냥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받기만 한다면 택시를 타고 달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고, 나는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혼자 술을 더 마셨다.


다음날 친구가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묻길래, "그냥 새벽에 술이 더 먹고 싶었는데,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미안!" 이라고 했는데, 녀석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너 상태가 많이 안 좋구나!" 한다. 뭐 솔직히 상태가 좋은 건 아니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자기가 당분간은 바빠 여유가 없지만,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꼭 얼굴보자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한참후에 뜬금 없이 톡으로 움직이는 사진 파일을 보냈다. 


 

웬 아리따운 여성이 손을 흔드는 장면을 카메라가 돌면서 찍은 장면이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녀석이 "티비 징하게 안 보는군" 이러고는 "설현"이라고 답을 보냈다. 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무슨 통신사에서 이 여성의 등신 입간판을 세웠다가 남성들이 가져가버렸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한참후에 녀석이 톡을 보냈는데, 아 진짜 일하다가 말고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네가 벌거벗은 여성들 사진 좋아하면, 그런 건 잔뜩 보내줄 수 있는데" 이러는 거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남자로서 왜 안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반드시 필요한 시간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카톡으로 그런 사진들을 잔뜩 보내준다는 건 좀 왠지 그랬다. 뭐 웹을 뒤져보면 그런 사진이야 잔뜩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굳이 그런 사진을 저장해두고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암튼 답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 순간은 지나갔는데, 나중에 몇 시간 후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갑자기 그 톡이 또 생각났다. 그때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로렌 크리스티의 <You make me laugh>에 I'd like to see you naked 라는 부분이 생각났다. 근데 검색해도 유튜브에 없네. 이 좋은 노래가 왜 유튜브에 없지? 저작권 때문인가? 암튼 나중에 집에 와서 그 노래를 찾아 들으며 다시 한참 웃었다.


수없이 바람에 흩어진 담배 연기의 결과물


에너지협동조합 연합회에서 조합원들을 위한 교재를 하나 만들자고 뭉쳤던 건 작년이었다. 여러 조합에서 실무자들이 모였는데, 다들 실무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교재를 만들어야 하는데, 목차를 정해놓고 각자 원하는 부분을 맡아서 쓰기로 했다. 그렇게 글을 모으면 글의 수준이나 톤이 제각각 일 것이기 때문에 내가 교정을 보면서 글을 만지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받아본 글은 생각보다 제대로 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했다. 단순히 글의 난이도를 맞추고, 톤을 조절하면 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아예 내용 자체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수준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글을 다시 써야하는 수준이었다. 도저히 그럴만한 시간을 내지 못해, 결국 완성된 교재를 만들지 못하고, 미완성의 원고만 남았다.




올해 연합회에서는 10월 22일 토요일 청계 한빛 광장에서 '마스크 퍼레이드'를 기획했다. 미세먼지를 일으키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없애고, 지구를 살리는 재생에너지, 햇빛 에너지로 가자는 뜻의 캠페인이다. 이날 사용하기 위한 소책자를 제작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기본을 작년에 만들다 실패한 저 조합원 교재를 하자고 하는거다. 


일단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은 저 교재의 목차에 들어가 있겠지만, 문제는 저 교재에는 그 내용이 충실히 담겨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시 저 교재를 완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쨌거나 내가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바빴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 쓰겠다고 했지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감에 닥쳐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교재를 완성할만한 시간은 나지 않았고, 그 교재에서 다시 내용을 발췌해서 소책자를 만드는 건 시간낭비였다. 처음부터 소책자 원고를 다시 썼다. 소책자니까 아주 대중적으로 쉽게 써야 했다. 나는 우리 큰 아이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되도록 쉬운 단어와 표현을 쓰려고 애썼고, 많은 정보를 담기보다는 어떤 느낌인지 깨닫기만 해도 좋다는 기분으로 썼다. 어떤 내용은 쉽게 쓰는게 거의 불가능하기도 했고, 되도록 글을 간결하게 담아야 하는데, 내용이 많아서 자꾸 길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글이 막힐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웠다. 최근에는 평소에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한 일주일 안 피다가 술 마실 때 몇 개비 피우고, 또 며칠동안 한 개비도 안 피우고 이런 패턴으로 살았는데, 그날은 진짜 오랜만에 엄청나게 피웠다. 일요일 밤을 꼬박 새고, 월요일 오전엔 회의하고 또 해야할 업무들을 보다가 오후 늦게부터 다시 매달려서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야 원고를 마쳤다.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담배를 피우고 내려와 교정을 다시 보고 원고를 넘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소주를 한 병 반 마시고 잤다.


화요일 연합회 처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고생 많았다고, 바쁜데 애 많이 썼다고 했다. 사실 미리 써서 줬어야 했는데, 내가 계속 미룬 탓에 전체적으로 빠듯한 일정이 되어버려서 나도 면목이 없던 참이었다. 지난 주에 담당자는 "오늘도 안 주면 울어버릴 거예요." 라고 협박까지 했으나 그로부터 4일이나 더 지나서 원고를 넘겼으니 말이다. 소책자 제작을 위한 실무 회의를 하려고 처장님과 담당자와 디자이너가 모였으나, 원고가 거의 완벽해서 회의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제서야 조금 내가 고생을 하긴 좀 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글을 쓰느라 내가 태운 그 수많은 담배가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연기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으나, 그 성과로 원고가 남았으니 말이다.


다시 쓰고 싶다. 소설


아주 오랫만에 원고 칭찬을 받았더니, 기분이 좀 우쭐해졌다. 낮에 멀리 다녀올 일이 있어서 지하철을 오래 타고 다녀왔다. 음악을 듣으면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를 돌아다녔다. 출판사에 다닐 때 인연을 맺었던 후배 하나가 최근 출판사를 그만뒀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오늘 보니 소설을 써서 응모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작가 지망생이 되려고 나선 것이다. 그의 선택이 부러웠다. 응원해주고 싶었다. 나도 20대 때는 골방에 틀어박혀서 소설쓰느라 시간을 참 많이 보냈다. 나에게 이제 그 꿈은 사라진 걸까? 지금 내가 일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걸쳐놓은 온갖 활동들을 다 정리하고 소설 쓰겠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과연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제대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궁극적인 목표인 등단을 할 수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쓴 글들을 하나씩 떠올려 봤다. 함량 미달의 글들. 골방에 처박혀 담배 연기에 찌든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글은 잘 나아지지 않았다. 늘 일정 수준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동아리 소식지에 실으라고 써준 단편소설 생각이 났다. 그 글은 고등학생 때 만났던 여학생과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금 각색해서 쓴 글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 동아리 회장을 맡을 때 뭐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소설을 써서 소식지 원고로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군대 입대일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물론 그 전에 얼개는 구상해놓은 글이긴 했다. 대부분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각색하는 거라, 크게 어려움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우리집에 아직 컴퓨터가 없어서 나는 공책에 삐뚤빼뚤 손 글씨로 원고를 썼다. 엄청난 악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알아볼 수 는 있을 정도로 쓰느라 좀 힘들긴 했다. 하지만 그 글을 타이핑 할 후배 녀석도 어지간히 악필이라 알아보리라 예상했다. 입대 전날 원고를 완성해 입대하는 날 부산역으로 마중나온 후배에게 그 원고를 안겨주고 나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떠났다.


시간이 한 1년 반쯤 지나서 휴가를 나왔다가 동아리 후배들을 만났다. 바로 한 해 후배들이 한 두명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입대하고 나서 입학한 후배들이라 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인사를 하자 여학생 두 명이 "어머!"하고 깜짝 놀라며 서로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하더라. 난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그 두 명이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둘 중 하나가 물었다. "선배님, 혹시 입대하기 전에 소설 써서 소식지 원고로 주고 가셨어요?" 나도 깜짝 놀랐다. 그 후배가 회장 직에 부담을 느껴 뭐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이 시간만 보내고, 그 소식지는 내지 못했다고 들었다. 내가 악필로 쓴 원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냥 그 녀석이 갖고 있겠지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두 여학생은 자신들이 작년에 1학년때 회장이 시켜서 내 소설 원고를 타이핑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글이 정말 재미있었다고, 마치 유명한 연애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고, 어떤 어떤 장면은 무척 로맨틱해서 타이핑을 하다말고 한참을 글에 빠져들어 읽었다고 했다. "선배님,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쓰세요? 멋져요!" 이렇게 칭찬을 받으니 난 정말 어쩔줄을 몰랐다.


자, 나는 휴가나온 군인이었다. 군대라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는 조직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가 잠시 나온 사람이다. 게다가 최전방이라 여성 뿐 아니라 그냥 사회인도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마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처럼 평범한 사회와는 격리된 생활을 했다. 내가 아무리 유쾌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해도, 그때는 막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대화하고 그런게 무척 어색할 때였다. 어여쁜 여자 후배들 앞에서 완전 수줍어서 제대로 얼굴도 못 쳐다보고, 말도 잘 못하고 그런 때였다.(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랬다는 것이 별로 믿기지 않지만) 그때 난 완전 소심하고 쑥맥에 말주변도 하나도 없었다.


내 첫사랑이라고 표현해도 되려나? 그 전에 만났던 여학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기준으론 첫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그런데 그럼 그 전에 진심으로 짝사랑했던 건 또 뭐지? 아! 그건 이뤄지지 못했으니 첫사랑이 될 순 없는 건가? 모르겠다. 그냥 첫사랑이라고 해두자. 그 기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내 양쪽에서 완전 나를 띄워주는 후배들과 앉아 있는 그 순간에 나는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지만, 수줍어서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만약 평소의 나였다면 둘 중 좀 더 적극적인 아이에게 바로 작업이 들어갔겠지만, 그때는 그냥 그렇게 아무일도 없이 끝났다.


그때 들었던 칭찬과 찬사가 평생 들었던 어떤 칭찬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 그건 어쩌면 기억의 왜곡일 수 있겠으나,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둘은 그저 휴가를 나왔다는 시꺼먼 빡빡머리 군인 아저씨가 그런 글을 썼다고 하니 신기해서 막 그렇게 칭찬하고 질문을 했던 것이겠지만, 게다가 나름 동아리 선배라고 하니 막 치켜세워 준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칭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진짜 좋았다.


나중에 후배에게 그 원고를 돌려받았다. 제대하고 나서 한참 후였다. 그 글을 내가 다시 타이핑해서 파일로 만들어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아까 11시 반쯤 애들을 재우면서 함께 잠들었다가 다시 깬 후 잠이 안 와서 그 글을 읽어봤다. 아! 진짜 묘사도 허술하고, 대사도 하나같이 오글거리고 기본이 안 된 글이더라. 다만 구성과 서술은 어느정도 수준은 되어 있더라. 다시 읽으며, '그래. 저때 저런 일이 있었지. 그땐 그런 일이 있었고. 어! 저때 진짜 힘들었는데'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다가가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과연 입대 직전의 나는 저 마지막을 어떻게 썼던가? 생각보다 맥 없이 끝나더라. 그 아이들 이런 허접한 글을 읽고 그렇게 나를 추켜 세웠단 말이지? 그거 그냥 예의상 칭찬하다가 조금 분위기가 올라 더 칭찬도 하고 질문도 했는데, 그렇게 진심은 아니었던 거 아닐까? 모르겠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소설 원고 하나를 응모했다는 후배의 글을 보고, 내가 썼던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그 소설에 대한 칭찬이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기 까지 참 나란 인간 어쩔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이들 데리러 출발하기 전에 담배를 사무실에 놓고 왔음을 떠올린다. 편의점까지 사러 가기는 너무 귀찮다. 그냥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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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2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0-1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서재에 오면 항상 누군가 맨 위에 비밀댓글을 달아두시더라고요 ㅎㅎㅎㅎㅎ 오늘도 그러네요 ㅎㅎㅎ)

소설 쓰기, 응원합니다.

저 역시 어제, 소설을 써보자고 결심했거든요. 어제 만나게 된다면 `저 소설 쓸거에요!`라고 말하려고 했었어요. ㅎㅎ
어제는 막 자신감과 의욕에 차서 소설을 쓰리라, 쓰겠다, 쓸것이다, 했는데 얼마 안가 다시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쩌나... 생각중인데, 일단 출판이야 어떻든 써보긴 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소설 쓰세요. 우리 소설로 경쟁합시다!!

감은빛 2016-10-12 11:32   좋아요 0 | URL
아, 그 말씀을 하시니, 실제로 최근엔 그랬네요. ^^

저도 아까 다락방님이 이 댓글 달았던 시점에 다락방님 서재에 댓글 달고 있었는데,
우린 같은 시간에 서로 댓글을 달던 중이었군요.

소설을 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거예요.
현실을 최대한 잘 반영하기 위해서는 발로 뛰면서 취재도 다녀야 하구요.

당장 출판을 걱정하기 보다는 제대로 된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가장 큰 장애 요인인 것 같아요.

다락방님과의 경쟁은 자신 없어요!
그냥 동지로서 함께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성장해요!

다락방 2016-10-12 15:11   좋아요 0 | URL
동지는 무슨...

다 적이닷!!!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