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가 나서 아파


아마 열흘 전쯤이었다. 운동을 하고 씻고 잤는데, 새벽에 팔에 쥐가 나서 잠을 깼다. 종아리에 쥐가 나서 깨는 일은 가끔 있지만, 팔뚝에 쥐가 나서 깬 건 처음이었다. 쥐가 난 것은 왼팔이었고, 오른팔로 주무르다가,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더니 통증이 가라앉았다. 팔뚝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낯선 느낌이었다. 팔에 쥐가 나다니! 생각해보니 평소와 달리 운동을 마치고 팔 운동을 더 했었다. 특정 부위 근육만 키우는 고립운동을 잘 하지 않다가, 갑자기 더 했던 것이 화근이었나보다. 고통 때문에 잠을 깬 것은 기분이 나빴지만, 다음날 그 만큼 운동을 열심히 한 때문이라 생각하니, 운동한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어제 밤에는 종아리에 쥐가 나서 잠을 깼다. 너무 아팠다. 발을 뒤로 젖혀야 풀리는데, 혼자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혼자 끙끙 신음 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지만, 통증 때문에 발가락 끝에 손이 닿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자다가 쥐가 나 신음 소리를 내면 애들엄마가 깨서 발을 젖혀주기도 했다. 아, 곤히 자느라 모르고 도와주지 못했던 적도 많지만, 가끔은 도와줬다.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손을 뻗어 발가락 아래 굳은살이 배긴 부분을 잡고 뒤로 당겼다. 간신히 쥐가 풀렸다. 이젠 쥐가 나서 고통스러워도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렇구나. 아프지 말아야 겠다. 다치지 말아야 겠다. 돌봐줄 사람이 곁에 없으니 혼자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아야 겠다. 새삼 다시 깨달았다.


어제 쥐가 난 건 토요일 아치 발전소 청소와 집회 참가 때문이었으리라. 종아리 근육에 무리가 갈만큼, 발전소 청소 때 힘을 많이 썼고, 이후 계속 서있거나, 인파를 뚫고 걸어다녔다. 가끔 뛰기도 했다. 수많은 인파에 묻혀 꼼짝하지 못할 때에도 계속 몸이 이리저리 밀려 다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까지 계속 밖에 있었고, 계속 다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고, 또 제법 걸어야 했다. 그러니 종아리 근육이 뭉쳐서 쥐가 날 만 했다. 


예전에 이명박 시절에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두 분의 실형 선고 소식을 전하면서, 내 종아리에 쥐가 난 소식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어느 알라디너가 비밀 댓글로 조심스럽게 하지정맥류 증상이 아닌가 걱정을 하셨다. 쥐가 나서 깬 적은 많았지만, 아침에 깨서 그 쥐가 난 증상 때문에 다리를 절고 걸어야 할 정도고 통증이 오래 간 적은 없었으니까 나도 좀 이상하다 생각했던 참이었다. 다행히 그 후로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당시에도 무리해서 운동을 했거나, 많이 걷거나 뛰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0


뛰어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가방이나 거추장한 옷 차림을 별로 좋아히지 않는다. 가방이 작거나, 없어야 뛰어다니기 편하다. 옷도 되도록 간편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에 인파가 많으면 과감하게 차도로 내려가 뛰기도 한다. 


출근을 할 때나,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퇴근시간이나,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하필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쳤다면 버스 노선과 거리를 가늠해보고 뛰어서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따라잡아 타기도 한다. 차가 막히는 시간이거나, 다음 정류장이 거리가 아주 가깝거나, 신호가 절묘하게 걸렸을 때 등 운이 따라줘야 하고, 가슴이 터지도록, 허벅지 근육이 터지도록 전력질주를 해야 가능하다. 


#1


출판사에 다닐 때니까 벌써 몇 년 전이다. 뭔가 급한 일을 하다가 거래처를 방문하기로 한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나섰는데, 하필 눈 앞에서 버스가 출발해버렸다. 택시도 잘 잡히지 않는 거리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다음 뛰기 시작했다. 교차로 3개를 지나는 동안 버스는 계속 신호에 걸렸다가 가기를 반복했고, 그 동안 나는 전력으로 달려서 다음 정류장에서 간신히 버스를 탔다.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땀을 비오듯 흘렸고, 거의 10여분 이상을 숨을 헐떡였다. 그래도 덕분에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다.


#2


어느 날 출근 시간 집에서 나서서 내려오는데, 저기 앞 종점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것이 보인다. 뛰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차량이 가로막고, 사람들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뛰기 어려웠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버스가 승객들을 태운 뒤 출발해 버렸다. 다음 정류장은 가까웠다. 뛰면 분명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전력질주. 교차로에 닿기 직전에 직진신호로 바뀌면서 버스가 출발했고, 횡단보도 역시 초록불로 바뀌었다. 버스보다 빨리 정류장에 닿아야 했다. 버스가 서서히 속력을 올리는 동안 온 몸의 힘을 짜내어 달려서 버스를 추월했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 버스가 나를 앞서가 정류장에 섰다. 하필이면 아무도 타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타면서 버스를 잠시라도 붙잡아 둬야 하는데. 다행히 내가 뛰는 걸 본 기사님께서 잠시 기다려주셨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께 간신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터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고르며 지냈다.


#3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건만,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다. 어린이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가 생각났다. 지금 일어서야 했지만, 이 회의에 자주 들어오지 못하다가 오랫만에 들어온 터라 눈치가 보였다. 게다가 중요한 논의였고, 사람들은 망설였고, 쉽게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답답했다. 내가 나서서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나에게 책임이 돌아올까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어야 했다. 아, 이 회의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거야! 회의 주최자가 원망스러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발언을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빨리 결정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 다음, 눈치를 보다가 살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건물을 나와 정류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저 위에서 버스가 좌회전을 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앗! 아직 정류장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데, 자동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인도에 사람이 많았다. 한 명 한 명이 장애물이었다. 요리조리 피해가며 뛰는데, 버스가 나를 추월해 지나갔다. 다급했다.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택시가 빵빵 클랙션을 울리며 나를 피해갔다. 다시 인도로 돌아와 사람들 사이로 뛰었다. 정류장에서 타는 사람이 많아 버스는 한참 서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만원버스겠지? 과연 탈 수나 있을까? 정류장에 닿기 직전에 버스는 출발해버렸다. 이런 젠장! 다시 한번 혼자 심심하게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출발했던 버스가 저 앞에서 신호에 걸린다. 다시 뛰기 시작한다. 다행히 이 구간엔 사람이 많지 않다. 전력으로 뛰었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나도 도착해 버스를 탔다. 완전 만원 버스라 간신히 사람들을 밀고 올라탈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이 닫힐 때 옆 사람을 밀치고 몸을 피해야 했다. 작은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또 뛰어야 했다. 아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말이 나오지 않아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를 해야했다. 만나자마자 작은 아이의 한 마디. "아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는 바로 대답도 못 하고 한참 숨을 고른 후에야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가슴이 아파



'내 귓가에 스친 노래가 아파' 라는 가사가 가슴을 후벼팠다. 한때 좋아했던 슬픈 노래 중에 너무 아파서 잘 듣지 못하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길 한 가운데에서 걷던 중이라도, 사람이 많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도저히 들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주 유명한 노래가 아니지만, 가끔 라디오에서 틀어주거나, 유튜브 자동재생 목록에 포함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슴이 아파,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아파~ 니가 없는 나의 하루가 아파~ ' 

'햇살이 아파, 너와 함께 걷던 거리가 아파~'


꽤 오랫동안 그 사람과 좋았던 시간들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생활 반경 곳곳에 그 사람과의 추억이 도사리고 있다. 일터에서 자주 들러야 하는 지역의 거점 공간을 가려면 결혼하자마자 구해서 짧게 살았던(미친 집주인 때문에 대판 싸우고 나왔던) 집 앞을 지나야 하고, 그 거점 공간 뒤쪽에는 재개발을 통해 지금은 허물고 아파트를 지었지만, 평택에서 막 올라왔던 나를 받아줬던, 그래서 그와 동거했던 집이 있었다. 그와 팔짝을 끼고 웃으며, 장난치며 걸어다녔던 골목길들, 큰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내 팔에 몸을 기댄 그를 데리고 산부인과로 걸었던 길이 바로 근처다. 잊고 싶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떠오른다. 머리가 나빠 숫자도, 사람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 하면서 왜 그런 기억은 자꾸 떠오르는 거냐!


아이들이 좋아하는 월드컵공원을 가면 늘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다. 거긴 그가 나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가르쳐주고 함께 탔던 데이트 장소였다. 나도 모르게 아직 젊었던 그의 얼굴과 바람에 날리던 머리칼이 떠오르고, 저만치 앞서 가다가 나를 향해 돌아보며 웃던 표정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고 놀지만, 나는 괴롭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조금씩 무뎌지긴 하는 것 같다. 최근에 갔을 때는 덜 아팠다. 대신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작은 아이가 아직 한참 어렸을 때,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은 채로 작은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몰고 좀 타보려고 시도했던 기억이 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결혼 후 창고에 처박아놓고 한번도 타지 않은 탓이다. 발목 근육이 약해졌는지, 자세가 바로 잡히지 않았다.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큰 아이와 함께 타보겠다고, 겁없이 인라인을 신었던 적이 또 한 번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이제 더이상 인라인을 탈 수 없구나. 몸이 타는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구나. 아니 탈 수 있는 몸이 아니구나. 


인라인을 더이상 타지 못하는 몸이 된 것처럼, 이제 그와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고, 더이상 괴롭고 아프지 않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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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5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5 1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11-15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릎 관절..고관절도 재생안되는 거예요..관절을 소중히^^..몇해 전에 1년에 자전거 및 산행..걷기..달리기 총거리가 900KM이동거리였습니다..그 이듬해 봄에는 고관절에 물이 차더군요..정말 아프더군요..ㅎㅎㅎ지금도 무릎이 뜨끔뜨끔거릴때가 간혹 있어서요..나이들어가니 표시가 나던데요..ㄷㄷㄷㄷ

감은빛 2016-11-15 19:02   좋아요 1 | URL
관절은 소중하죠.
저는 20대 초반에 어깨와 무릎을 다쳐서 지금도 가끔 아플 때가 있습니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또 그렇게 많이 뛰지도 않아요.
계단 오르내리기를 하다보면 무릎 주변 근육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유레카님 고맙습니다!

안타까워 2016-11-1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몸도 소모품이랍니다. 그러니 아껴쓰야지요. 체계적으로 운동을 해서 운동강도를 높혀가는게 아니면 꼭 탈이납니다. 그리고 쥐가 자주난다면 마그네슘을 복용해보세요.그렇게 무작정 뛰다가 정말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면 큰일납니다.

감은빛 2016-11-15 19: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쥐가 자주 나는 건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씩인데, 하필 팔에 나고 얼마 후에 종아리에 난 거죠.
뛰다가 가끔 넘어져서 다치기는 했어요.
조심하려고 합니다.

cyrus 2016-11-1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 들수록 조금씩 몸에 변화가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서글픕니다. 제 친구는 저보다 운동 신경이 좋고, 농구를 엄청 좋아했어요. 그런데 제대 이후부터 허리 디스크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 적이 있어요. 허리 때문에 농구를 점점 멀리하게 되고, 예전의 기량을 볼 수 없게 됐어요.

감은빛 2016-11-15 19:05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지난 번에도 그 친구 말씀 하셨어요.
안타깝네요!

이젠 진짜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더 운동이 필요한 것 같아요.


samadhi(眞我) 2016-11-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가 날 때는 얼른 벽이 있는 공간 앞에 가서 다리를 벽에 올리고 누운 상체와 다리를 90도로 유지한 채로 잠시 있으면 금세 풀립니다. 신기하게도. 지독히 심할 때도 그럴 지 모르지만 저도 학원강사 할 때 만날 서 있다보니 밤마다 쥐가 났거든요. 그럴 때마다 그렇게 하면 금방 괜찮아지더라구요.

감은빛 2016-11-18 13:53   좋아요 0 | URL
진아님,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그렇게 한 번 해 볼게요.
발을 뒤로 제치면 잠시 후 풀리는데, 혼자서는 그걸 잘 못 하겠더라구요.

학원 강사 하셨군요. 저도 꽤 오래전에 한동안 했어요.
활동가로 살면서 사교육 시장에 일한다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한 이후 부터는 생각도 안 하지만,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은 참 좋았다 싶어요.

samadhi(眞我) 2016-11-18 14:58   좋아요 0 | URL
발바닥을 벽에 붙이시구요. 보여드릴 수 없어 아쉽지만 대충 아시겠죠? 대충 하시면 됩니다. 맞아요, 그 아이들은 절 잊었겠지만 저는 그 애들이 가끔 생각나요.

감은빛 2016-11-18 15:39   좋아요 0 | URL
아, 발바닥을 벽에 붙이라고 하시니 알 것 같아요.
그럼 더 쉽게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자랑


친구가 페이스북에 어제 아들을 안고 집까지 걸어서 돌아가는 길이 힘들었다고 올렸다. 그집 아이를 본 적은 없지만, 사진을 보니 너댓살쯤 된 것 같다. 그래. 아이가 태어났다는 글을 봤던 게 그쯤 전이었던 것 같다. 그 글을 보니 생각났다. 2008년 촛불집회때 어느날인가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행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 난 당시 네 살이었던 큰 아이와 애들 엄마와 함께 갔었다. 출판사 동료도 함께였다. 우린 당연히 행진에 함께 했고, 난 아이를 안고 여의도까지 걸었다. 물론 걷는 도중에 무척 힘들었다. 팔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이 있었다. 애들엄마가 짧게 받아 안기도 했고, 출판사 동료도 잠시 안아주기도 했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짧은 구간은 아이 손을 잡고 걷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구간을 내가 안고 갔다. 내 아이 정도는 내가 충분히 안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왼팔에 아이를 안고, 오른팔로는 주먹 구호를 외치면서 당당하게 걸어갔다. 


마포대교를 건널 때가 마지막 고비였다. 아이는 졸려했고, 왼팔은 이제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아이는 오른팔로 안으면 불편해했다. 물론 당연히 오른팔과 왼팔을 번걸아가며 안았지만, 왼팔로 안고 있던 시간이 더 길었다. 걱정이 된 출판사 동료가 아이를 받아 안으려 했지만, 아이가 가지 않으려 했고, 애들엄마도 옆에서 걱정스런 눈으로 보고 있엇지만, 나는 씩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이 다리만 건너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자꾸만 아이를 안은 팔이 쳐져도 괜찮다 여겼다. 결국 다리를 건넜을 때 약간 희열을 느꼈다. 어려운 목표를 하나 이루었다는 기쁜 감정. 게다가 이 경험이 언젠가 아이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내가 지켜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친구의 글에 댓글을 남겼다. 난 2008년에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안고 갔다고. 자랑이었다.


시위 문화


여러 행사의 진행을 맡아왔지만, 집회 사회를 맡은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기자회견 사회는 맡아봤는데, 집회와 성격이 좀 다르다. 집회 사회는 직접 해보니 오히려 간단하더라. 순서대로 사람들 발언 시키고, 발언 중간 중간에 구호 한 번씩 외치고, 그 와중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격앙된 말투로, 서서히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말하면 된다. 아, 막판에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르는 거을 잊으면 안된다.


시대가 많이 변했건만, 이 구태의연한 시위 문화는 거의 변함이 없다. 집회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도, 집회에서 발언하는 사람도 역시 그대로더라.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문화에 갇혀 있고, 대다수의 시민들을 배려하지 못하더라. 물론 난 그들의 문화가 익숙하고, 과격한 투쟁가와 과격한 구호와 주먹 다짐을 보면 피가 끓어오르고, 전의를 불태울 수 있어서 좋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그런 문화는 참 우스울 것 같다.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거의 없었는데,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보니 남성들의 부적절한 언행들을 토로하는 글들이 여럿 있더라. 괜히 젊은 여성(혹은 젊은 남성)에게 시비를 거는 중년 남성은 집회 시위 현장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아니 이 공간엔 그런 남성이 오히려 더 많을 거다. 그들은 정치적 이슈 때문에 광장에 나왔고, 스스로 진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생활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보수적인 꼰대일 뿐이다. 



이번 집회 전에는 이런 웹자보도 돌아다니던데, 제발 집회 시위 장소에서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폭력과 비폭력


어제 내자동 교차로에서 일부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밤늦게 경복궁 역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눈으로 보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그 인원들이 새벽까지 버티다가 결국 경찰에 의해 인도로 밀려났다고 들었다. 차벽을 향한 항의. 광장에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내 의지를 전달하기 위한 행동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엇다. 이를 폭력시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난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이분법에 갇히면 우리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두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나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따지기 위해, 이 미친 현실이 믿기지 않아서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권력집단과 경찰은 언제나 차벽을 치고 그 뒤에 숨는다. 아니 차벽으로 우리가 적당히 놀다가 지쳐 돌아갈 공간을 만들어준다. 지난 글에도 썼듯이 차벽은 폭력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비열한 폭력이다. 


그들은 이미 국민을 농락했고, 세금을 자기 주머니로 꿀꺽했다. 불법을 버젓이 저지르고도 전혀 처벌받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거리에서 항의하려 하자 차벽과 경찰 병력을 동원한 진압이라는 폭력으로 맞선다. 


비폭력이라는 말 자체를 반대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와 비폭력은 단순히 권력에 굴복해서 시키는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과연 다른가? 차벽을 쳐 놓으면 그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뜻이니. 적당히 소리 지르고 항의하다가 돌아가야 하나?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꼭 차벽을 뚫기 위한 노력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벽을 우회해서 서울 시내 전역을 우리만의 해방구로 만들어 버려도 좋겠다. 다만 그 좁은 공간안에 갇혀 있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비폭력 저항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가로 막는 것이 있다면, 그걸 넘어서 가는 것이다. 차벽을 뚫던가, 차벽을 우회해 차도를 점거해 교통을 마비시키던가, 경찰청을 우리가 봉쇄해버리던가, 뭔가 시도를 해야 한다. 저항하지 않고 뒤에서 비폭력만 외치는 것은 더러운 권력자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에 갇히는 거이다.


오늘 페이스 북에서 보니 누군가 이 주제로 글을 쓰면서 인도에서 있었던 간디의 소금행진을 예로 들었다. 영국 군인이 총을 쏘면 맞으면서 갔다고 했다. 우리의 3.1운동은 어떤가? 일본 군인의 총칼에도 저항했던 선조들이 이었다.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우리가 거리에 서는 것은 뭔가를 바꾸고 싶은 열망에 소중한 주말 시간을 바쳐 나오는 것이다. 


무언가 바꿔내고 싶다면, 최선을 다 했으면 좋겠다. 


물론 모두가 맨 앞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는 오히려 문화제 같은 방식으로 우리만의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재미도 없고 공감도 얻지 못하는 선언문 따위 읽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대다수 시민들이 즐길만한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 그리고 행진은 꼭 청와대를 향하지 말고 서울시내 곳곳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서 우리가 이렇게 분노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어떨까? 그리고 차벽이라는 공권력의 폭력에 화가 나는 사람들은 차벽에 모여 그 분노를 표출하면 되지 않을까? 모두가 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뒤에서 비폭력을 외치며, 정당하게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시위라고 손가락질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기억하자. 백남기 어르신은 작년 민중총궐기에서 밧줄로 차벽을 끌어내려다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셨다. 그건 어쩌면 그 자리에 있었던 내가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당신이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대포를 사람에게 쏘라고 지시한 인간과, 그걸 실행한 인간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여전히 잘먹고 잘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들이 만들어놓은 차벽 안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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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11-1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인되지는 않지만 어제 몇몇 여성들이 성희롱을 당했다고 합니다. 사람들로 꽉 찬 공간에서 신체 부위를 만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저도 그런 일을 당해봐서 그 더러운 기분을 아는데요. 누군지 확인하기도 어렵고. 좋은 취지로 시작한 일에 그런 지저분한 짓을 하는 사람이 함께한다는게 정말 끔찍합니다.

감은빛 2016-11-13 19:25   좋아요 0 | URL
그렇게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고 갇힌 공간이었으니,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처럼 그런 더러운 짓이 일어났군요.
진짜 끔찍합니다! 에휴!

감은빛 2016-11-13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www.huffingtonpost.kr/namsoon-kang/story_b_12935974.html

‘평화시위-폭력시위‘라는 틀 자체는 이미 근원적인 오류를 지닌다. 첫째, ‘시위‘란 한 사회에서 권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의 최후의 저항행위라는 점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평화-폭력‘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은 사실상 권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약자들에게 던지는 ‘정치적 덫‘의 기능을 한다. 시위현장에서의 폭력은, 대부분 권력을 지닌 이들이 약자들의 ‘폭력‘을 유도하여 야기되곤 한다. 이런 경우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폭력-일반론은 거꾸로 약자들에게 강력한 ‘인식적 폭력(epistemic violence)‘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이미 ‘통치적 폭력‘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그러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시위 정황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구의 폭력에 함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강남순 -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2016-11-13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8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너나린 2016-11-1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시민들도 부지기수인데..철옹성에 들어앉아 콧방귀나 뀌고 있을걸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밉니다ㅜㅜ
무조건 폭력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이정도로는 도저히 해결이 될것 같지를 않아서 맘만 더 답답하네요ㅜㅜ

감은빛 2016-11-18 14:07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예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에도, 가족들, 친구들 손 붙잡고 나왔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일부러 가둬놓은 차벽 안에서 얌전히 있다 가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화가나요!

어느 SNS에서 보니 일제시대에 이완용이 평화시위를 해야 한다고 썼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우리가 평화롭게 놀다 가길 원하는 마음이었더라구요.

:Dora 2016-11-1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까지 잠들기가 죄송했습니다. 과연 비폭력이 철통무식모르쇠들에게 무슨 의미일지도 생각...

감은빛 2016-11-18 14: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테오도라님.
네, 말씀처럼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지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태양광발전소 청소


토요일 아침, 오늘은 태양광 발전소 청소가 있는 날이고, 낮까지 아이들과 지내야 하는 날이고, 민중총궐기 집회가 있는 날이다. 발전소 청소에는 사다리나 막대 달린 걸레 등의 도구도 필요하고, 그 도구들을 옮길 차량도 필요하고, 청소를 할 사람도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청소에 참여하겠다고 답을 한 조합원이 거의 없었다. 전날 다시 확인해보니, 오겠다고 답을 하신 분 중에 못온다고 한 분도 있었다. 이사님 중 한 분이 초등학생들을 데려오기로 했는데, 몇 명이나 데려오실 지 여쭤보려 연락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불안했다. 사람이 안오면 어쩌지? 그냥 소수의 인원이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만 청소 해야겠지.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 차량을 빌려 놓고, 아침에 빌릴 사다리를 어떻게 찾고 또 반납할 지 약속을 정했다. 


어쨌거나 다시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애들 깨웠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발전소 청소를 가기 싫어했다. 하지만 낮시간까지 내가 아이들을 돌봐야했고, 난 발전소 청소를 하러 가야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집에 있겠다고 했다. 물론 큰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니 둘만 둘수도 있겠지만, 집에 밥도 없고, 반찬도 없었다. 점심도 문제이고, 어쨌거나 내가 책임지는 시간인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설득했다. 억지로 준비 시키고 김밥을 사러 갔다. 반은 아침에, 나머지 반은 청소를 마치고 먹을 에정이었다. 하필 이 마음이 급한데, 김밥집에 김밥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10분을 넘게 기다려 겨우 김밥을 사서 돌아왔다. 아이들은 느릿느릿 옷을 입고 있었다. 서두르라고 잔소리를 몇 번 하고, 협박을 몇 차례하고, 그래도 안 되어서 화를 벌컥 내면서 간신히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사다리를 빌리고, 약속장소에 도착했더니 10분 전이었다. 그런데 약속시간에서 15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25분 동안 멍하니 사람들을 기다렸다. 결국 발전소로 가서 짐을 내리기로 했다. 그제서야 이사님 두 분과 학생들 여러명과 학부모 한 분이 오셨다.


학생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청소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만 아랫 열은 손으로 닦을 수 있지만, 윗 열은 사다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사다리 위에서 막대 걸레를 이용해 닦는 일은 힘들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힘을 줘서 빡빡 문질러야 하는데, 자칫 잘못 균형을 잃으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지지물 없이 사다리 맨 꼭대기에 서서 힘을 쓰는 일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 사다리 작업을 거의 혼자 다 했다. 큰 아이는 내가 사다리 꼭대기에 위태롭게 서서 힘을 쓰면서 걸레질을 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무섭다고 했다.


아랫 열의 청소는 벌써 끝났건만, 윗 열의 청소는 아직 멀었다. 사다리를 옮기고, 올라서서 균형을 잡고 걸레질을 하고, 다시 내려와 사다리를 옮기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다만 가을 비 덕분인지 패널이 전체적으로 그리 더럽지 않았다. 봄에는 찌든 때가 많아서 엄청 더러웠는데, 이번에는 닦아도 별로 청소한 티가 안 날만큼 더럽지 않았다. 결국 이사님 두 분이 전체적으로 살펴본 후에 윗 열 청소는 그만 하자고 했다. 


그렇게 청소를 마쳤다. 학생들의 공이 컸고, 우리 아이들도 열심히 했다. 큰 아이는 최근 키가 부쩍 커서 애들엄마와 비슷할 정도로 자랐고, 정수리가 내 입술 정도까지 닿았다. 그 키를 이용해 열심히 걸레질을 했다. 작은 아이는 손을 뻗어도 아랫 열의 아래쪽 밖에 손이 닿지 않아, 걸레질을 하기 어려웠다. 대신 나와 박자를 맞춰 내가 사다리를 오르면 막대 걸레를 올려주고, 내가 내려갈 때 막대 걸레를 받아주는 역할을 했다.


돌아오면서 사다리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사무실에 와서 걸레들을 빨아서 널고, 막대와 물통들 등 도구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량을 반납했다. 큰 아이가 친구 생일 잔치에 가야 한다고, 친구 선물 살 돈이 없다고, 대신 사 달라고 했다. 문구점에 들러 선물 값을 치르고, 큰 아이를 보냈다. 작은 아이는 애들 엄마와 시간을 맞춰야 해서 나와 좀 더 있었다. 작은 아이까지 애들 엄마에게 보내고 집회를 갔다.


100만 인파


시청 역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인파로 가득차서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광화문 방향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도무지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길을 찾아 계속 움직였는데, 간신히 좀 이동이 가능한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역사 밖으로 나왔더니 또 인파로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밀고 밀리는 와중에 간신히 사람들을 만났다.


학생운동 시절부터 운동을 20년 넘게 했는데, 이런 인파는 처음이었다. 와! 오늘 진짜 사람 많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로 그럼 뭐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경찰이 만들어 놓은 놀이터 안에서 잘 놀다가 돌아가면, 저들이 과연 눈이나 껌뻑할까? 과연 박근혜가 국민이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려올 생각을 하기나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수많은 인파가 각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투여해 이 좁은 공간에 발디딜 틈 없이 모였지만, 그 인간은 "그래서 뭐?"라고 할 게 뻔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차벽은 폭력이다


오늘은 두드러지는 폭력사태가 없었다. 경찰이 아예 진압 시도를 하지 않았고, 차벽도 경복궁 앞으로 후퇴했다. 지금까지 집회 현장에서 폭력은 차벽을 뚫기 위한 시위대의 시도에 경찰이 강경진압으로 맞섰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차벽은 위헌이며, 그 자체로 시민들의 정당한 이동권을 막는 불법이며, 폭력이다. 차벽을 끌어내거나 부수는 행위는 경찰의 불법을 교정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다. 법치국가에서 살아가는 올바른 국민이라면 경찰의 불법 행위를 지적하고, 바로 잡아줘야 하지 않을까?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줘야 하고,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그걸 가르쳐줘야 하지 않을까? 틀린 일을 그냥 그대로 당하고 살았으니, 지금 우리가 이 말도 안되는 미친 시대를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다행히 오늘은 차벽이 후퇴했기 때문에 눈에 띄는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경복궁 앞에 세워진 차벽을 보면서 여전히 불편했다. 100만이 모였으면 뭐하나? 밤이 되면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고, 차벽은 여전히 견고할 것이고, 경찰과 권력은 차벽 안에서 안도할 것이다. 시위대는 경찰과 권력이 "옛다 이 안에서 놀아라!"라고 정해준 범위 안에서 열심히 놀다가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100만이 모였으면 뭔가 해야 한다. 그게 뭐라도. 우린 오늘 과연 무엇을 했을까? 광화문 광장에서 문화행사를 하면 뭐하나? 수많은 시민들이 종로와 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행진하면 뭐하나? 그걸로 박근혜를 끌어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나? 나는 꼭 청와대로 진격을 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행동들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찰과 권력이 정해놓은 테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그들이 긴장하고, 그들이 최소한 우릴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차벽이 우릴 막고 있다면, 꼭 차벽을 끌어내거나 뚫어야 하는 건 아니다. 대신 차벽이 없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저들을 위협할 수 있다. 청와대로 가면 뭐하나? 지금도 들은 척도 안 하는데, 청와대로 가면 들어주나? 안 들어준다고 우리가 로베스피에르 처럼 그들을 사형에 처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집회 시위 현장에서 비폭력을 외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경찰이 이미 차벽과 물대포와 곤봉과 방패 등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은 맞지 않다. 차벽과 과잉 폭력진압이라는 경찰이 저지른는 불법 폭력 행위를 우리는 언제까지 눈감아 줘야 하나? 아니 왜 눈감아 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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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13 0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시위는 시위이고 축제는 축제이지 축제 같은 시위가 과연 최상의 시위 문화인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감은빛 2016-11-13 19:11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께서 적어주신 글도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yureka01 2016-11-13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

청와대보다 차라리 검찰청으로도 갔으면 좋겠습니다....법이 무너지는데 법부터 좀 바로 세웠으면 ㅠ.ㅠ

감은빛 2016-11-13 19:12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
저는 경찰청 점거나 봉쇄 이런거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samadhi(眞我) 2016-11-13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폭력시위가 합법이고 경찰은 시민이 다칠까봐 보호하는 본래의 역할을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감은빛 2016-11-13 19:14   좋아요 0 | URL
경찰이 권력의 개가 된지 오래죠.
아무 죄없는 시민들에게 곤봉과 방패를 휘둘렀고,
물대포를 직사로 쏘았죠.
그렇게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죠.
우리는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식당1


아이들과 들어간 식당은 국수집이었는데, 돈까스라던가 볶음밥 등의 다양한 식사 메뉴가 있었다. 큰 아이가 카레새우볶음밥을 먹고 싶다해서 작은 아이와 둘이 나눠 먹으라고 말하고 난 국수를 시켰다. 음식이 나왔는데 작은 아이가 갑자기 볶음밥이 먹기 싫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내 국수를 3분의 1가량 덜어줬다. 큰 아이도 맛있게 먹고, 나도 맛잇게 먹었다. 우리가 다 먹을 동안 작은 아이는 식당 구석 저 높은 곳에 있는 티비를 보느라 거의 먹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러차례 경고를 했으나 말을 듣지 않는 작은 아이에게, 우리는 다 먹었으니 가겠다고, 넌 여기서 티비를 보라고 말하고 일어서서 계산을 하려했다. 작은 아이는 그제서야 후루룩 재빨리 먹기 시작했다.


식당 아줌마는 우리가 거의 다 먹었을 때쯤 들어온 아줌마와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렸기 때문에 그 분들이 교회에서 만난 사이라는 걸 알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계산을 하려고 일어선 그 순간 그들이 나눈 대화가 완전 충격이었다. 박근혜와 최순실 이야기였다. 당연하겠지. 요즘 어딜가도 다 그 얘기 뿐이니.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박근혜가 불쌍하다고, 박근혜가 무슨 잘못이냐고, 영험하다는데 좀 믿을 수도 있지 뭐 이런 대화를 나누는게 아닌가! 


계산을 하고 돌아서서 급하게 그릇을 비운 작은 아이 손을 붙들고 나오면서 이 식당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음식도 괜찮고, 아줌마도 친절하고 다 좋았는데 안타깝다. 당신은 순수하게 대통령을 좋아하고, 이 상황이 안타까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이 어이없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늘 깨달아야 한다. 아이가 좋아했던 카레새우볶음밥은 이제 못 사주겠다.


식당2


칼국수는 어려서부터 참 좋아했던 음식이다. 특히 해물칼국수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동네에 정말 맛있는 칼국수 집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다른 식당으로 바뀌었다. 단골이어서 무지 잘해주던 집이었는데. 아쉽다. 몇 년 전 오이도에서 먹었던 바지락칼국수는 바지락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다 먹고 나니 바지락 껍질로 산이 하나 생기더라. 정말 맛있었지만, 그날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결국 다시 먹을 기회가 사라졌다.


동네에 생긴 들깨칼국수 집에 아이들과 함께 들어갔다. 이미 애들엄마가 아이들과 와 본적이 있는지 아줌마가 우리 아이들을 기억하는 눈치였다. 탁자가 겨우 4개인 조그만 식당. 맨 뒤쪽 탁자에 엄마와 딸로 보이는 일행이 식사 중이었고, 맨 앞 탁자엔 젊은 여성 둘이 엎드려서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자, 그 둘 중 하나가 일어나서 물병과 컵을 갖다줬다. 저 둘은 식당 아줌마의 딸이구나. 들깨칼국수를 주문하고 아이들은 당연히 티비에 눈을 고정시켰고, 나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잠시 폰을 들여다봤다.


칼국수가 나왔고, 아이들의 앞접시에 적당량을 덜어주고, 열심히 먹고 있었는데, 젊은 여성 한 명이 또 들어와서 두 여성이 엎드려 폰을 만지작거리는 자리에 앉더니 역시 같은 자세로 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딸이 셋이구나. 뒷자리의 모녀 일행이 나가고 마치 조폭처럼 깍두기 머리를 한 덩치 큰 아저씨가 들어와서 그 자리에 앉았다. 아까 우리에게 물과 컵을 갖다준 여성이 이번에도 그 아저씨에게 물과 컵을 갖다줬다. 


한참 후에 세 여성 중 한명이 고개를 들더니 "아빠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곱슬머리를 뒤로 넘긴 머리를 한 아저씨가 들어왔다. 깍두기 머리 아저씨가 반가워하며 자꾸 말을 건넨다. 이 곱슬머리 아저씨는 조금 사교성이 없는 건지, 깍두기 머리 아저씨가 귀찮은 건지 조금 건성으로 답을 한다. 뒤에 또 다른 아저씨가 들어오면서 드디에 4개의 탁자가 다 찼다. 이번에도 같은 여성이 물과 컵을 갖다주고, 주방으로 들어가 엄마를 도와 음식을 준비한다. 나머지 두 여성은 여전히 같은, 엎드린 자세로 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주방으로 들어간 여성의 자리에 곱슬머리 아저씨, 즉 아빠가 앉았다.


식당 아줌마가 엎드린 자세의 여성 두 명에게 "아빠한테 인사 했냐?"고 묻는다. 둘 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응"이라고 작게 답했다. 다시 아줌마가 "언제 했냐?"고 "못 들었다"고 하니, 이번엔 주방에서 엄마를 돕던 여성이 인사 했다고 자기가 시켜서 했다고 끼어들었다. 저 여성이 셋 중 맏이겠구나. 식당 일을 돕는 태도나, 주방까지 들어가 일하는 모습이나, 폰만 들여다보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인사를 시키는 태도까지. 


그런데 주방에서 나온 그 여성이 자기 자리를 차지한 아빠의 무릎에 너무 아무렇지 않게 앉는 것이 아닌가. 다 큰 성인 여성이 아빠 무릎에 앉는 걸 처음 봐서 조금 충격이었다. 그는 아빠 무릎에서 앉아서 다시 폰을 들여다봤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앉는 걸 보니 맏이가 아닌가보다. 막내인가? 맞은 편에서 칼국수를 먹고 있는 작은 아이를 슬쩍 본다. 작은 아이는 무조건 내 무릎에 앉는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슬그머니 일어나 내 무릎에 앉고, 집에서도 무조건 엉덩이를 들이밀고 무릎에 앉는다. 반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큰 아이는 이제 더이상 내 무릎에 앉지 않는다. 훌쩍 키가 커서 내 입까지 닿는 큰 아이는 벌써 몇 해 전부터 무릎에 앉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 곱슬머리 아저씨가 다리 아프다고 한소리를 한 후에야 그 여성은 일어섰다. 그동안 식당 아줌마가 가족들을 먹일 음식을 준비했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 여성이 엎드린 두 여성에게 탁자 위를 치우라고 명령하고, 음식을 날라왔다. 반찬을 떠서 나르고, 밥을 옮기는 것도 모두 그 여성이 했다. 아,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여성이 마지못해 일어나서 돕는 척을 하더라. 그럼 이 사람이 막내인가. 곱슬머리 아저씨가 옆자리에 놓은 가방을 치우고 자리를 옮긴 후 아빠와 세 딸은 식사를 했다.


그날은 미국 대선 전날이어서 깍두기 아저씨와 곱슬머리 아저씨가 트럼프에 대해 한참 대화를 하다가 자연스레 최순실 얘기로 넘어가더라. 그 와중에 식당 일을 돕던 여성이 토요일에 광화문 집회에 친구랑 갈 거라고 말을 했고, 곱슬머리 아빠가 우리 가족 다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다. 주방에서 일하던 아줌마가 "그럴까?"라고 답했는데, 내가 들어온 이후로 단 한번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젊은 여성이 "난 안돼"라고 답했다. 다른 여성이 "데이트?"라고 물었고, 그 여성은 고개만 끄덕였다. 식당 일을 돕던 여성이 "언니, 광화문에서 데이트 해"라고 아무렇지도 말했고, 그 여성은 "말해볼게"라고 답했다. 아, 이 여성이 둘째였구나. 맏이도 아니고 막내도 아니고 둘째.


아, 이 가족 대화가 너무 좋았다. 함께 밥 먹으면서 토요일 민중총궐기 집회를 가자고 권하는 가족이라니! 그때 즈음 우리 탁자 위의 들깨칼국수 그릇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작은 아이가 나를 보고, "아빠 이제 면이 없어."라며 울상을 지었다. 내가 조금 덜 먹을 걸 그랬나. 집에 가서 뭔가 먹을 걸 해줘야겠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식당 아줌마가 아이들에게 아주 살갑게 인사를 한다. 이 식당 자주 와야겠다.


신뢰


일이 너무 많아서 밤을 새고 또 야근을 했다. 평소라면 밤을 새고 나서 집에 돌아와 잠시라도 자고 다시 나오는데, 그럴 수 없어서 편의점에서 에너지음료를 마시고 계속 일했다. 늙긴 늙었나보다. 몇 년 전만해도 밤새 교정을 보고 나서 에너지음료를 마신 후 차를 몰고 지방으로 취재를 가기도 했는데, 이젠 에너지음료를 마셔도 별로 소용이 없네. 믹스 커피를 두 개 쏟아붓고 찐하게 마셔도 아무 소용이 없네. 머리가 멍하고 집중이 잘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중요한 서류 작업을 완료하고 제출해야 했다. 집중해야 했다. 졸릴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웠더니 몸에 담배 냄새가 배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밤을 새고 세수조차 하지 못해 무지 씻고 싶었다. 얼른 서류 작업을 마치고, 집에 가서 씻고 면도하고 그리고 서류를 제출하러 시청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이사님이 저녁에 우편물 작업을 하러 오신다고, 미리 출력해놓으라고 조합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미지 파일로 보냈다. 컬러 출력을 하려면 다른 사무실에 가서 부탁을 해야 한다. 조합원에게 보내려면 많은 부수를 출력해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양을 부탁해도 될까? 아! 근데 그 사무실 젊은 여성 활동가들에게 부탁하려고 생각하니 지금 내 몰골이 너무 말이 아닌거다. 밤을 샜고, 세수조차 하지 못했고, 수없이 많은 담배를 피워 온 몸에서 막 이상한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홀아비 냄새 막 이런거. 그래도 우편물을 보내려면 부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번 주는 죽음의 주간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너무 많았다. 도저히 혼자 다 해낼 수 없을 만큼의 양이었다. 그렇다고 그 중에 버려도 되는 일이나,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매일 술을 마시던 내가 일 때문에 이틀이나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몇 달 만의 일인가? 아무리 바빠도 술은 마시고 다녔건만, 이번 주는 그럴 수 없었다. 


어제 우편물 작업을 도와주러 이사님이 세 분이나 오셨다. 그날 중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일이 어렵긴 하지만 간신히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 했더니, 초췌한 내 몰골을 보고 이사님 한 분이 고생이 많다고 몸보신 시켜 주겠다고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글쎄 뭐 딱히 먹고 싶은 건 없고, 그저 술이 먹고 싶을 뿐이다. 


술자리에서 신뢰에 대해 얘기했다. 이사님들은 나를 믿는다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속으로 그보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들지 마시죠! 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이자, 일터에서는 이사를 맡고 있는 이 사람들과 벌써 몇 년인가?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잠시 떠올려보니 그간 우리가 마신 술이 어마어마했구나 싶다. 


1차와 2차는 그저 그랬으나, 3차로 횟집을 간 것은 좋았다. 소주 한 잔을 털어넣고, 입에 집어넣은 회 한 조각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43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해(아! 중간에 1시간 반을 졸았구나) 엄청 피곤하긴 했지만, 술이 맛있었고, 회가 맛있었다. 


바쁜 한주가 어떻게 지나가고 있다. 오늘도 바쁘고, 내일은 무지 바쁘겠지만, 그래도 잘 해내리라 믿는다.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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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11-1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3시간 철야가 가능하다니요..ㅎ 전 학창시절에도 밤샘은 거의 못했습니다. 식당 2 참 좋네요. 식당 1에서의 말씀처럼 그렇게 무관심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박근혜를 지지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왔지요. 트럼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고 4년 동안 미국을 열심히 말아먹을 것입니다...아주 우울합니다..

감은빛 2016-11-11 14:17   좋아요 0 | URL
몇 해 전에는 50시간 이상 버틴 적도 있어요.
에너지음료와 커피의 도움 덕분이긴 하지만요. ㅎㅎ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찍은 인간들.
트럼프를 찍은 인간들이 반성을 하지 않으면,
이 사회가 좋아지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절망적이네요.
에휴! 어쩌다 이렇게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의집 2016-11-1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러면 안 가요 굳이 갈 이유가 없더라구요. 최근에 신설세탁소가 있어서 거기 갔는데 이 아저씨가 티비조선팬인지 갈 때마다 틀길래 거기 이제 안 가고 다른 데 다녀요.

울 딸은 아빠무릎에 앉지는 않지만, 중이거든요, 언제나 아빠옆에 딱 붙어서 뭘 해요. 보기 좋죠. 저는 아빠 어려워 하고 무서워했거든요. 울 남편에게 딸 태어날 때 애 안 봐줘도 되니깐 이뻐만 해 달라했어요. 사람이 참 외모만 보고 판단을 못 하는 게 울 남편은 외모보면 퉁명스럽고 저 깍두기머리아저씨처럼 사교성은 없는데 애들한테는 자상해요. 딸이 저 정도면 엄청 이뻐한 걸 거에요!

감은빛 2016-11-11 14:22   좋아요 0 | URL
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식당에 더이상 안 올거다.
뭐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하면 싸움이 날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자라면서 아빠를 싫어하는 여성들이 많더라구요.
제 딸들이 혹시라도 자라서 아빠를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될 때가 있어요.
그게 아무리 어렸을 때 예뻐해주고, 잘 해줘도 별로 소용이 없더라구요.
제 주위에 아빠를 싫어한는 여성들은 모두 어렸을 때
아빠가 자신을 엄청나게 예뻐했던 기억을 갖고 있더라구요.

뷰리풀말미잘 2016-11-1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3시간 동안 일을 하신 것도 대단하지만, 꿀잠을 마다하고 무려 3차를 달리신 님의 체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디박!

감은빛 2016-11-13 19:1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뷰리풀말미잘님.
야행성이라 밤을 새는 건 익숙한 일이예요.
다만 아침에 조금이라도 쉬어야 하는데,
쉬지 못하는 경우엔 좀 힘들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홍어와 막걸리


홍어에 막걸리를 마셨다. 쉰김치와 돼지고기 수육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먹어서 무지 맛있었다. 김치가 진짜 맛있어서 막 감탄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선배가 알려줬다. 그거 작년에 300포기 김장했던 그 김치야. 거의 1년이 다 된것 같은데. 그날 김장했던 김치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김장할 김치보다 더 많을 것 같다. 이제서야 이 김치가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그 고생을 하면서 담았던 김치인데,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겠나. 나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막걸리도 엄청 맛있었다. 톡쏘는 맛이 전혀 없이 무척 부드러우면서 감칠맛이 났다. 아스파탐이라던가 그런 인공감미료 같은 건 전혀 안 들어간 막걸리였다. 전날 저녁에 가볍게 술을 마시고, 밤새 일을 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무척 바빴다. 시계를 보니 36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있었다. 졸리고 피곤해야 할 상황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막걸리를 엄청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그 맛있는 막걸리가 다 떨어지고, 냉장고에 보니 잣 막걸리가 있어서 가져다 마셨다. 한 두어잔 마셨는데, 시큼한 맛이 나서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뭐 좀 시큼할 수도 있지 그러고 그냥 마셨다. 옆에 있던 선배가 한 잔만 먹으려고 그 막걸리를 잔에 따르다가 냄새를 맡더니, 이거 상한 거라고 말했다. 유통기한을 보니 벌써 지나도 한참 지난 술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후배가 내 어깨를 치며, 미련하게 이걸 마시고 있었냐며 뭐라고 했다. 이상하다. 좀 시큼하긴 했지만 먹을만 했는데, 결국 그 술은 버렸다. 남아잇는 다른 잣 먹걸리도 죄다 마찬가지였다. 후배가 막걸리가 없는데 소주 마실래 라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1시 혹은 2시쯤 대부분의 일행이 돌아가고, 친한 선배와 친한 후배랑 셋만 남아서 소주를 더 마셨다. 선배가 김치찌개를 끓여왔는데, 맛이 영 별로였다. 평소 음식 잘하는 사람인데, 이건 영 못 먹겠는데 싶었다. 그래서 안주 없이 소주만 마셨다. 술을 섞어 마신게 아마 잘못이었을 거다. 완전히 취해서 필름이 끊겼다. 간간히 기억이 떠오르는데, 비틀거리다 넘어지면서 전봇대에 부딪혔다. 뺨을 만져보니 살짝 부어오른데다 작은 상처가 있었다. 


오래전 막노동을 할 때, 화장실에서 타일 깨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큰 망치로 타일을 치면 타일이 깨지면서 벽에서 떨어진다. 작은 타일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서 무척 위험한 일인데,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긴팔 셔츠와 긴바지를 입어야 했다. 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반바지에 반팔 셔츠를 입고 마스크도 없이 들어갔다. 타일 조각이 튀면서 팔과 얼굴 등에 작은 상처가 여럿 났다. 그때 타일조각이 뺨을 베었을 때 났던 상처와 비슷한 느낌이다. 


머리만 김원준


출근 준비를 하면서 거울을 보는데, 작은 상처가 좀 신경이 쓰이긴 했다. 분명 사람들은 술 먹고 다쳤다고 한 소리씩 할텐데, 그런 얘기 듣는 건 좀 싫었다. 문득 머리가 길었다면 머리칼로 가릴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딱 한번 머리칼을 길러본 적이 있다. 대학 2학년때였다. 앞머리가 입술 근처까지 내려왔고, 뒷머리는 목을 덮을 정도였다. 반곱슬이라 머리카락이 길면 끝이 말려서 올라간다. 그래서 길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땐 그냥 좀 보기 싫어도 참고 길렀다. 나중에 많이 길러서 묶고 다닐 생각이었다. 그때 그렇게 옆머리와 뒷머리가 말려 올린 헤어스타일을 김원준이 하고 티비에 나왔다. 여동생이 그걸 보더니, 바쁜 아침에 드라이기를 가져와 내 머리를 손 봐줬다. 그러고 학교에 갔더니 '머리만' 김원준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여동생이 매일 머리를 손 봐줄 순 없었다. 내가 그런 걸 익혀야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되더라. 귀찮아서 그냥 다녔더니 점점 더 보기가 싫었다. 그 시절 했던 많은 일들은 다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했던 거였다. 그런데 머리 모양이 점점 더 보기 싫어지니 더 길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겨우 묶을 만큼 머리를 길렀던 거였는데,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긴 머리의 소녀


실제 사귄 걸로는 첫 사랑은 아니지만, 그 전에 만났던 여성들은 그냥 잠깐씩 스쳤던 거라고 보고, 진심으로 좋아했던 걸로 첫 사랑이라 부를만한 여자아이는 머리칼이 아주 길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아이들이 만화 라푼젤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 아이가 생각난다. 밤 12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그 아이 학교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만나, 골목길을 걸어다니며 짧은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 동전을 주머니 가득 채워 독서실 근처 공중전화 박스에서 밤새 통화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유난히 울리고, 말하는 중에 물소리가 들리기도 해서 뭐냐고 물었더니, 욕실에 들어와 있다고, 머리 감으면서 통화하는 거라고 했다. 머리가 길어서 머리 감는데 시간이 오래걸린다고 했다. 목욕 중이라는 말만 들어도 아랫도리에 변화가 일어날 만큼 혈기왕성한 고등학새이 아니었던가? 지금의 자세와 모습을 상상하려 애쓰면서 서너시간 통화를 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목욕중이었으니, 서너시간 이상 목욕을 했던 거였다.


찬 바람이 한참 불었으니 지금 이맘때였던 것 같다. 함께 손 잡고 골목길을 거닐다가 그 아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내 뺨을 스쳤다. 샴푸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부드러운 감촉이 뺨을 어루만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부드러운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머리칼을 가져와 얼굴에 부비고 싶었지만, 아직 수줍었던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함께 팔짱을 끼고 걸으면 내 팔 근육을 만지곤 했다. 나도 모르게 팔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게 되곤 했다. 그렇게 팔을 만지면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공간에서는 난폭한 고등학생이었건만, 왜 그 아이 앞에서는 그렇게 수줍어서 어쩔줄 모르는 소년이 되었을까? 그 아이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긴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을까?


긴 머리의 남자들


내 주위 남성 중에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는 사람이 둘 있다. 예전 출판사 겸 잡지사였던 곳의 기자 한 명은 늘 머리를 묶고 다녔다. 그렇게 묶은 걸 포니테일이라고 하던가? 일본 만화에서 '포니테일 모에'란 단어를 본 적이 있는데, 아, 내가 저런 머리 모양을 좋아하는 구나 싶었던 기억이 난다. 암튼 그 사람의 머리 모양은 늘 한결 같다. 술자리에서 왜 항상 그렇게 하고 다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머리숱이 적어서, 그냥 이렇게 다니는 것이 편해서 라고 답했다. 


가끔 만나는 후배는 등의 중간 정도까지 내려오는 정도로 머리칼을 길렀다. 그를 처음 만났던 10여 년 전에는 짧은 머리였는데, 몇 년 후에 다시 만났더니 머리를 묶고 다니고 있었다. 샴푸도 쓰지 않고 물로만 감으며, 머리가 길어도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 녀석에게도 왜 머리를 길르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뭐라고 답 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술자리였으니, 그 녀석과 만나면 늘 많이 마시니 기억이 안 나는게 당연하겠다. 그 녀석은 머리결이 좋아서, 머리를 풀고 있을때 뒷 모습을 보면 마치 여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키가 큰 편이긴 하지만, 날씬하니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 어느날 여럿이 같이 등산을 하는데, 길고 굵은 나무 작대기를 하나 주워서 머리를 풀고 다니더라. 눈 버린다고 제발 좀 머리를 묶으라고 갈궈도 전혀 듣지 않았다. 


노래와 책


 

요즘 친구에게 받은 이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 목소리가 참 좋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한편으로 참 가슴 벅찬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참 쓸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지만, 너무나도 불안한 일이기도 하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아픈 일이기도 하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설레임이 있지만, 왠지 슬픈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왠지 아픈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사랑을 해보고 싶다.
















시이소오님의 서재에서 보고 찜했다. 안 읽은 책도 많고, 책 읽을 여유도 없건만 이 책을 보자마자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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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1-09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께서 삼합을 드셨군요^^: 저는 맛을 잘 몰라서 홍어만 먹지는 못하는데, 삼합으로 먹으면 맛있더라구요^^

감은빛 2016-11-11 10:27   좋아요 1 | URL
네, 삼합을 먹었어요. 엄청 맛있었어요.
홍어만 먹어도 좋아하고, 홍어애탕도 좋아해요.
홍어도 좋지만, 홍어랑 먹는 막걸리가 더 좋죠! ^^

다락방 2016-11-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감은빛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이 구절이 생각나네요.

`종종 그 여자를 달로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꼭 그 마음만큼 그 여자를 달에서 도로 데려오고 싶어진다.-178쪽`

영어판에서는 이렇게 써있어요.

She teases me, irritates me-at times I could boot her into cyberspace, but then I`m just as eager to get her back again. I need her here on earth, you see. (p.120)

감은빛 2016-11-11 10:29   좋아요 0 | URL
오! 영어로 읽으니 그 뜻이 더 와닿네요.

문득 원서인 독어판은 어떨지도 궁금하네요.

인용하신 문구를 나중에 책에서 찾아볼게요.

시이소오 2016-11-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머니에든 동전이 짤랑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네요.
제 이름이 나와서 깜놀했어요. 영광입니다. ^^
프로이트와 츠바이크와 함께
즐거운 독서 되시길 ^^

감은빛 2016-11-11 1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시이소님.
덕분에 좋은 책을 만날 수 있어 고맙습니다! ^^

비공개 2016-11-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가 쓴 모든 전기들을 저도 ‘언젠간 읽을 책들‘로 정해두었답니다 ㅎㅎ

감은빛 2016-11-11 14:15   좋아요 0 | URL
저도요. ‘언젠가‘이긴 하지만, 읽으려고 사 모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