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밤, 슬픈 노래와 기억들


지난 일요일 낮에 발전소 부지 답사를 가느라 집을 나서야 했다. 전날 토요일이었으니, 당연히 술을 마셨고, 제법 많이 마셨고,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덕분에 일요일 오전은 완전히 뻗어 있었고, 알람이 아니었다면 시간 맞춰 일어나지 못할 뻔 했다. 물론 술에 취했어도 새벽에 잠들기 전, 알람을 맞춰두는 걸 잊지는 않았다.


함께 간 이사님들 중 한 분이 계속 내게 주말에 일을 시켜서 미안해했다. 그냥 한 번 말하고 말았으면 그러려니 했을텐데, 여러번 반복해서 말했고, 심지어 재미없는 비유까지 들어가며 말하기에, 정말 의식을 많이 하는 구나 싶었다. 뭐, 주말에 일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무척 추운 날이어서 밖에서 오래 있는게 좀 싫었을 뿐이다. 추위는 정말 싫으니까.


사실 일일 많이 밀려있었고, 바로 다음날인 월요일까지 마쳐야 할 일들이 있어서 답사를 다녀와서 사무실에서 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추위에 강한 바람에 벌벌 떨면서 몇 시간을 보냈더니, 따뜻한 방에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사님들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가야지 생각했던 마음과 달리 발길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혼자 있는 날엔 거의 켜지 않는 보일러를 켰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저녁도 안 먹고 잠들었다.


잠에서 깬 건 밤 10시 반쯤이었다. 씻고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선 건 11시가 넘었을 때였다. 우리 동네에서 사무실로 가는 버스 막차가 이미 끊겼을 시간이었다. 시외에서 넘어오는 좌석 버스가 있긴 한데, 배차 간격이 길었다. 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추운 날씨에 오래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는데, 이미 식당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술집들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사무실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서 먹어야지 맘 먹었다. 일단 사무실까지 걸어가겠다 맘 먹고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산 헤드폰이 없었다면 걷겠다고 마음 먹지 않고, 그냥 택시를 잡았을 것이다. 살을 에이는 바람으로부터 귀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듣고 싶은 음악을 맘껏 들을 수 있으니 사무실까지 약 30분 거리도 걸을만하다 여겼다. 폰에 노래가 많지만, 최근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에는 유독 슬픈 노래가 많았다. 겨울이라 유난히 옆구리가 시려서 그런 건지, 자꾸 외롭다 느껴지고, 슬퍼지는 감정 때문일까. 요즘 슬픈 노래를 많이 듣는다. 그중엔 실제 누군가와 헤어졌던 기억과 곧바로 연결되는, 나에게는 금지곡이나 마찬가지인 노래들도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슬픈 노래를 들으며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내 가슴을 뛰었던 게 처음이라 어쩔줄 몰라했던, 수줍었던 소년이었던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성과의 헤어짐부터 짧거나 길었던 만남들이 무작위로 머릿속을 스쳐갔다. 곱씹다보니 좋았던 기억들 보다는 아쉬웠던, 안타까웠던, 후회되는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그때 그러지 말았으면 좋았을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달랐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밤 길을 걸었다.


조금 놀랐던 건 어떤 특정한 순간과 얼굴을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여성들이 제법 있었다. 특히 고등학교와 대학교때 짧게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렇게 한꺼번에 다 떠올려 보려고 애쓴 적도 거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이름 뿐 아니라 좋았던 혹은 아쉬웠던 시간들도 서서히 잊혀지는게 아닌가 싶었다. 아직 기억이 남아 있을 때 기록을 남겨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과연 그런 시간을 낼 수 있을까? 아니 시도한다고 해도 벌써 많은 기억들이 사라졌거나 왜곡된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연애 다운 연애로 기억하고 있는 그 긴 머리의 그녀와의 즐거웠던 순간들. 그녀가 내게 장난을 치거나, 가벼운 스킨십을 하거나, 밤새 수화기를 붙들고 떠들었던 그 시간들이 마치 내 상상이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녀가 어떻게 내 가슴에 비수를 꽂듯이 상처를 주고 돌아설 수 있었을까? 아, 물론 내가 받은 상처는 그녀에게 직접 받았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에게서 받았었다. 한동안 그 친구의 말과 그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녀 본인의 생각과는 관계없었을 거라 여겼지만, 지금와서 돌아보면 정말 그랬을까? 그녀 역시 그런 생각이었지만, 차마 직접 말하지 못해 친구에게 시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요일 밤, 추운 겨울 밤, 차가운 바람에 맞서 사무실로 걸었던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사무실 근처에서 컵라면을 사고, 텅 빈, 어두운 사무실로 들어왔다. 컵라면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최신 유행 팝송을 틀어서 기분을 바꿨다. 일을 해야 했다. 더이상 슬픈 생각에 빠져 있을 순 없었다. 밤새 보고서 하나를 마무리하고 맞은 아침은 상쾌했다.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안면 인식 장애


얼마 전 전국에서 에너지 활동가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그 시간에 다른 회의가 있어서 그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 선배님이 전화해서 늦게라도 좋으니, 회의 마치고 꼭 오라고 당부했다. 거절할 수 없어서 알겠다고 답했고, 그날 긴 회의를 마치고 거의 다 끝나가는 그 행사에 갔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최근 제주도에서 내 발표를 들었던 사람도 아는 체를 해서 인사를 했다. 그런데 한 여성이 반갑게 인사를 하길래, 나도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이 여성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잠시 후 이 여성이 내게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못 만났나보다. 언젠가 강의를 갔을 때, 지역 담당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암튼 기억은 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간 누군가를 알아보지 못해 곤란했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떠올리기도 어려운 일이다.


제일 심한 사례가 엄마와 여동생을 못 알아본 일이었다. 동생은 회사 다닐때 화장을 진하게 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에 동생이 타고 있었다. 내가 손잡이를 잡고 서있던 위치에서 조금 뒤에 앉아 있었다. 동생은 내가 버스에 오를 때부터 나를 알아봤고, 내가 자신을 쳐다보면 아는 척을 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얼핏 스쳐보았을테지만, 동생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 버스가 종점 근처인 우리 집 앞까지 와서 내릴 때까지. 아니 버스를 내려서도 동생이 뒤에서 내 등을 짝! 하고 때리며, "오빠야!" 하고 부를 때까지 못 알아봤다. 아니 목소리는 분명 동생 목소리임을 알아봤지만, 그 화장한 얼굴이 동생임은 얼굴을 보고도 못 알아챘다. 


엄마를 못 알아본 것도 비슷하다. 휴일이었고, 내가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동안 엄마는 시장을 가셨다. 집으로 전화해서 짐이 많으니 시장으로 나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옷을 주워입고 시장을 향했다. 재래시장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엄마를 보고서도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옷이어서 그랬을 수도, 엄마 역시 집에서와 달리 조금은 화장을 하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암튼 못 알아봤다.


언젠가 전유성씨의 딸이 "아빠가 딸을 못 알아본다."고 "아빠한테 90도 인사도 받아 봤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누군가 인사를 하는데, 모르는 사람이라 90도로 인사했다고.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어 화장하고 다니는 딸들을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제발 그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소설 쓰기















혼자 살다보니 심심하다는 생각을 요즘 새삼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빠서 심심해 할 여유조차 없었는데. 대개 일주일에 이틀을 아이들과 보내고, 이틀 정도는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마시고, 이틀은 새벽까지 야근을 한다. 나머지 하루 정도를 집에서 혼자 쉬는데, 이런 날은 거의 하루 종일 잔다. 그러니 심심해 할 틈이 없었던 게 맞는데, 요즘은 한창 급한 일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해서 야근을 평소보다 덜 하고, 술 마시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좀 줄어들었다.


혼자 집에 들어가도 역시 술을 마신다. 다만 술 마시면서 뭘 하느냐가 문제다. 대개 영화나 미드를 틀어놓곤 하는데, 것도 자주 보면 볼 것도 없고 지겹다. 책을 읽기도 하는데, 요즘은 날이 추우니 책을 읽다보면 자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는 건 동시에 하기 어렵다.


어느 밤 혼자 집에 있던 소주와 맥주를 다 마시고, 술을 더 사러 가기에는 이미 많이 마셨는데, 잠은 안 오는 날, 옛날에 썼던 소설들을 찾아 읽었다. 대개 유치했지만, 그래도 더러 재밌는 것도 있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혼자 골방에 처박혀 있었던 게 몇 달이었던가? 단편을 십여편 완성했고, 쓰다가 만 단편은 그보다 두세배는 많았을 것이다. 장편을 구상하고 시도했던 게 세 편이었고, 구상만 하고 시도도 못 한게 두어편 있었다.


다시 소설을 써봐야지 생각했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단편은 뚝딱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간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쌓았으니, 이야기꺼리도 많을 것 같다. 근데 어쩐지 단편은 재미가 없고, 장편을 쓰고 싶다. 이전에 구상했던 걸 다시 살려서 써도 좋겠고, 아니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 그 날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이런저런 구상도 해보고, 예전에 끄적여 놓은 설정들도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금방 글이 만들어 질 것 같았다.


다음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려고 해봤다. 장편을 하려면 이야기와 인물들을 만들어야 하고,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런저런 조사나 취재도 해야 하니, 바로 시작할 수는 없고, 그냥 간단하게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봤다. 확실히 예전에 오래 붙들고 있었던 기본이 있어서 묘사는 어느 정도 쓸만 하더라. 다만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건 역시 쉽지 않더라. 제대로 쓰려면 다시 골방에 처박혀서 노력 꽤나 해야겠지.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재미있는 장편 하나 쓰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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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6 08: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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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