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합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정당에 요새 말로 단 1도 기대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유한국당과의 야합 소식을 듣고 조금 놀라기는 했다. 그럴 줄 몰라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빨리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혹은 이렇게 천박하게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싶어서였다. 그래. 뭐 애초에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정치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을 뿐이다.


국회


정말 정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일이 많기만 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어떻게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는지.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은 정도로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떻게든 이걸 해결해보려고 여러 관계부처 공무원들을 만나봐도 답이 없다. 정말 시민운동 판에 첫 발을 디뎠던 거의 20년 전쯤부터 생긴 공무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새삼 활활 타오른다.


어제는 국회의원을 찾아갔다. 공무원들이 도무지 해결해 줄 수 없어 보이니, 이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이 의원이 정말 이 판에서 가장 실력있는 보좌관들을 모았구나였다. 두 분 모두 나와는 몇 차례 일로 만났던 분들이라 그들에 대한 신뢰는 당연했고, 어제 다시 한 번 그 분들의 내공을 확인했다. 두 번째는 이 일이 내 판단과 달리 생각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보좌관들은 해당 의원을 통해 최대한 빠르고 원활하게 이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믿을 수 밖에 없지만, 상황이 어렵다는 느낌이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눌렀다.


같이 방문했던 이들과 국회 정문을 나오는데, 녹색당 당원들과 마주쳤다. 아까 낮에 긴급 기자회견 소식을 들었던 터라,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내가 의원회관 안 따뜻한 실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그들은 추위 속에서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기자회견에 늦게라도 온 거라고 여겼지만,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거듭 사과했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막 헤어지려던 참이었지만, 선거제도 개혁에 몇 년째 투신 중인 하승수 대표는 이 강추위 속에서 천만 밤샘 농성을 하겠다고 선언했단다. 순간 머리 속으로 그의 활짝 웃는 표정과 단호한 표정이 겹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그 추위에 노숙을 하고, 누군가는 그 추위에 오체투지를 하다가 경찰에 길이 막혀 차디찬 바닥에 엎드린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는데, 나는 이제 아이들을 만나 따뜻한 집으로 들어가려 하니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미 시간이 많이 늦어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했다. 작은 아이는 공동육아 방과후교실에서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이미 곧 선생님 근무 시간이 끝나기에 내가 돌아갈 때까지 선생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먼저 집으로 가서 언니랑 기다리라고 얘길 했는데, 계속 고집을 부렸다. 결국 언성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께 너무 폐를 끼치니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아주 살짝 울음이 맺힌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치


아이들은 만나자마자 맛있는 걸 사달라고 했다. 늦은게 미안해서 그러자고 했고, 예전에 한 번 갔던 초밥집을 향했다. 아이들은 최근 연어와 초밥을 좋아했고, 그 집 연어회가 비싸긴 하지만 그나마 조금 저렴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메뉴판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아마 사장이 바뀐 모양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전체적으로는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많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계속 뭔가 바뀐 점들을 찾아냈다.


연어회와 초밥 가격을 보고 조금 망설였지만, 일단 주문했다. 추위에 떨다 들어와서 따뜻한 사케가 먹고 싶어서 그것도 주문했다. 그러고 나니 가격이 엄청나다. 어제 받은 강사비를 떠올리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야. 강사비의 절반 이상을 써버렸지만, 그래도 애들 입에 들어가는 거니까. 나도 먹고 싶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


추위


오늘 아침은 정말 추웠다. 작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차가운 바람에 온 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느꼈다. 손발이 시린 것도 괴로웠지만, 특히 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작년 겨울 방한용으로 구매한 헤드폰을 다시 꺼낼 때가 왔구나 느꼈다.


올 봄 이사오기 전에 살던 집은 작은 아이 학교 바로 앞이었다. 아이 걸음으로 교문까지 5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사 올 때 제일 고민도 작은 아이 학교가 너무 멀어지는 것이었다. 큰 아이 학교도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녀석은 이제 중학생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사 후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는 날엔 매번 작은 아이 손을 잡고 학교를 같이 갔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너무 멀다고 투정을 많이 부렸다. 우리 집에 오는 날엔 아이들이 늦게 잠드는 경우가 많았고, 아침에 늦게 일어났고, 학교 지각을 간신히 피하느라 뛰는 날도 많았다. 또 큰 아이도 이런저런 불만이 많았다.


결국 애들 엄마와 상의해서 주중 하루, 주말 하루로 정했던 애들 만나는 날을 아예 금,토로 정했다. 애들이 우리 집에서 학교 가는 걸 너무 힘들어해서였다. 그러다 애들 엄마 사정으로 정말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설마


학교 후문 앞에서 아이와 뽀뽀하고 헤어진 후, 아이가 현관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주변에 역시 애들 뒷모습을 지켜보는 엄마들 사이로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내리막길을 걷는데, 앞에 유모차가 혼자 있는 모습을 봤다. 설마 애가 있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유모차를 지나치며 살펴보니 두꺼운 옷과 목도리 사이로 아이 얼굴이 보였다. 엄마가 어디 있겠지 하고 주위를 살폈는데, 반경 10미터 이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금방 든 생각은 저 후문 앞에서 아이들 뒷 모습을 쳐다보며 추위를 견디는 엄마들 중 하나가 이 유모차 아이의 엄마겠지 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 다음 의문은 왜 저기까지 유모차를 데려가지 않고, 여기 홀로 두었을까? 였다. 아이는 아마 잠든 것 같았다. 움직임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 아이 엄마가 나타날 때까지 잠시 곁에 있어야 하나 고민했다. 아직 출근시간 여유는 있었지만, 오전 중에 마쳐야 할 일이 여러개라 마음이 바빴다. 게다가 돌아온 아이 엄마가 나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지만 결국 유모차를 두고 돌아섰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만났어















요즘 버스정류장들 옆에는 천막이 생겼다. 바람을 피해 그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라는 배려였다. 여름철 교통섬과 횡단보도 앞에 설치한 큰 양산처럼 생긴 그늘막과 함께 큰 돈 들이지 않으면서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시도로 보인다. 다만 그 천막에 적힌 문구가 조금 거슬렸다. "따뜻한" 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저 안에서 바람을 피하면 바깥보다는 조금 덜 춥겠지만, 따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따듯한지 아닌지 확인해볼까 싶어 들어가 보려다가 참았다.


그러다 버스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만났다. 아니 그는 나를 보지 못했으므로, 누군가를 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입김을 내면서 종종 걸음으로 정류장으로 다가왔다. 나는 정류장 구조물 밖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다가 인사를 할까 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는 그새 정류장 앞에 서있던 버스에 올랐다. 그의 일터 위치를 알기에 조금 의아했다. 오늘은 사무실로 가지 않고 어디 다른 곳에 외근을 가는 건가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와 함께 했던 몇몇 순간들이 떠올랐다. 다들 놀라서 어쩌지 못하던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해결했을 때, 그가 나에게 보냈던 감탄의 표정. 그 표정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늦은 밤까지 불을 피워놓고 이런저런 고민들을 나눴던 순간. 그가 내게 건넸던 몇몇 칭찬들. 생각보다 떠오르는 기억이 많았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그가 소위 정말 잘나가는 위치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참 세심하고 배려 깊고 매사 꼼꼼하게 잘 챙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냥 일 잘하고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근데 그가 몇 가지 일을 두고 내게 칭찬하거나 감탄했을 때부터 그를 대하는 내 마음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의 웃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물론 이 감정은 연애감정은 아니다. 그저 호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그리고 난 이 감정을 키워서 남편과 아이가 있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입장이 되고 싶진 않다. 다만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한 순간 그와의 몇몇 추억이 떠올랐을 분이다. 그렇다. 그저 누군가를 만났을 뿐이다. 그저 누군가를 스쳐 지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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