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리더십
김호진 지음 / 청림출판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 '미시사'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인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시민들의 일상을 시대별로 엮은 책이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 책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밥짓고 빨래하고 노동하는 등의 소소한 일상사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배우지 않은’ 역사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역사를 눈앞에 두고 ‘역사 인식’에 대한 오래 전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불현듯 맞닥뜨린 상황이지만 이런 작은 경험 속에서도 역사를 기술하는, 또는 보는 관점이 적지 않게 드러나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왕조 사관과 민중사관이 그것입니다.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관점의 차이)에 따라 결과물(역사 기술)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왕조(영웅)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한 민중은 피동적인 존재로 각인되고, 결과적으로 민중은 영웅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 민중의 분출되는 요구와 상황의 숙성이 특정 인물(영웅)로 하여금 역사적인 성취를 이루지 않을 수 없도록 추동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주된 역할을 전자에서는 영웅이 수행하는 반면 후자에서는 그 역할을 민중이 대신합니다.

과거 정통성을 상실한 정권이 역사를 지배이데올로기의 억압적 강제 수단으로 파악해 온 이후 우리 역사관은 국정교과서 수준을 전혀 넘지 못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런 강제와 억압이 오히려 시민의식을 고양시키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통제를 강화할까‘ 하는 의문 속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려는 일군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역사적 진실이 세간에 떠돌게 되었습니다. 민중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한 책의 출간도 있었습니다. 그 책이 인식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불러온 것은 당시 시대상을 적실하게 반영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역사를 정의해 왔습니다. 최근 우리 학계의 노 교수는 역사를 일컬어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같은 역사라도 전혀 다르게 기술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기술된 역사가 후대에 정사로 자리매김되고 계속적으로 학습될 것을 생각하면 역사를 정의한다는 것의 중대성을 어림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이데올로기에 이용되지 않는 시민적 생활상과 시대상을 반영한 역사책이 기술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야 역사가나 우리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비판과 역사적 성찰을 거듭하고 계신 노 교수와 소장학자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최근 나온 어떤 책을 읽으면서 이런 부류의 책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리뷰로서야 그 책에 한정해 읽은 후의 소감을 쓰면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겠지만 일종의 결벽증이라고 할 수 있을 개인적인 제 책 선택기준에 비추면 한눈팔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보다 솔직한 표현이겠습니다. 다양한 방면의 책을 읽지만 ‘처세서’라든지, ‘비현실적인(듣기 좋은 말로 도색한) 에세이’라든지, ‘상투적인(농후한 마초이즘과 말초적인 자극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소설’이라든지, ‘경박한(역사의식 없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서’ 등 본질은 가린 채 현상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책을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책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고집이 만든 결과입니다.

이런 독서 습관에서 『대통령과 리더십』은 위에서 말한 처세서와 역사서의 경계 어디쯤에 어설피 놓여있는 책과 다름없었습니다. 마음이 바뀐 것은 여전히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 그 책 속에 있다는 것과 그들이 몸소 겪은 세월에 동시대인으로 엮인 내 삶을 어쩌면 지금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또 평가할 수 있지 않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현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 역학 구도를 보고 있노라면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지난 세월에 대한 자기평가가 계속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과 리더십』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과 노사정 위원장을 지낸 김호진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썼습니다. 그는 콤플렉스를 권력추구의 주요동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승만에서부터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태생적 또는 상황적 콤플렉스를 대의에의 열정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성장과정과 시대상황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마치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엮인 편직물처럼 그려내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부분이 이 책의 최대의 강점이 될 것 같습니다. 콤플렉스라고 하면 거칠게 말해서 좌절된 의식이 배태한 병리현상으로 보는 기존의 관념을 일정부분 돌려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권력추구의 동인에 한정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콤플렉스가 그들이 권력을 얻는 데 있어서 순기능으로 작용했다는 저자의 설명이 다소 도발적으로 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싶은 대의에의 열정이 정치인을 권력의 세계로 유인하는 것이다. 물론 정상배같은 아류 정치인은 당연히 제외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콤플렉스가 대의를 추구하는 열정과 결합될 때 권력충동을 유발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를 등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권력동기 = f(콤플렉스*대의에의 열정) + e
(f는 함수를 뜻하고, e는 여타 요인을 뜻한다.)」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들의 콤플렉스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역대 대통령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꼼꼼히 추적함으로써 그들이 지닌 콤플렉스를 특정 용어로 단순화하고 있습니다. 유형별로 구분하면, 이승만은 선지자적 우월 콤플렉스를 지녔고, 박정희는 가난의 한, 친일 및 좌익 콤플렉스, 전두환은 주변인적 콤플렉스, 노태우는 편모 콤플렉스, 김영삼은 외아들 콤플렉스, 김대중은 출생 콤플렉스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콤플렉스가 권력욕구와 결합된 후 그들의 리더십은 전혀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저자가 언급한 역대 대통령 중에서 몇몇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과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박정희는 관용의 빈곤이라는 칼을 품은 교도적 기업가형의 리더십을 통해 빵과 자유를 바꾼 근대화의 기수라는 평가를 남기고 10.26사태를 맞아 피살되었으며, 전두환은 군사적 전투주의로 무장한 저돌적 해결사형의 리더십을 강제하다 6월 항쟁에 직면한 후 5공 청문회와 백담사 유폐, 투옥을 반복했습니다.

김영삼은 감각적 판단에 기초한 공격적 승부사형의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정치적 돌파에 능할 수 있었던 반면 경제환란의 주범으로 청문회에 오르고 아들과 측근 또한 투옥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김대중은 완벽주의를 내장한 계몽적 설교형의 리더십을 통해 환란을 극복하고 햇볕 정책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화에 기여한 반면 대북 관련 특검과 아들과 측근의 투옥 등 악재가 있었습니다.

우리 현대사엔 7명의 대통령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굳이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느 나라와 같이 산에 얼굴 조각이 새겨지고 시민들 사이에 그 이름만으로도 큰 울림을 동반하는 대통령은 아직 없습니다. 저자 또한 그 점을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역대 대통령의 행적(성과와 오류)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을 것입니다. 저자가 각 장에서 특정 대통령을 조명하면서 대통령의 콤플렉스와 그 콤플렉스의 발현, 리더십 특성을 순차적으로 기술한 후 말미에 '이승만의 교훈', '박정희의 교훈' 하는 식으로 특별히 별도의 절('.....의 교훈')을 마련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에서, 그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본 실패는 쓰리고 아픈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철을 밟지 않는다면 그 실패 속엔 그것과 반대되는 이름이 기록되리라는 여지가 담겨있습니다. 희망은 그 지점에서부터 피어오를 것입니다. 

처음 우려와 달리 실패를 담담히 드러내고 있다는 데서 이 책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주례사 비평'과 '인정비평'이 한데 뒤섞여 어지럽게 춤을 추는 세상에서 스스로 함량미달임을 선언하는 일이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균형감각을 잃은 많은 책들의 시종이 그랬습니다. 모쪼록 독자들에게 또 다른 가치가 발견됨으로써 이 책이 많이 읽혀지는 책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저자가 시민과 그 시민들이 리더를 세우고 그 리더를 통해 이루려는 시대적 소명과 가치 등에도 깊은 시선을 가져가 주길 바랍니다.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그럼으로써 그가 이 책, 『대통령과 리더십』에 필적할만한 또 다른 책을 내주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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