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출간 전 연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7화










길거리 성희롱이 없는 세계 






여자로…… 산다는 건 지독한 비극이다. 그렇다. 도로 건설 인부・뱃사람・병사・술꾼 들과 뒤섞이고 싶은, 즉 주위 배경에 녹아들어 이름 없는 이가 되어 듣고 싶고 기록하고 싶은 나의 불타는 욕망은 내가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좌절당하고 만다. 여성은 늘 공격과 폭행의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내 불타는 관심은 종종 그들을 유혹하려는 욕망으로, 또는 내게 다가오라는 초대장으로 오해받는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그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이에게 내 깊은 속내를 터놓고 싶을 뿐인데.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 자고, 서부로 여행을 떠나고, 자유롭게 밤거리를 거닐고 싶다는 것이 내 바람이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시인, 소설가)



 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서 나는 인간이고 내 이름은 예쁜애가 아니다.

 나는 거리를 평화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 하늘에는 태양이 빛나고 내 심장은 물을 뿜는 소화전 앞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박자를 맞춰 뛴다. 우리는 같은 생태계에 있다. 우리의 몸은 우리 사이의 온기에 따라 떠오르듯 도시를 떠다닌다.


 나는 그 구역의 마법에 젖어 들기를 멈추고 콘크리트 분수의 물놀이에 끌려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아이들에게 더 가까이 걸어간다. 우리는 다시금 웃음을 교환한다. 밀도 높은 여름 공기 속 아지랑이 같은 한순간, 옆집 사람이 자기 집에서 나와 아이들과 나를 에워싼 묵직한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와도 내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나중에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없이 그의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를 보고, 그도 나와 같이 따뜻한 생태계에 있음을 안다. 나는 우리 모두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그 순간을 함께 누리자고 그를 초대한다. 그는 초대를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주는 우주를 느끼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여 우리에게 합류한다. 잠시 후, 나는 자신감 넘치는 큰 보폭으로 아이들과 이웃들을 지나쳐 기차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나는 내 공동체의 다른 일원들과 교류할 수 있고,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변화무쌍한 도시의 화려함을 감상할 수 있다. 내가 한 남자에게 웃음을 보이면, 그는 내 몸에서 발산하는 즐거움을 느낄 뿐 굳이 내 몸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은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고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인사를 나눌 수 있다.



 또는 나는 내 영혼과 혀끝을 무겁게 얽어맨, 폭력을 예방하려는 그 지긋지긋한 계산 없이 옆집 사람에게 (마음이 내킬 경우) 말을 건넬 수 있다. 내 하루를 잠시 멈추고 그 남자에게나 아무 남자에게라도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자신과 주위 세계에서 어떤 것을 가장 사랑하는지 물어볼 수 있다. 나는 대화가 끝난 뒤에 그가 그의 복잡한 인간성에 대한 내 관심을 나를 공격해도 된다는 초대장으로 받아들일까 봐 겁내지 않아도 된다. 그는 내 경계를 존중할 테고, 내가 그에게 자신을 내주기 전에 돌아서면 상황은 끝날 것이다. 내가 무관심을 드러내면, 내 대응은 존중되며 피곤할 만큼 집적거림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하루 중 아무 때나 아무 옷이나 입고서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곳을 나설 수 있으며, 길거리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남자 파트너를 지어내지 않아도 된다. 내 여성성을 폭력의 초대장으로 오인할 남자와 마주칠 위험을 피해 택시를 타고 귀가해야 한다는, 가끔은 그냥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 압박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안전과 파산을 택할지, 또는 내 안전을 건 채 이미 파산 직전인 지갑을 살릴지를 두고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서, 나는 그저 거리를 걸어 다니는 다리가 아니다. 잠재적 정복 대상이 아니다. 나는 내 인간성의 모든 면을 존중하는 관심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고, 피곤하거나 약속에 늦었거나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냥 자리를 뜰 수도 있다. 나는 복잡한 감정, 동기,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한나 기오르기스Hannah Giorgis

 한나 기오르기스Hannah Giorgis는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 조직가 겸 교육자다. 자신의 블로그 ethiopienne.com에 글을 쓰고, 훨씬 해방된 세계를 상상하며 그것에 관해 긴 대화를 나누고, 에티오피아 음식을 만들고, 아프리카계 영국인 배우인 이드리스 엘바IdrisElba 보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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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 2017-05-16 2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겐 꿈에 그려야할 유토피아지만 누군가에겐 아주 평범한 일상이겠지
 

 

 

 휴머니스트 출간 전 연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6화 

 

 

 

 

 

강간 문화가 사라진 미래에서 알립니다

 

 

내용 21세기 미국의 강간 문화를 발굴한 역사학자와의 대담 발췌

문서 분류 기밀

 

 

 

 음, 처음에 우리가 느낀 것은 혼란뿐이었습니다. 혼란 자체였죠. 그 돌림병의 규모를 다룬 고대 정부의 보고서에서 통계를 접했는데, 그 수치가 분명히 충격적이었어도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미국 여성은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강간당한다.” 알았어, 어이쿠. 그렇지만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정말 몰랐죠. 그러다 곧 그 말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현대 언어에는 없는 ‘강간’이라는 단어가 확실히 우리한테 낯설죠. 형사법전과 안내서 들을 읽고 나서 그 단어를 이해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놀랄 만큼 빈약해요. “강제 삽입.” 이게 도대체 어떤 모양이지? “합의 없는 섹스.” 말도 안 돼. “성폭행.” 섹스가 어떻게 폭행의 도구야? “성폭력.” 말 자체가 모순이잖아. 이 말은 끔찍하다기보다 그냥 상상이 안 됐어요.

 

 

 

 

  생존자들의 설명과 시각적 묘사를 접하면서 윤곽이 잡히더군요. 그냥 폭력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지요. 힘, 강제, 공포도요. 어차피 지금 우리 문화도 유토피아는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포를 느꼈어요. 그래도 난감함은 통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침묵과 수치심이에요. 그 끔찍한 일이 그렇게 자주 일어났다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생존자들은 왜 그렇게 적을까?

 

 

  우리의 질문은 단순했어요. “왜?” 기본적인 질문인데도 답을 찾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강간이 잘못인 건 맞는데 왠지 이해할 수 있다는, 심지어 어쩔 수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포자기적인 태도가 흔했죠. 게다가 “어떻게 하면 강간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요령이 넘쳤고, 술 마시고 취하지 않는 법이니 강간 호루라기니 데이트 강간 약물을 감지하는 매니큐어까지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자포자기에 맞서는 ‘페미니스트’들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좀 봐 봐, 꼭 이럴 필요는 없어. 우리가 바꾸려고 하면 바꿀 수 있어.”라고 하면서 강간범과 주변인의 책임을 부각하고 ‘합의 교육’의 필요성을 외쳤죠. 어쨌든 실제로 정확히 누가 왜 타인을 강간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려 주는 단서는 거의 찾을 수 없더군요.

 

 

  이 문화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가를 깨달은 순간이 기억납니다. ‘합의는 섹시하다’고 외치는 사회운동가들의 캠페인을 발견했을 때였어요. 그들은 순전히 선의에서 그런 표어를 담은 포스터와 티셔츠 들을 내세웠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해해 보려고 한창 머리를 쥐어뜯던 참에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저는 합의가 조금도 섹시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요즘 ‘합의’ 같은 단어는 법전에나 쓰잖아요. 안 그래요? ‘섹시함’과는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 단어죠. 그리고 당시에도 그건 똑같이 진리였다는 게 중요합니다. ‘합의’는 공식성과 같은 함의를 지니죠. 우리가 아는 한 이 단어가 사적 인간관계의 영역에서 쓰인 경우는 섹스가 유일했어요. 그리고 오늘날처럼 그 말은 허가를 뜻했어요. 그 이상은 전혀 아니죠. 이런 포스터들에는 남자들더러 파트너에게 “당신, 이거 괜찮아요”라고 물어보라고 써 있어요. 아시겠어요? 상상이 되냐는 말입니다.

 

 

 아니, 당연히 상상이 안 되겠죠. 왜냐하면 요즘 기준은 합의가 아니라 욕망이니까. 그리고 욕망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어요. 말하고 요구하고 애걸하는 게 욕망이니까.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욕망은 아마 거기 없을 겁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이 사람들이 도대체 실제로 섹스를 해 본 적이나 있나 싶더라고요. 저 지금 진지합니다! (웃음) 무슨 사소한 애로 사항도 아니고, 섹스가 그냥 ‘괜찮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하찮지만 당장급하게 필요한 뭔가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 느낌이잖아요. 칫솔이라도 빌리듯. 바로 그 순간, 그 생각이 머리를 탁 쳤죠. 고대인들이 이런 캠페인을, 하고많은 표어 중에서도 하필이면 합의를 외치는 캠페인을 했다면, 아, 그들의 섹스 문화 전반에 우리가 지금까지 깨달은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는 풍덩 뛰어들었어요. 고대인들의 성적 관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모든 것을 연구했습니다. 공식 성교육 프로그램부터 영화, TV 프로그램, 대중가요, 포르노, 광고는 물론이고 그들이 온갖 데서 흡수하는 비공식적 메시지들까지 다요. 소셜 미디어 사이트를 발굴하고, 페이스북 글타래를 샅샅이 뜯어보고, 며칠씩 유튜브의 개미굴에 빠져 헤매기도 했어요. 그래서 작업을 거는 게 뭔지, 자빠뜨리는 게 뭔지 알아냈어요. 박는 것과 박히는 것도 알아냈죠. 걸레랑 선수의 이중 잣대에 관해서도 알아냈어요. 처녀성은 잃지만 총각 딱지는 뗀다는 것, 섹스가 흔히 제로섬 게임이 된다는 것, ‘걸레’라는 딱지를 피하려면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도 알아냈고요. 이 모든 정보를 부지런히 분류하면서 말 그대로 계산 프로그램으로 총합을 구하려던 우리는 그게 불공정한 게임임을 알게 됐어요. 수치에 관해 알게 됐지요. 여자들한테 ‘섹시함’을 요구하고는 섹시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경멸하는 이상한 모순의 문화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냈어요.

 

 

 그 문화가 섹스에 대한 묘사로 흠뻑 젖어 있으면서도 막상 실제 섹스에 관한 이야기는 몹시 불편해한다는 것, 성 해방을 찬양하면서도 두려워한다는 것, 섹스라는 게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까지요. 제 말은, 보고서를 읽었으니 아시겠죠. 아주 매혹적인 내용이에요. 마지막에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을, 끔찍하게 건조하고 학술적인 결론을 내렸어요. “여자들은 갈수록 높아지는 성적 주체성을 누렸어도 여전히 성적 문지기 구실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남자들의 성은 생래적으로 포식자의 것으로 여겨졌고, 여자들은 자신의 성이 (젠더 불평등과 성을 둘러싼 수치심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남자의 성을 자극하거나 자극하지 않도록 알아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런 기조였지요. 우리가 옳았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저는 21세기의 성 문화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그게 모든 면에서 우리 문화와 정반대라는 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 연구에서 제가 얻어 가는 제일 큰 교훈은 그때가 아니라 지금 살아서 정말 고맙다는 거라고요. (웃음) 이 말은 반만 농담이에요. 우리는 오늘날 문화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정확히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몰라요. 아마 영영 모르겠죠. 대충돌로 사라진 수천 년의 역사 중 복구된 건 21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대한 기록뿐이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결국 그 문화가 아주 급격히 변형되어 강간이 당시에 정상이었던 것만큼이나 오늘날에는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의 산 증거죠. 심지어 이미 고대에 그 변화가 시작되는 조짐을 발견할 수 있어요.

 

 

우리가 그 보고서를 대중에게는 공개하지 않기를 권한 건 그래야 옳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생각들은 ‘역사의 잿더미’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최선이니까요.

 

 

그것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보면 놀랍습니다. 그냥 그 단어를 보세요. ‘섹스’라는 말이 과학적 맥락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쓰이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우리의 구어는 21세기의 ‘공감’과 ‘열락’이 어원이죠. 고대어로 옮기자면 ‘다른 사람이 느끼는 쾌락을 느끼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고대인들이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골치깨나 아플걸요! 그들은 섹스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는 말보다는 섹스를 모호하게 미화한 단어를 더 좋아한 것 같아요.

 

 

그러니 쾌락을 대놓고 인정하는 것이 아마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겠죠. 그리고 개인의 쾌락이 실제로 섹스 상대에게 달렸다는 개념, 그게 섹스의 정의에 내재한다는 개념, 음, 이건 그들에게 가장 깊이 뿌리내린 성에 관한 가정들과는 정반대죠. 우리한테는 기괴하게 들리지만, 그들은 사회적 제약을 진정으로 벗어나면 이기적이고 착취적인 것이 성의 본모습이라고 믿었나 봅니다.

 

 

 

(...)

 

 

마야 듀슨베리Maya Dusenbery

 

 

마야 듀슨베리Maya Dusenbery는〈페미니스팅Feministing〉의 편집장이다.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살며 섹스에 관해 글을 쓰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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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스트 출간 전 연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5화 

 

 

 

 

축하합니다, 사람입니다

 

 

 

 

나는 머리에는 롤을 말고 엉덩이에는 아기를 매단 채 맨발로 부엌에 서서 스크램블드에그를 익히는 중이다. 남편은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며 소파에 뻗어 있다. 개가 물어 가면 속이 시원하겠네!

 

 

 

길들여지는 삶이란, 참. 내 학위는 어디로 가 버렸지? 내 꿈, 내 소망, 내 염원은? 아, 냄비와 팬에서 닦은 기름이랑 싱크대 하수구로 빨려 내려가고 있네. 내가 ‘주저앉자’, 사람들의 오지랖은 이제 내 아들한테로 옮겨갔다. 사람들이 그 애를 보고 말한다. 머리 안 잘라 줬어? 애가 혼란스러워하게 될 거 알잖아. 반 애들이 놀릴걸. 계집애라고 할 거야! 괜한 고집 좀 그만 부려, 얌, 네 주장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내 아기의 머리카락을, 아이의 조그맣고 예쁜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 길고 탐스러운 다발을 사랑한다.

 

 

 

나는 말한다. 그 애가 튀튀를 입게 놔둬. 그 애가 망토를 걸치게 놔두라고! 맞다, 맞다, 그 애는 남자아이다. 그리고 맞다, 보다시피 그 애는 머리카락이 길다. 엿 먹어, 자기가 원하면 마음껏 손톱에 분홍색 점을 찍으라고 해. 여자아이 머리가 좀 짧으면 어때? 치마를 입든 안 입든 남들이 뭔 상관인데? 치마 대신 나비넥타이를 하게 놔둬. 다리를 쩍 벌리고 앉게 놔둬. 그리고 엿 먹을, 데이트를 하게 놔둬! 그게 도대체 왜 그렇게 문제인지 누가 제발 설명 좀 해줘, 젠장 뭐가 문젠데 기대의 담요, 분홍색이나 파란색의 담요에 꽁꽁 싸인 마음가짐들을 이제는 풀어헤치자. 어린 마음에 우리가 어떤 씨앗을 뿌릴지에 초점을 맞추자. 조건을 깨부수자. 강요된 성, 그 우스꽝스러운 집착 없이 새 세대를 키우자. 짓밟지 말고 북돋우자. 마음을 빼앗

지 말고 선택권을 주자.

 

 

 

남자아이들이 체육관에 등록해서 총총거리며 발레를 하게 해주자. 여자아이들에게 가라테를 시키자.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해 주자!

 

 

 

나는 라이언에게 울어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여자아이가 힘이 셀 수 있는 것처럼 남자아이도 실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카딸들에게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소프트볼을 할 때 환호성을 지르고, 인생에 의문을 품고, 세상에 관해 질문할 때 대담하게 “왜 안 돼” 하면서 들이받으라고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약한 공주님이 아니라고, 슬픔에 빠진 가련한 아가씨가 아니라고, 요정 동화나 쫓아다니기에는 너무 크다고, 어떤 왕자 놈의 곁다리로 있기엔 아까운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나는 이렇게 하면 좋겠다. 아기가 아직 요람에 있는 동안 젠더화된 기대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거다. 뭐 대단한 발표라도 하듯 아기의 성별을 공표하는 건 그만두자. 텅 빈 공간으로 데려가자. 그리고 자기 식으로 결정하게, 자기 색을 스스로 고르게 해 주자. 당신의 몸에서 쫓겨나 이 냉혹한 남자와 여자의 세계로, 그와 그녀의 세계로 떠밀려오기 전에 이 존재가 젠더를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다. 생명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를 여는 것이다. 싸구려 장식과 젠더 구분 없는 축하식 말이다. 무지개, 가능한 모든 색, 자홍, 파랑, 아쿠아마린, 노랑, 황금, 올리브, 검정, 청록, 연어색, 밝은 산호색 등등의 잔치.

 

 

 

 

 

 

 

어떤 아기가 나올지 모르는 채로 아기 방의 색을 정하자.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에, 이 조그만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자. 남자아이를 원한다거나 이런, 여자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스트레스 받지 말자. 아기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데 감사하자. 이 조그만 존재를 끌어안고, 품에 꼭 안고 심장에 갖다 대자.

 

 

 

아들? 딸? 의사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면 어떨까? “축하합니다, 사람입니다!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친구들에게 알리고 페이스북 글을 써서 자랑하는 건 앞으로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하지만 딸이라고 말하는 대신, 아들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냥 내가 이 귀중한 아이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넘치는 기쁨을 이야기하자.

 

 

 

여자아이에게 자비에-프랑수아라는 이름을 붙이자. 남자아이의 이름은 페넬로페 딜라일라라고 하자. 그냥 발음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을 고르자.

 

 

 

 

(...)

 

 

 

 

 

얌벌리 M. 타바레즈Yamberlie M. Tavarez

 

얌벌리 M. 타바레즈Yamberlie M. Tavarez는 뉴스쿨 졸업생으로 문학연구 학사 학위가 있다. 활발한 네 살짜리 아이, 라이언 너새니얼Ryan Nathaniel의 엄마다. 현재 노동과 삶의 불가사의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고, 그 길에서 새로운 관점들을 발견하고 있다. 뉴욕에서 태어난 라틴계 작가・수필가・시인이다. 아동 양육, 사회 속의 성 역할, 인종, 인간관계의 동역학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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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출간 전 연재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4화 









남자에게서 자유로운 세상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난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글이야 어떻게든 쓰면 쓸 수 있을 테니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을 하는 게 더 맞겠다. 이 따위로 글을 시작한 김에 변명을 잠깐 해 보겠다. 아침에 일어날 때 심상치 않더니 결국 생리가 터졌다. 가랑이 사이로 흐르는 피를 느끼며 난 화장실로 달려갔고 피가 묻은 팬티를 손빨래해 한쪽에 걸어 놓은 뒤 샤워를 했다. 이런 아침을 맞이한 내가 지금 이 순간 써야 하는 글이 페미니스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라니. 이놈의 생리통만 사라져도 그게 바로 내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순간에 이런 거대한 글을 써야 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타이레놀을 세 알이나 먹었으니 생리통에게도 양심이 있다면 곧 잠잠해질 거라 믿는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최대한 남성과 마주치지 않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페미니스트인 내가 남성을 만나는 일은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매 순간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 나에겐 견딜 수 없는 치욕이 되는 순간들을 경험하다 보면 싸우기보다는 피하게 된다. 물론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진짜 알고 있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알고 있다고 치고 넘어가자.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사실 난 안 그런 남자를 만나 본 경험이 없으니까. 내가 게을러서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안 가 본 나라는 너무나 많고, 여행에 인생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새파란 청춘이지만 좋은 남자를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엔 너무 피곤하고 가난하다.

 

나도 한때는 남자와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다. 최고의 남자까지는 아니라도 최선의 남자를 찾아 헤매던 시절도 있고, 데이트를 하며 그들의 잠재적 가능성과 발전 가능성을 면밀히 시험해 보기도 했다. ‘페미니스트에 가까운 남성 또는 페미니스트 남성을 찾아 헤매었다. 남자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다. 리본 달린 신발을 신은 나를 보고 생각보다 페미니스트네.”라며 씩 웃는 남자가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현실은 언제나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져 온 한국 정치판의 상황을 보며 내 친구는 평생을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려던 자기 인생의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어떤 새롭고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내도 뉴스를 따라잡을 수 없다면서 말이다.

 

다시 남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 시절 나는 그나마 페미니즘이 뭔지 알고 싶어 하는 남자를 만나면 결과가 덜 절망스러울 수 있다고 믿었다. 페미니즘은 지옥에 빠진 악마들이 하는 거라고 믿는 남자를 구마기도를 통해 은사 받게 하는 일보다는 페미니즘이 뭔지 궁금해하는 남자를 붙잡고 페미니즘 강의를 하는 일이 조금 더 가능성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또한 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기특한남자와 함께하는 페미니즘 일대일 맞춤 강의는 언제나 왜 휴머니즘이 아니라 페미니즘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입 아프고 침 튀기는 열정의 강의를 거쳐 겨우 페미니즘의 정의에 대해 이해했다면 그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더 절망적인 일이 있다. 아무리 열심히 페미니즘 강의를 해도 그 남자가 남자인 친구들과 만나는 한, 우리가 함께했던 그 아름다운 보랏빛 시간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처럼 매일같이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봤지만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은 자신의 일이 아닌 언제든지 벗어 놓을 수 있는, 내키지 않을 땐 헌옷수거함에 넣어 버릴 수도 있는 모자와 같은 것이었다. 페미니즘이 내게는 세계관이자 인생관이지만, 누군가에겐 배워 두면 좋은 것 정도라는 사실을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누군가 올려놓은 페미니스트 남자 만나는 법이라는 글을 읽었다. 첫 번째 문단을 읽는 순간,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이 얼마나 가혹한지 눈물이 다 날 뻔했다. 철학이나 인문학 강좌에 가서 남자를 찾으라는 이야기로 시작해 성소수자의 인권에 관심이 많은 남성, 군대와 애국심에 집중하지 않는 남성 등 어떤 남성을 피해야 페미니스트인 남성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글이었다. 철학이나 인문학강좌에 가서 남자를 찾으라는 이야기가 아예 의미 없지는 않을 거다. 페미니즘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남자들, 즉 사고를 하지 않으려는 남자와 사고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남자들보다야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소위 진보 남성들이 저질러 온 데이트 폭력이 몇 년 전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사건이 있었으며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상세하게 여기에 적지 않겠다. 또 성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은 남성은, 알고 보면 관심만 많은 남성일 수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페미니스트 남자를 아직 만나 보지 못한 건 정말로 내가 게으른 탓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할 일이 이토록 많은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상상 속의 동물 기린과도 같은 페미니스트 남성을 찾는 일에에너지를 써야 할까? 차라리 남자 따위 버리고 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방법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모든 여성이 남자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배우는 세상이다.

 


은하선 


은하선은 섹스를 좋아하는 페미니스트이다. 여성과 퀴어를 위한 섹스 토이샵 은하선토이즈를 운영하고 있다. 다수의 섹스 토크, 토이 파티 등을 진행했고 10대 여성들의 즐겁고 안전한 섹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이기적 섹스: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그럼에도 페미니즘(공저)이 있으며, 2017년 현재 경향신문은하선의 섹스올로지를 연재하고 있다. 여성 파트너와 고양이 두 마리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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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스를 ‘빌어먹을 입자’에서 ‘신의 입자’로 만든 물리학의 전설! 《신의 입자》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70년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80년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그 뒤를 잇는 과학 고전, 1993년 출간되어 전 세계 과학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의 입자(The God Particle)>.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저자의 유쾌한 입담으로 입자물리학 2,600년의 역사를 만나보세요.


《코스모스》 곁에 두고 읽을 책

 

신의 입자

우주가 답이라면, 질문은 무엇인가?

리언 레더먼, 딕 테레시 지음|박병철 옮김




이론이 제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하다 해도,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후의 해결사는 실험이다. 이론물리학자가 상상을 펼치는 시나리오 작가라면, 실험물리학자는 그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물리학계에서는 영화감독보다 시나리오 작가가 훨씬 유명하다. ‘힉스입자’라는 당대 최고의 캐릭터에 이미 시나리오작가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가. 레더먼이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 잘못도 아닌데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 옮긴이 박병철

《신의 입자》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5명)


* 서평단 신청 방법

1. 본 게시물을 본인의 블로그나 SNS에 스크랩해 주세요. (전체 공개)

2. 스크랩 주소와 함께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를 아래 댓글로 남겨 주세요.


- 모집 인원: 5명

- 모집 기간: 2월 17일 ~ 2월 23일

- 당첨자 발표: 2월 24일 금요일 예정 (휴머니스트 서재 공지)

- 도서 발송: 발표 게시물 비밀댓글로 당첨자 정보 취합 후 일괄 발송     


* 서평단 활동 방법

1. 도서를 받으신 후, 일주일 내에 알라딘 서재와 개인 블로그 또는 SNS 1곳에 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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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19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in.co.kr/durepos/9146456

신청 이유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읽었고,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올해 안에 다 읽을 예정이므로 <신의 입자>도 집에 꼭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신청합니다/ 이번 달 도서관 희망도서로 이미 신청도 했지만, 소장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온몸으로 서평 쓰겠습니다. ‘빌어먹을 입자‘에서 ‘신의 입자‘ 소리로 나오나 안 나오나 저를 써서 실험해 주십시오(-ㅅ-)!!

북플로 스크랩했는데, 양식에 맞지 않음 알려 주세요. 고칠께요. 굽신굽신

mira 2017-02-1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facebook.com/eunsuk.rho.7
별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서 과학에 대한 두려움을 약간 떨칠수 있었어요. 입자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쓰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과학도서를 너무 읽지 않아서 이책을 올해의 과학도서로 지정해야할것 같아요

DE,*D 2017-02-21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naver.com/pinkpoint08/220940542775

물리학을 좋아하여 평소 과학서적을 자주 찾아서 읽어보게되는데요. 신의입자 책소개을 읽고 너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들어 서평단에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서평은 블로그와 알라딘에 올리겠습니다.

보노보노 2017-02-2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in.co.kr/702226135/9155821

과학 서적을 도통 손에 잡아본 기억이 없는데 최근에는 과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합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읽힌다는 추천글을 보고 도전해봅니다.

VANITAS 2017-02-2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facebook.com/sungjin.bae.56

서점 과학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보게 됐습니다. 과학 초심자에게 다소 어렵고 분량 또한 만만치 않아 구매를 망설이다, LHC 와 힉스보손에 대해 명쾌하게 쓴 <젭토스페이스>를 먼저 집어들게 됐네요. <젭토스페이스>를 읽다 보니 <신의 입자>에 도전해보고픈 용기가 생기는군요. 기회가 된다면 접해보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