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교수의 연구실에 들렀더니 참으로 멋이 있었다. 책이 꽉 차 있지는 않았지만, 텅 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한쪽에는 중국인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는 산수화가 걸려 있고, 또 작지만 좋은 글씨 족자도 드리워놓았다. 북경 유리창(琉璃廠, 리우리창)에서 구입했다는 낙관도 여러 개 서가에 얹어놓았다. 책도 그저 그런 책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한, 책갑(冊匣)에 넣은 책, 우리나라 고서 등이 이곳저곳에 있어 무언가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더 둘러보면 붓글씨를 쓰는지 벼루와 연적, 필가(筆架)도 있고, 먹으로 얼룩진 천도 있었다. 향로도 있고, 다관(茶罐)을 놓은 다포(茶布) 근처에는 찻물 자국이 진했다. 선비다운 서재의 모습이었다. 주인의 인격도 고아(古雅)하리라 짐작이 되었다.

 

옛날 선비들의 서재는 어떠했을까? 남아 있는 그림을 보면 역시 책으로 꽉 차 있지는 않다. 필요한 책만 서가에 놓여 있고, 서안(書案, 예전에 책을 얹던 책상)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만 단정하게 펼쳐져 있다. 서안 옆에는 연상(硯床, 벼룻집)이 있다. 조촐하구나! 사실 많은 책을 보고 저술하는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그 전에는 광람(廣覽)과 박학(博學)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저술을 하는 풍조가 없었다. 아니,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조차도 서재에 책을 꽉 채웠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가장 많은 저술을 했던 강진의 초당(草堂)은 좁은 곳이다. 거기에 책이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 휴머니스트·현진


 

공부하는 사람이 책을 모아두고 읽는 공간인 괜찮은 서재를 갖고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희승 선생은 한 개의 돌이로다라는 책에 실린 서재란 글에서, 학자에게는 예지(叡智)와 끈기와 건강이 있어야 하고, 아무리 작더라도 서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뒤, 자신은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했으며 서재다운 서재 역시 가져보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이어 공부하는 사람에게 서재가 없다는 것은 농부에게 전답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고, 서재는 학자들에게 육탄전백병전의 싸움터로서 책과 대결을 하여 그 싸움에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고 한다. 따라서 서재 안에서의 전쟁이 우리에게는 성패의 계기요, 사활 문제라고 말한다. , 서재를 두고 이런 비장한 말을 할 수 있다니, 부럽기 짝이 없다.

 

선생은 서재를 몇 종류로 분류한다. 첫째, 응접실보다 화려한 기구를 차려놓고, 가난한 학자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간수해둔 경우다. 그 책들은 금박으로 책등에 제목을 새긴 외국 서적으로서 전문적인 학술서에 가까운 전집들이다. 그 장서를 보면 주인공의 학식만이 아니라 외국어 실력도 매우 높은 것 같지만 대화를 잠깐 나누어보면 무식이 확 드러난다고 말한다. 장서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책이 저장되어 있을 뿐 전혀 읽히거나 이용되지 않는 경우다. 첫 번째 서재와 달리 서재 주인은 책도 잘 알고 책 탐도 있어 책을 부지런히 주워 모은다. 하지만 읽지 않는다. 선생은 이런 사람을 돈만 모으는 수전노와 유사하다고 한다. 다만 첫 번째 부류보다는 격이 높다고 평가한다.

 

셋째, 책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대개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경우다. 서재 주인의 시선도 책갈피나 글줄 사이로 기어들어가 오직 먹칠한 종이에서 금강석이나 노다지 이상의 보물을 파내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덤비는 모습을 이 서재에서 볼 수 있다. 선생은 이 서재야말로 이른바 서적과 대결하려는 학자의 전쟁터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머리를 싸 동이고 몇 날 몇 달을 부비대기를 치다가, 바늘 끝만큼이라도 무슨 새로운 사실이나, 남이 지금까지 생각해내지 못한 것을 발견한 때에는, 그야말로 희희작약(喜喜雀躍)하여,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흘러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러한 기쁨을 실지로 체험하여보지 못하고서는 그 진미를 알 도리가 없다. 수천 명의 경쟁자와 함께 시험을 치르고, 입학의 관문을 돌파한 사람이 맛보는 승리의 술잔도 방향(芳香)하지 않은 바 아니요, 등산가가 험준한 암벽을 기어오르고 기어올라서, 무쌍한 고난을 극복한 나머지, 절정에 도달하여 하계를 눈 아래 내려딛고, 길게 휘파람을 불 때에 그 쾌감도 여간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서재에서 얻은 적은 진리와 작은 발견으로부터 오는 환희야말로, 전자와 같은 척도로 헤아리고 견줄 수 없는 커다란 무엇이 있다.

 

아마도 선생은 서재가 책과 씨름하여 학문적 깨달음을 얻는 곳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이 서재에서 학문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루었기에 하신 말씀일 것이다.

 

정작 선생의 서재는 어떠했던가? 선생은 반평생 서재다운 서재를 가져보지 못했고, 서재 겸 침실 겸 응접실 겸용의 공간을 이용해왔다고 말한다. 그마저 선생의 전용 공간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이 같이 사용하는 혼용의 공간이고, 항상 정돈되어 있지 않고 조용할 때가 드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의 서재야말로 진정한 서재가 아닌가 한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직업이 직업인지라 읽고 쓸 곳이 필요하다. 집에 책을 쟁여둔 방이 있어 거기서 읽고 쓴다. 좋은 말로 서재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어떤 교수의 서재에서 풍기는 그런 옛스런 멋은 전혀 없다. 그냥 사방에 아무 장식 없는 나무 서가를 두르고 창가에 넓은 앉은뱅이책상을 두었을 뿐이다. 학교 연구실도 마찬가지다. 그냥 서가와 책뿐이다.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만 있을 뿐이다. 그날 하루 보아야 할 책이 있으면 뽑아다가 보고 용도가 없어지면 다시 본래의 위치에 꽂거나 도서관에 반납할 뿐이다. 그러니 연구실도 휑뎅그렁하다. 아니, 삭막하다! 언제나 서두에서 말한 분의 서재와 같은 멋있는 곳을 한번 가져보나. 하지만 그만두자. 일석 선생이 말씀하신 첫째, 둘째 서재가 아닌 데 만족하고 말 일이다. 무슨 내 주제에 멋있는 선비의 서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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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16-11-2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핫.... 멋진 서재 가지셔도 될거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