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책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또 가지고 싶은 책이라 해서 다 가질 수도 없다. 도서관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도서관이 없던 시대 혹은 도서관이 없는 사회라면, 또 있어도 이용할 자격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빌려서 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빌린다는 말은 아주 가까운, 인접 관계에 있는 말이다. 다른 물건을 상상해보라. 책처럼 쉽게 빌려달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이러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에 근거를 둔 이야기도 숱하게 많다.

 

조선 초기의 문인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이야기다. 어느 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에게 희귀한 책 한 권을 빌려달라고 한다. 당연히 빌려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책을 돌려주지 않는다. 집으로 찾아가 돌려달라고 채근을 했더니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 머릿속에 다 있다며 좔좔 외운다. 빌려간 책을 뜯어 도배를 해놓고 외운 것이다. 이쯤 되면 돌려받는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책은 빌리고 빌려주는 것이고, 또 그런 과정에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모아보면 책 한 권 분량은 나올 것이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라면 병자호란 때 주화론자였던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손자이고 또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무려 여덟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다). 이분은 구수략(九數略)이란 수학 책을 저술한 수학자로도 유명한데, 한편으로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소장한 장서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석정은 자신의 책에 장서인을 찍지 않았다. 책은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이었으니 책을 잘 빌려주었던 것은 불문가지다. 또 책을 돌려달라고 채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돌려받을 때 책을 읽은 흔적이 없으면 몹시 언짢아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진정한 독서가, 애서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떤 선배 교수님에게 책을 잔뜩 빌렸다. 10년을 실컷 보고 난 뒤 돌려주려고 하니, 그냥 가지고 있으란다. 자신은 당장 볼 일도 없고 연구실도 좁아 그 책까지 돌려받으면 따로 둘 데도 없단다. 가지고 있다가 자신의 정년 때 돌려달라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 선배 교수님은 정년이 되면 책을 모두 없애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구실로 돌아와 곰곰 생각해보니, 이게 책을 맡아달라는 건지 가지라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쨌건 그분의 정년 때까지 그 책들은 내 연구실에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분은 최석정 같은 분인가 보다.

 

어떤 책이 갑자기 필요해서 서가를 뒤져보면 없다. 다시 훑어보아도 없다. 연구실에도 없고 집에도 없다. 이럴 경우 누가 빌려간 것일 터이다. 어떤 책은 기억이 나지만 어떤 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무지하게 아쉬웠지만, 요즘은 깨끗이 잊고 만다. 왜냐고? 내 서가에도 빌려 보고 돌려주지 않은 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고의적으로 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이래서인지 요즘은 빌려주고 까마득히 잊어도 별로 충격을 받지 않는다.


 

휴머니스트·현진


 

책을 빌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못내 아쉬운 책, 아니 문서가 있다. 1980,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알다시피 1016일 그 사건이 일어났다. 부마민주화항쟁 말이다. 아침에 상대(商大) 건물에 강의를 들으러 갔더니(상과대학 학생은 아니지만, 상과대학 강의실에서 수업을 해 들으러 갔다), 학생들이 줄지어 미라보다리(부산대학교 안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의를 팽개치고 따라갔다. 구도서관 자리에 이르렀더니,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어 구호를 외쳤다. 스크럼을 짜고 곧 학교 대운동장으로 내려갔다. 학교 옆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담장이 무너졌고, 학생들은 거기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다음부터는 다 아는 이야기다. 남포동, 광복동에서 박정희 정권의 타도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나는 부산대학교 학생이었다. 그다음 날도 같은 시위가 있었다. 나는 그날도 부산대학교 학생이었다.

 

버스가 폭발해 화염이 치솟았다. 파출소 안에 벌겋게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이건 역사적 사건이었다. 내가 본 것을 기록해야만 해! 집으로 돌아와 내가 본 시위의 시작과 끝을 꼼꼼히 적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종이 뭉치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 뒤 1980년대에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할 때다. 워낙 엄혹한 시절이라 학교 안에도 사복 경찰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저항했다. 등사판으로 찍어낸 성명서, 선언서 같은 것들이 교정에 뿌려졌다. 손에 닿는 대로 그것들을 모았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학생들은 그런 것들을 보면 일부러 챙겨다주었다. 이것도 언젠가는 역사의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따로 갈무리해두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다시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친구와 술을 먹다가 부마항쟁으로 화제가 번져 그때 일을 기록한 자료가 있다고 했더니 빌려달란다. 그 자료는 친구의 손으로 건너간 뒤 다시는 나의 손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거의 30년이 지난 뒤 친하게 지내는 동료 교수가 전에 그 자료에 대해 들었다면서 보자고 한다. 당연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2011년인가, 그 이듬해인가 부산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서 그 자료에 대해 어디서 들었는지 좀 보자고 했다. 자료를 빌려간 친구는 같은 과 동료 교수와 이래저래 인척 관계가 된다. 그래서 동료 교수를 통해 연락했더니 이미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어쩌고 하는 동안 사라진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기념사업회 쪽은 아주 서운해했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물이 정리되어 있지만, 부마항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실로 찾아온 그분은 녹음이라도 남기는 것이 옳다면서 내 희미한 기억을 꺼내어 가져가려고 했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사람이 역사의 자료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좀 더 마음을 썼더라면 그 자료를 곱게 정서해서 복사해두었을 것이다. 신중하지 못했던 젊은 날이 마냥 후회스럽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빌려줄 자료가 있고, 아닌 자료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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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0-20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스트는 어쩜 이리 사람다움이 느껴질까요 말씀 하나하나 정겹게 느껴지네요

2016-12-21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잃어버린 자료에 대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팠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