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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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백일장 같은 것과도 인연이 없고, 글 잘 쓴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저였는데 고등학교에서의 글 쓰는 분위기는 참 자연스러웠거든요. 학교에 TV도 없고 놀꺼리가 없어서인지 학급노트에 이런 저런 글들을 줄기차게 써 내려가는 아이들도, 쪽지를 돌리면서 노는 아이들도 참 많았어요. 그래서 저도 동참했고,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아예 주제를 갖고 글을 쓰는 모임을 하나 만들었어요. 첫번째 주제에다가 이런 걸 썼죠. '수업시간이 지루한 사람들만 쓰라.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되고, 다음 주제도 건의해라' 수업시간이 지루한 아이들이 참 많았나봐요. A4 한 장을 접어서 돌리기 시작했는데,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양면으로 빼곡해졌으니까요. 그렇게 몇 차례 진행되다가 결국에는 열 세명이 하나의 노트를 돌려가며 쓰는 모임이 만들어졌어요. 넘쳐나는 것이 주제였고, 몇 달도 채 안되어 두꺼운 대학노트 한 권, 두 권 이렇게 불어났어요. 처음에는 서너줄씩 쓰던 게 노트가 생기니까 반페이지씩을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두 세페이지를 쓰는 아이들도 생겨났어요. 처음에는 글만 쓰던 것이 나중에는 이런저런 이벤트들도 시작하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회색노트'라고 불렸던 그 모임의 이름은 나중에  '장수하늘소의 꿈'이라고 정해졌는데, 그 이름의 이유는 까먹어버렸네요.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그리고 누군가 마지막 권을 훔쳐가버리면서 모임은 사라졌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그 노트에 대한 기억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어요.   

대학교 졸업할 때 즈음 그 모임의 친구들에게 궁금하지 않냐며 얘기했더니, 다들 부끄럽다고 보고싶지 않아 했답니다. 그래서 집에서 한 번 들춰보니, 저 역시 더 이상 들춰보지 않고 싶더군요. 치기어린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글이란, 남들이 보면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사자들은 한없이 감추고 싶은 기억인가봐요. 그래도 다시 펼쳐봐도 그 때 재미있는 글을 쓰던 아이들, 좋은 문장을 쓰던 아이들, 사고가 독특했던 아이들, 담백한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주는 발랄한 느낌은 따뜻하고 즐거워요.

글쓰기를 꽤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간간히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기자라든가, 소설가라든가, 글쓰는 직업을 택하고 싶진 않았냐고 말이죠. 그런 꿈을 접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수하늘소의 꿈'과 같은 기억이 자리잡은 고등학교 때의 경험 탓이에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몇 친구들과 같이 술을 마시며, 미래에 대해 얘길 나누고 있었는데 저보고 뭘 하고 싶냐고 누가 물었어요. 그 때 '음, 난 글을 쓰는 일을 하면 참 좋을 것 같아.' 라고 대답했더니 '넌 안돼, 글이 재미도 없고, 잘 쓰지도 못하잖아.' '글은 000같은 애들이 써야지' 라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죠. 술 한 잔 꿀꺽 삼켰지만, 전 수긍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아니더라도 장하꿈이나 학급노트를 통해서 충분히 글 잘 쓰는 아이들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제 글이 참 나쁘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런 맥락에선 참 고마운 친구들이죠. 일찌감치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과 잘 할 수 없는 일을 객관적으로 지적해줬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 시절에도 가끔은 글을 쓰는 삶에 대해 고민했었답니다. 그래서 소설쓰기 수업 같은 것도 들어보고, 비평수업도 들어가 보고 그랬죠. 쓰기에 대한 욕망들은 항상 마음 깊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축제' 같은, 긴 글을 긴 시간동안 붙잡고 있기도 했고, 이런 저런 글들을 쓰는 걸 계속, 계속해서 좋아했어요.

이만교의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는 도입부에서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잠입자>라는 영화를 소개하며, 이런 얘길 합니다.

안내인이 설명하는 금지구역이란 인생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우리네 인생이야말로 금지구역 이상으로 살아있는 미로여서, 정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역동과 심연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를 이겨내고 비밀의 방에 이르렀다 해도 문제다. 가령, 이전 안내인이었던 '고슴도치'라는 사내는 비밀의 방에 이르러 소원을 빌고 난 뒤에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가 비밀의 방에 들어간 목적은 그가 사랑하는 아픈 동생을 살려 달라고 하는 소원 때문이었는데, 정작 동생은 죽고 자신은 벼락부자가 된 것이다. 그의 무의식 속의 진짜 소원은, 그 자신조차 부인하고 싶었겠지만, 동생의 건강보다도 자신이 부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것. 금지구역 못지않게 인간의 욕망 또한 심연이고 미로였던 것이다. (19p)
 

맞아요. 사실 인생도, 그 인생 안에서의 개인의 욕망도 심연이고 미로입니다. 글쓰기는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 심연과 미로를 설명해내려는 몸부림일런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글쓰는 직업에 대한 욕망은 주변의 반대 못지 않게 저의 무의식이 심하게 거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글쓰기에 자체에 대한 욕망과 몸부림은 수년간 계속되어 온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그 '밥도 못 벌어다 줄' 글쓰기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에 대한 오랜 고민을 저자가 슬금슬금 풀어주었습니다.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는 '글쓰기'보다는 '나를 바꾸는'에 방점을 찍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글쓰기를 하려는 그 욕망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삶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고, 그 욕망의 미로를 탐험하며, 인생이라는 심연의 바다에서 살아내기 위한 에너지를 찾는 길이 다시 글쓰기-공부하기-로 이어진다는 게 핵심이 아닌가 싶어요. 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씨앗문장'입니다. 씨앗문장은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인생에 대해 탐험하는 가운데 발견하는 나와 공명하는 문장을 얘기합니다. 한 순간 그 문장에 공명하게 되었다면, 그 이면과 '맞닿은 욕망이나 정서나 지혜를 우리 마음 역시 품고 있을 것이 틀림없기'(97p) 때문입니다. 그런 문장을 찾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의 책읽기가 될 것이고, 자신의 씨앗문장을 찾는 것이 자신의 글쓰기의 시작이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이 됩니다. 외부로부터 찾아온 문장 하나가, 나의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관점과 사고의 체계를 새로이 할 것이고 그렇게 새로워진 나의 세계에서 잉태된 씨앗문장은 또 다른 글을 만들어내겠지요. 
 

그래서 살아있는 글은, 반짝거리는 문장은 치열한 성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물과 사건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리 저리 둘러보는 시간들, 자신의 생각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가다듬어 보는 반성의 시간들, 내 마음을 오롯이 표현할 길 없어 찾아 헤매는 깊은 밤의 하늘길의 여정들. 그 모든 성찰이 만들어낸 문장들을 읽는 것이 제 독서의 기쁨이고 때때로 내가 그런 문장을 쓰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거죠. 그런 생각들과 욕망들이 더해가면서, 스스로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얼마나 솔직해졌을까. 나는 얼마나 내가 쓴 글에 책임을 지고 있을까.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내 삶의 어디쯤에서 나를 지켜보고, 또 나를 이끌어가고 있을까. 그럴 때면 한없이 작아지기도 하지만 분명히 삶은 글과 함께 조금씩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요. 아, 이만교씨는 수유+너머에서 공부한 까닭일까요. 수유+너머의 사유와 접속하여 이런 사유를 펼쳐냅니다.
 

글쓰기는 문학언어의 조탁 이전에, 기성질서가 갖추고 있는 언어 구사력을 우리 각자의 언어가 얼마나 잘 익히고 또한 넘어서서, 얼마나 더 잉여적인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기성언어의 풍요로운 성과는 성과대로 배우되, 또 다른 방향과 틈새를 모색하려 한다면, 그 순간 글쓰기는 매우 다양한 층위 - 일상적인 감성과 사유와 상상의 층위에서, 생각과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모든 사적/공적 층위-에서 이미 혁명적 의미를 띨 수 밖에 없다. (239p)
 

그렇게 해서, 글쓰기는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사유의 지평에서 삶을 바꾸는 '나를 바꾸는' 행위가 됩니다. 그것이 그가 얘기하는 '혁명적 의미'겠죠. 요즘 사람들이랑 얘기하다보면 '살아간다'라는 것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주입된 가치대로 자신의 발 앞에 놓여진 척박한 땅 위로 고립된 개체로 한 걸음 한 걸음 살아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마음껏 펼쳐내며 다른 세계에로 사유의 지평을 넓혀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전자는 흔하고, 후자는 드물고, 전자는 괴롭고 후자는 엄청나게 어려워보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러한 현실 때문에라도,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자본으로 계산하고 경제 중심으로만 코드화하는 획일화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감각/사유/상상을 다른 방향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새소리를 새소리로 듣는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글쓰기 공부는 기초적인 생존싸움과도 같은 절박한 탈주 방편일 수밖에 없다. (377p) 


저는 그것을 우리가 공부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해요. 참 외롭고, 주어진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척박한 길 위에서도 제게 힘을 주는 건 읽고 쓰는 자유라고, 감히 고백해 봅니다. 그래서 장하꿈의 기억과 글쓰기에 대해 두려움이 가득했던 기억들을 오가면서도 저는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고, 이만교씨의 책이 얼마나 저를 꾸짖고 얼마나 저를 감동시켰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안일하고 가벼운 치기에 불과했을지라도, 때때로 책읽기가 지적 허영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그래서 솔직한 문장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읽는 행위에 진정성이 모자랐을지라도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어졌어요. 지난 십여년의 시간 동안, 그 맹랑한 청춘이 깃든 그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면서 다음 십년에 대해 생각하는 거에요. 이만교씨가 얘기하는 것처럼 절박하지는 않지만, 분명 글쓰기(책읽기) 공부가 어떻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지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orangetree 2010-04-21 22:28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장하꿈과 글쓰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가슴이 아팠어요.
꼭 지금의 제 이야기 같아서요. 그렇지만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요. 그리고 글을 이렇게 잘 쓰시는 걸 보니 그동안 글을 계속 쓰시길 잘 하신 것 같아요. 빈 말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착한고양이 2010-04-27 10:58   URL
공감해주시고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렌지나무님의 삶에 글쓰기가 함께 해서 풍성함을 더하길 바래요.

orangetree 2010-04-21 22:32   댓글달기 | URL
즐겨찾는 서재로 등록하고 싶은데..등록이 안 되네요.

착한고양이 2010-04-27 10:59   URL
음. 사실 알라딘을 잘 안 써서 저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blog.naver.com/hqdream 으로 놀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