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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코리안 델리 -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편의점 운영기
벤 라이더 하우 지음, 이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1년 7월
평점 :
우리네 일상에서 각자가 느끼는 중력은 제각각이라 살아가는 방식도 제각각입니다. 진흙탕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한 튼실한 하체는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기도 하고, 부실한 하체에 비해 예민하고 섬세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만 항상 어지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진부하게는, 가족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미리 깔아놓은 융단 위로 사뿐사뿐 걸어가지만 한번 넘어지면 일어날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는 법이구요.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잊기 쉬운 건 제각기 다른 중력을 느끼기 때문인데 역설적이게도, 함께 살아가게 만드는 힘도, 모든 것을 개인의 역량과 책임으로 돌리고 홀로 나아가는 힘도 같은 배경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그 배경을 어떤 사람들은 자기인식이라고 부르고 - <아이의 사생활>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성공(성장)의 Factor라고 했죠 - 어떤 사람들은 열정, 긍정,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 의지라고 하건 어쨌거나 저는 그것을 제 마음대로 대문자 MODE라고 부릅니다. 촘촘하게 연결된 자신과 주변과 사회의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방법과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 나아가는방식인 MODE는 중력을 잊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 방향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이 코리안 델리>는 벤 라이더 하우, 라는 중산층 가정에서 잘 자란 문예지 편집자가 변호사인 한국인 아내와 장모와 소규모 편의점(델리)을 열면서 얻은 2년간의 기록입니다. 일단 무지 재미있어요. 돈을 버는 일이나, 소소한 노동에는 재주가 없는 이 친구가 부딪히는 사건들에는 유머와 따뜻함이 가득해서, 잘 씌어진 미국 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가 있었어요. 굳이 비교하자면, <Scrubs>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JD와 비슷한데, 수다스러운 몽상가인 JD가 사건을 읊는 과정과 꽤 비슷해요. 사건이 벌어지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기도 하고, 쓸데없지만 재미있는 상상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과 주변을 발견해나가는 착한 결론을 낸달까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서른 살이 넘은 남자의 시선이라고 하기에는 철없지만, 순수한 시선의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악착같이 일하는 한국인 장모와,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의 가족(주의), 몽상적이고 철없고 아마추어같은 문예지 편집실의 풍경과 편집장 조지의 행동들, 거친 사고뭉치지만 꼭 필요한 점원 드웨인, 그리고 주변부를 오가는 진상 고객에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편의점 생리에 이르기까지. 그 기록안에서 벤은 스스로의 성장을 읽어내고, 독자는 생활을 재발견하게 되요. 하나만 예를 들어보죠.
<파리 리뷰>는 진짜 일터랄 수 없었다. 적어도 가끔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환상이며, 특권의 거품에 둘러싸인 가공의 세상이었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중력 없는 세상 속에서만 생존이 가능했다. 델리는 일종의 해독제였다. 순수한 투쟁의 세계가 발산하는 무례하고 우악스러운 행동들조차 큰 매혹이었다. (183p)
그렇지만, 후에 벤은 도서전에서 영업일을 자처하면서 자신이 델리에서도, 편집실에서도 자신을 버리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판매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돈을 받고 자신과 시간과 재화를 판매하는 프로 영업의 가치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벤도 그렇게 언급하지는 않았어요. 이 남자가 그렇게 쉽게 바뀔리도 없고 말이죠) 그에게는 편집장과 장모를 이해하기 위한 경험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조금 더 행복하게 바꿀 것임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그가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건,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영토(편의점 세계)에서 얻은 여행의 기록이자, 그 안에서 얻은 다른 삶에 대한 인식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스스로의 깨달음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것이 몇 줄 글로 정리를 할 수 없겠지만, 그게 '이야기'와 '여행'의 재미이고 묘미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기록이 가치있는 까닭이겠지요.
한 살 한 살 더 먹어갈수록 저는 보수 꼰대가 되어 가는 것을 느껴요. (이것이 딴나라당이나 가카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시적으로만 보면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미시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더 많아지는 것. 관념과 패기로 똘똘 뭉쳐 있던 일상이,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는 변명을 덧붙이고 싶네요. 아카데미 작품상을 노리던 '격이 다른 김작가'는 만화와 시트콤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격이 다른'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듣기에는 최고로 프로페셔널하게 업무를 쳐내던 동네친구 황 모는 아프리카 어딘가로 봉사활동을 떠났고, 평범함의 대명사로 쓰면 좋을 것 같은 선량한 웃음의 전씨 부부는 세계의 농경제와 페미니즘을 고민하러 먼 땅으로 떠났는데, 아주 가끔 그 녀석들의 먹고 살 걱정을(걱정만) 대신 해주고 있어요. 비슷한 업종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꺼칠한 김 모군의 회사에 대한 불평 앞에선 더 나은 삶에 대한 꿈 따위는 소주 잔에 풍덩 빠뜨리고 업무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도 철없이 방황하는 녀석들에게 감히 사회생활에 대한 진지한 충고를 던지기도 하죠. 때때로 여전히 퍽퍽한 현실의 수렁에서 헤매는 친구들에게는 쌀 한 톨 떨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던지기도 하구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감히, 겁없이 던질 수 있는 건, 제가 꼰대가 되어갈 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 무지함을 깨우쳐주는 건 그들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를 성장시키는 건 그들의 이야기죠.
다시, MODE를 결정짓는 건 우리의 이야기에요. <마이 코리안 델리>는 벤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조지와 케이와 드웨인과 개브와 살림과 에드워드의 이야기이고 그것이 벤의 MODE를 어떻게 바꾸어가는 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농담같은 책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유쾌한 농담인양 즐겁게 풀어낼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요. 벤은 좀 더 행복해진 것 같네요. 더불어, 스토리 텔링은 혹자가 얘기하듯,훌륭한 마케터나 잘 나가는 영업맨, 성공한 정치가나 감동을 주는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에요. 그건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함께 무지함을 깨달으며 성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딛고 있는 바닥은 여전히 진흙탕일지 모르겠지만, 그 MODE 만큼은 다채로운 이야기와 함께하는 풍성한 것이길 바랍니다. (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