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 잠깐 작은 추억에 잠겨 본다.


대학 졸업반 시절이었나보다.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아파트 계단에 들어설 때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남학생(학생이었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또래였으므로 학생이었다고 해두자)이었다.

머뭇거리듯,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천천히 예의를 지키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나를 지켜보았다고 했다.

버스에서 나를 만난 지 여러 날 되었다고 했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 같아 보였다고, 그런 말들을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 말이 중요한 것 같은데)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자를 쓰고 있었고, 아이보리빛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헐렁한 옷,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유행하던 힙합 스타일이었나 싶기도 하다.

자기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며, 오늘 마음을 전하려고 용기내어 따라 내렸다고 했다.

숱한 떨림 속에서, 진심을 전하고자 애쓰던 마음씀씀이가 느껴졌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은 헤어질까 말까 고민을 하던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별한 상태도 아니면서 누군가를 만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공교롭게도 손가락에는 커플링까지 끼워져 있었다.


그는 반지의 의미를 물었다.

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왜 대답해줘야 하느냐며 반문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이없는 대답이긴 했네)

그는, 말씀을 찰 얄밉게 하시네요, 라고 했던 것 같다. 


끝까지 나는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좋은 사람 같네요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는 좋은 사람 같다, 궁금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순간의 나 역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차마, 그가 마음에 든다 해도 

멀쩡히 있는 남자친구를 없다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

그날의 나였다.


그의 떨림과 용기가 느껴지는 말들 앞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특히나 그날은 더더욱, 반바지에 아무 티셔츠나 걸쳐 입고

머리는 대충 묶은, '추리'한 모습인 나를 보고 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나를 따라왔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어떤 말로 그를 돌려세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일부러 고백을 하기 위해 따라내렸다던 그.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던 사람이었을까.


어리고 풋풋해서 가능한 떨림이고

그래서 가능한 고백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설프고 서툴러 갑자기 마주한 진심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시절이었지 싶다.


결국 나는 당시 만나던 사람과는 헤어졌고

그날 만났던 그 사람은 이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라, 어떤 아쉬움이나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두려움과 떨림을 이겨낸 젊은날의 어떤 용기

평범한 어린날의 나를 특별하게 바라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

다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하나의 장면이

생각하면 빙긋 미소짓게 해주는 기억이 된 것 같아서.


그날로부터 나는 먼 길을 왔지만

사람의 가장 순수한 마음

누군가를 향한 여리고 팔딱거리는 설렘과 떨림들,

두근두근 좋아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만은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언제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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