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자본주의 가난한 사회주의 - 그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역사가 말해주는 것들
라이너 지텔만 지음, 강영옥 옮김 / 봄빛서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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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자본주의 가난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정하지만 그 대안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역사적 사실로 그 주장을 뒷받침한다. 자유 시장경제가 어떻게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류를 발전시켜왔는지 각 나라의 사례로 분석하고 고증하여 철저한 자료중심의 서술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사례에서 보면 사회주의 노선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개혁을 하였을 때만 긍정적으로 발전했다.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도 시장경제에 자유를 지향하는 나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독재와 사회주의 정책을 지향한 나라는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저자는 아프리카 국가를 돕는 길은 개발 원조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개발도상국의 빈곤율은 2.7퍼센트였던 반면, 경제 자유가 없는 개발도상국의 빈곤은 무려 41.5퍼센트에 달했다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아프리카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국가들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천연자원의 덫’이다. 불안정한 수입 때문에 국민의 경제활동이 어렵다는 것이다. 풍부한 천연자원은 ‘모든 것을 가능하다’는 정서를 키웠고 일종의 심리적 저주로 작동되었다. 
   
의외로 천연자원 매장량이 적은 나라에 속하는 르완다는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바로 경제의 자유였다. 경제의 자유는 풍부한 천연자원보다 중요하다. 르완다와 비슷한 환경의 케냐 역시도 석유도, 다이아몬드도, 금도, 없고 토양마저 척박한 자연환경을 가졌음에도 인터넷과 무선통신의 조합으로 케냐는 빈곤국가를 탈출하였다. 인터넷과 무선 통신의 결합은 케냐에 전례 없는 창업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수익을 내는 경제보다 안정적이었다. 반대로 경제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은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빈곤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동독과 서독이 있다. 동독은 1960년 전 구역에서 완전 국유화를 하였고 ‘사회주의의 봄’이라 자축하며 캠페인까지 벌였지만 수많은 농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로인해 식량공급에 차질이 빚어졌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악화에 빠뜨렸다. 자본주의의 풍요를 찾아 서독으로 이주하는 국민들이 많아지게 되자 동독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고 생활수준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결국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설치해 이주를 막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였고 동독지도부는 ‘신 경제 체제’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시장경제 매커니즘을 자극하여 경제의 발전을 궤하였지만 개혁의 효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반면 서독은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경제 발전에 가속이 붙었고 동독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와 비슷한 노선을 걸은 경우는 한국과 북한이 있고 칠레와 베네수엘라 등 국가들 간의 비교 연구가 있다. 이 나라들은 자본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경제는 역동적이고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할수록 경제는 낙후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한다. 이 주장에 반박하려면 저자가 제시한 철저한 데이터와 논증 이상의 자료가 필요할 만큼 그의 이론은 객관적이고 치밀하다. 
   
자본주의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반자본주의자들이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메시지들로 가득한 책이다. 저자는 지식인과 경제학자 중에 반자본주의자들이 많은 이유를 이상적인 사회체제를 구상하며 현실과 비교하기 때문인데 유토피아에서는 평등에 대한 기준이 높고, 국가가 강력한 역할을 하며, 시장이 자유로운 힘을 펼칠 공간이 적다. 이런 유토피아 체제로는 역사에서 이미 실패를 경험하였던 사회주의 체제로의 귀결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주의는 싫다면서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체제가 한 세기에 실패를 경험한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지금까지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사회주의를 실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설이 나오면서 사회주의가 마치 유토피아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 체제로 보여지곤 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으로 보여지는 빈곤과 배고픔은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해결방책이 될 수 없음을 이 책은 정확환 자료분석과 국가간의 비교로 고증한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배고픔과 빈곤에 대한 해결방안이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교를 무척 흥미있게 읽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가 어떤 역사의 길을 걸어왔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자본주의가 완벽하진 않지만 사회주의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체제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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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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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글은 담백하다. 어려운 용어를 쉽게 사용한다. 거부감이 전혀 없이 뇌에 흡수되어 전신으로 소화하는 느낌이 든다. 김정운의 신간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를 읽으며 슈필라움이라는 공간에 대해 배웠다. 심리적 위안과 물리적 공간이 만났을 때 존재하는 시간을 ‘슈필라움’이라 한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여수의 작은 섬에 일본에 단기 유학으로 미술을 배우고 와서 차린 화실이 김정운의 슈필라움이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슈필라움’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공간을 꿈꾼다. 나만의 공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며 오롯이 나의 시간이 흐르는 공간을. 서재가 있음에도 거실에 상을 펴고 쭈구려서 글을 쓰곤 하였다. 자판기의 글자들은 모두 지워진 상태였고 모니터는 작았지만, 왠지 모르게 청승맞아 보이지만 고집스럽게 나만의 공간이란 애착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무엇이, 작은 상 앞에 앉았을 때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던 것은 심리적 위안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 확보되어야 얻어지기 때문이다. 여수 섬에서 보는 너른 바닷가의 출렁임을 화폭에 담아내며 김정운이 느꼈던 슈필라움의 시간들을 읽노라니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 하나쯤 욕심내보는 것이 로망이지 않을까싶다.

 

살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며 살까? 김정운이 말하는 여수의 슈필라움의 이야기 보다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역시나 문화박사로서 심리학박사로서의 말빨이다. 아재개그와 곁들여 세계의 현상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안그래도 점점 나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과의 벽을 높고 두텁게 쌓고 있었는데 세상 속의 내 작은 슈필라움을 떠올려보니 조금씩 벽이 다시 허물어진다. 그것은 사람은 외로운 존재인 동시에 타인과의 삶을 통해 성장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리라.

 

◆책 속의 한 구절
습관적으로 ‘나쁜 이야기’만 소셜 미디어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친구’를 맺으면 아주 고통스럽다. 밤새 ‘나쁜 이야기’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각자의 소셜 미디어에 쌓이는 ‘나쁜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여 앉아도 남 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호랑이가 나타났다.’라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당연히 ‘저기 호랑이가 있다’는 나쁜 이야기다. 바나나는 내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바로 잡아먹힌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보다 생존에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나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원시적 본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만 한눈 팔아도 목숨이 날아가던 원시시대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한 날것의 위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진 상태를 뜩한다. 그런데도 사방에 ‘나쁜 이야기’들뿐이다.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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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의 공부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할 때, 맹자를 읽는다
조윤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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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여전히 맹자가 유효한 이유


덥다 못해 뜨거운 6월의 태양아래 그동안 공부하던 모든 과정을 마쳤다. 만감이 교차하며 공부의 의미를 새겨보던 중 맹자의 『 이천 년의 공부』를 한 자 한 자 읽어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현재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것은 동양철학이었다. 공자에서 맹자, 채근담, 사기, 관중, 한비자, 손자 등 동양철학은 하나의 층위를 이루며 내면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물론 여전히 외부의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상처받고 있지만, 동양철학을 알지 못하였을 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상황에 따른 이해나 대처가  확실히 달라져 있음을 느낄 때, 철학이 삶에 작동하는 긍정의 피드백이 상당한 힘이 되어줌을 깨닫곤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용기가 필요하다. 젊었을 때는 용기가 분기탱천하여 어떤 일에도 두려움이 들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 어떤 일에든 머뭇거리게 된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였을 때 주저하였던 것은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은 반드시 있기에 두려움으로 주저앉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 같다. 


맹자가 제나라에서 왕의 책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고향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이다. 맹자가 관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자, 제선왕은 맹자를 붙잡지 않았다. 맹자를 떠나보내기는 아쉽지만 맹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 곁에두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맹자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 제자 충우는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라며 맹자가 귀향하는 게 된 것을 원망하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맹자는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시대에 오로지 나밖에 없는데 누굴 원망하겠냐는 말을 하였다. 이 일화를 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바로 이런 자긍심이 아닐까 했다.


살아가다보면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일희일비한다면 마음이 상할 뿐 아니라 사기가 떨어져 새롭게 도전하기도 어렵다. 또한 실망해 자책하거나 자존심을 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두 번의 실패로 자신의 가치를 편하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 나는 큰일을 할 수 있다.’ 는 당당한 자신감과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의로운 확신이다. 당당한 자신감과 의호운 확신, 이것이 어려운 상황의 타개책이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p46


극단의 물질주의와 오염된 성공주의가 지배하는 세태에서 맹자가 말하는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는 적이없다)는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공자가 말하였듯  ‘관대하게 대하면 많은 사람을 얻게 되고, 신의가 있으면 백성이 믿고 따르게 된다. 민첩하게 하면 공을 이루게 되고, 공정하게 하면 사람들이 기뻐하게 된다(논어). 


혐오를 부추기고 자신과 다른 타인이 쉽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상처를 주고받는 삶이 일상이 된 작금의 시대에 맹자의 인자무적과 여민동락, 반구저기의 정신은 혐오를 사랑으로, 증오를 연민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이제까지  타인을 향한 혐오의 증오의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게 되면 타인의 관점에서 나를 , 나의 관점에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공감의 힘은 내면을 다스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 현대에도 맹자가 유효한 이유이다.


《채근담》에는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스러울 뿐이다.”라고 실려 있다. 이 문장은 말과 글을 넘어 세상의 모든 일에 적용되는 지혜가 담겨 있다. 지나치게 남다른 것을 추구하다보면 오히려 보편성을 잃고 복잡해진다. 핵심을 짚지 못하고 증언부언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극치에 도달하면 단순해지고 본질에 충실해진다. 단순함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최상이다. 말과 학문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깊은 뜻이 담긴 말이 가장 좋은 말이다.

“말이 비근하면서도 가리키는 바가 깊으면 좋은 말이고, 지키는 것이 요약되어 있으면서 베푸는 것이 넓으면 그것이 좋은 도다. 


맹자가 가르쳐주는 말과 수양의 최고 경지다.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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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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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1946년 두 마리 개의 형태로 나타난 악과의 조우를 통해 신을 만났다.(버나드는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다.) 어떤 사악한 원칙이 있다인간의 만사를 주관하며 주기적으로 나타나 개인이나 국가의 삶을 지배하고 파괴했다가 철수해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힘.-p27

 

이데올로기(이념)이라는 말은 현대에 흔히 쓰이는 용어이다정치와 사회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관념과 신념믿음을 말할 때 쓰여 우리에게는 꽤 익숙한 언어이다이언 매큐언의 검은개를 읽으며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떤 면들이 있을까를 연상하곤 하였다. 1940년대 지금과는 달리 이념의 극단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이 소설의 배경이기 때문이다공산주의자와 파시즘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시대였으며 민주주의 태동과 동시에 제국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이야기이다이데올로기의 풍요 속 영적 빈곤과 갈등에 허덕이던 시대가 바로 1940년대가 아닐까한다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극우와 극좌라는 극단의 갈등 속에서 어떤 계기로 인해 이념의 전환을 하게 되는 정치인들의 고민 같은 것이다사회와 정치라는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며 자신의 신념과 관념을 증축해가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는 과정이라면 그 옷이 공산주의나 파시즘의 색을 지녔더라도 개인의 경험과 사건에 의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온도를 가진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버나드와 준의 경험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 과정을 거치는지를 보여주는 회고록이다둘 다 젊었을 때 공산주의였고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같은 생각같은 뜻을 가진 한쌍이었다하지만이들이 공산주의 노선에서 탈피하며 서로 다른 이념을 향하자 둘은 극단의 부부가 되었다버나드가 합리주의라면 준은 신비주의자이고버나드가 인민위원이라면 준은 기권자이다버나드는 과학자이지만 준은 직관론자이며 모든 면에서 양극단에 서있다도저히 한때 사랑했던 사이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사위 제레미는 이런 장인 장모를 보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다준이 이제 죽어가고 있었고준이 천작하여 평생을 집착한 검은개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머니의 세계관과 아버님의 세계관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어떤 이들은 내면의 여행을 하고 다른 이들은 세상을 개혁하는 데 힘쓰는 게 가장 좋은 일 아닐까요문명을 일구는 것은 다양성이 아니던가요?”-p71

 

 

버나드와 준에게 검은 개의 의미는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위협적이었고 공포 그 자체였던 검은 개 두 마리로 인해 이때부터 신비주의자로 급변한다이데올로기란 사회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그 토대위에 만들어진 신념을 의미한다검은개를 악의 신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이들 가족 모두의 삶에 터닝포인트였다합리주의자였던 버나드와 신비주의자 준은 평생을 서로 저주하며 싸우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다음날 과수원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치는데 준이 나타나 지금 다듬는 나무와 그 아름다움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말했다버나드는 이런 나무와 다른 수목이 진화의 산물임은 익히 아는 사실이며 그걸 설명하는 데 신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p170

 

이데올로기가 영원할 거라는 착각을 우리는 수도 없이 하고 살지만준에게 닥쳤던 검은 개로 인해 삶의 모든 것이 어그러지듯이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사회라는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또한 한 개인의 신념이라는 것은 강력한 것들의 상징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버나드와 준은 신념을 지녔지만역사적 사건 앞에서 그 신념을 지켜나가지 못한다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한편으로는 시대의 낙오자이기도 하다어쩌면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리는 모두 낙오자인지도 모른다정치와 사회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부유하며 떠돌아다니는 이념의 허울아래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는  개인의 삶을 반추하는 듯한 소설이다이언 매큐언의 메시지는 그래서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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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 꽉 안아주고 싶은, 온몸이 부서지도록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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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정여울의 아홉 번째 책 와락을 읽는다. 와락... 누군가를 안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에게 스며드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천형 같은 삶을 매일 살아내는 것이 숙제처럼 느껴지곤 할 때, 고개 숙인 사람들. 갈대가 조용히 속으로만 울음을 삼키듯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사는 이들을 와락 안았을 때 잔잔히 전해지는 아픔의 전도를 느낄 때 이상하게 위안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산다는 것이 혼자만의 아픔인줄 알았는데 누구나 다 그렇게 아파하며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와락 당신을 껴안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개체로만 존재하기 시작함을 깨닫는다. 포옹을 하면, 그 사람을 많이 아끼고 많이 애틋하게 여겨야만 느낄 수 있는 깊은 공감의 아우라 같은 것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 존재와 존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사다리를 놓는 듯한 행복한 착시가 느껴진다.-p13

 

이번 와락의 주제와 어울리는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정여울은 와락이라는 의태어와 어울리는 화가가 구스타프 클림트라며 그의 그림에서 포옹의 의미를 떠올린다. 신과의 은밀한 사랑을 성취하는 장면을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표현한 다나에와 아름다운 금빛 포옹장면을 그린 키스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을 집대성 해놓은 것만 같다.

 

영화에서나 또는 문학에서 보여지는 와락포옹하는 감동적인 순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오래전 보았던 영화 미 비포 유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비운의 사고로 죽음만 생각하는 남자와 젊음과 건강을 가졌지만 지독히도 가난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일과 사랑, 돈과 명예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남자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자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는 가장 친했던 친구와 사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고 흐트러진 베개조차 자신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6개월 뒤 안락사를 자처한다. 그러던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왔던 루이자가 간병인으로 나타난다. 가족들 뒷바라지에 자신이 하고싶은 것을 한 적이 전혀 없던 루이자는 매일 죽고 싶어 하는 남자 윌과 난생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미술관을 가고 해변으로 여행을 간다. 매사 신경질적이고 부정적인 윌은 루이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세상과 담을 높이 쌓고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고 있는 윌에게 루이자는 너무도 투명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벽을 허물어간다. 촌스럽고 모든 것이 서툴러 실수투성이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차가운 눈빛을 지닌 윌의 눈도 조금씩 부드러운 반달모양으로 변해간다.

 

포옹의 순간은 번짐의 순간, 피어남의 순간, 타오름의 순간이다.-p13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남자 윌은 매일 아침 루이자가 보고 싶어 눈을 뜬다. 영화는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만큼 슬프지만, 젊고 건강미 넘치는 여주인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윌과 루이자가 포옹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동에 전율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생에도 한 번쯤은 타인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포옹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깊이 안아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순종과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껴안아야 하고 타인을 포옹하며 이 천형 같은 삶을 지속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정여울의 와락은 서로가 서로를 와락 껴안아주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은 책이다. 아무라도 와락 안아주고 싶은, 너와 나 사이의 높은 벽을 뛰어넘고 싶어지는 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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