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 데미안을 만났을 때, 사실 난 반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간혹 보게 되는 데미안의 그 유명한 문구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한 세계를 깨뜨리는’ 것조차 그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제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녹록치 않았던 세월 속에서 깨어진  ‘나’를 만나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허무주의자로 이름 높은 허연 시인의 시집을 통해 마흔이란 나이를 '세상의 모든 악을 이해하는 나이’ 라고 했을 때 매우 공감했던 적이 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 한 마디가 더 가슴을 울리는 법이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이 말은 어쩌면  내가 사는 세계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어두운 세계에서 벌어지는 살인이나 잔인한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나이라는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존재하는 두 가지의 세계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하는 것 같다. 마치 어린 싱클레어가 한 세계는 ‘곧은 선과 길’ 인 밝은 세계와 ‘무섭고 사납고 잔인한 일들’이 일어지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고 믿으면서 언제나 밝은 세계만을 가고 싶어하는 소망을 꾸는 모습이 젊을 때 누구나 꾸는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싱클레어를 통해 젊은 날의 자화상을 다시 펼쳐보는 기분으로 데미안을 손에 들었다.  

 

가족과 평안한 ‘곧은 선과 길’의 싱클레어의 세계에 최초의 균열의 시작은 크러머라는 친구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열 살의 치기로 시작된  거짓말로 크러머에게 협박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 싱클레어 앞에 ‘자의식이 분명하고 단호한’ 그러나 ‘자신의 본질’을 잘 알고 있던 ‘막스 데미안’과의 만남은 싱클레어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 되어준다. 그 문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로 들어갈 수 있는 ‘문’과도 같았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번 쯤 인생에서 흔들리는 지점이 있다. 어떤 이는 사춘기시절에 겪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나이가 들어서 자신의 세계가 흔들리기도 하고, 사람마다 삶이 다르듯이 이렇게 자신의 세계가 흔들리는 지점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헤세는 ‘자신의 세계가 물러지면서 천천히 붕괴하는 삶의 과정’을 겪을 때 ‘죽음과 재탄생’의 과정을 겪어야만 자신에게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서면서 자신의 삶을 붕괴하는 과정은 이렇게 ‘힘차게 투쟁하여 한 세계를 깨뜨리는 과정’ 이다.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존재했던 첫 번째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이어주는 문으로서 데미안을 만났고 데미안은 싱클레어 안에 잠들어 있던 내면의 ‘자아’였다. 데미안이 던져 주는 삶의 의미들로 같이 고민하고 데미안이 주는 철학적인 말들이 모두 싱클레어의 가슴에 뿌려져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번뇌하고 고민하며 성장한다. 

 

여전히 두 세계에서 고민하던 싱클레어는 교회에서 주는 의미가 전부였던 시대에 전혀 다른 각도로 데미안에게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우리가 숭배한 하느님이란 멋대로 나누어놓은 세계의 절반만을 나타낸다.’ 는 말로 인해 두 개의 세계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싱클레어의 고민은 우리의 청춘을 반추한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가간 질문과도 같다. 데미안이 말하는 카인의 세계와 아벨의 세계는 싱클레어에게 마치 선과 악의 세계로 구분되어지기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자신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밝은 세계만이 아닌 카인의 세계인 어두운 세계 또한 끌어안아야 한다는 새로운 신 ‘아프락사스’에 대한 물음이 싱클레어를 따라다닌다.

 

이후 싱클레어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사춘기 시절의 성적인 욕망을 ‘희열과 공포, 남자와 여자가 뒤섞인, 가장 거룩한 것과 추한 것이 서로 뒤엉킨, 깊은 죄가 가장 사랑스러운 무죄를 번개처럼 관통하는 사랑의 꿈’꾸기도 하고 괴짜 어른이지만 친구 같은 피스토리우스를 사귀지만,  피스토리우스는 자신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깨달음은 사람마다 자신이 가진 ‘직분’이 있으며 자신만의 세계가 있으며 자신만의 ‘아프락사스’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언제나 존재하는 ‘오직 나와 결합되어' 있는 존재였기에 싱클레어가 아프락사스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잠들어있던 데미안을 다시 깨운다,  데미안과 만나면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배우게 되고 시대의 운명인 전쟁에 참여하며 싱클레어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진짜 ‘나’의 모습이었던 싱클레어이자 데미안이었던 ‘참 나’를 만난다. 싱클레어의 아프락사스를 만나는 모습이다.

 

젊었을 때는 아프락사스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었다. 아프락사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막연하게 아프락사스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싱클레어가 보여주는 삶의 여정중 카인과 아벨의 세계를 이해하는 단계에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처음 세계가 나누어지던 ,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 든 그때에 읽었던 데미안과는 사실 많은 차이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데미안의 첫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곳에 헤세는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의 시도이며 좁은 오솔길을 가리켜 보여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건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중략) 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하지만 깊은 심연에서 밖으로 내던져진 하나의 시도인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 라고 쓰여 있었다. 이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데미안》의 데미안이 결국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해석한 글이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살아온 세계가 반쪽 짜리 세계이니 세계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는 헤세의 피상적인 주문이 싱클레어가 데미안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비추어주는 갈등과 고뇌는 바로 내 안의 아프락사스를 만나야 한다는 본질적인 주문이 되는 순간이다. 싱클레어가 십대에 태어나면서 주어진 밝은 세계에서 어두운 세계를 첫 대면하게 되면서 느끼는 감정과 두 번째 세계에서 다시 첫 번째 세계의 사랑을 하고 , 다시 방황을 하면서 두 번째 세계를 만난 후 ,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우리들의 성장하는 모습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 속에 어디에나 아프락사스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런 아프락사스를 만나는 것과 만나지 못하는 삶은 극명한 차이를 가져온다. 마치 두 세계가 공존하지만 섞여지지 않듯이 두 세계의 중심에는 바로 아프락사스가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데미안은 내 청춘의 여정을 반추해주며 다시 한번 아프락사스를 찾게 해주고 있다. 과거 불안했던 청춘의 한자락 같은 데미안은 이제 나의 아프락사스를 위해 존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