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동시에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라고 민주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선출된 위임자는 '비선실세'라는 사적인 특수계급을 창설했고, 국민의 일반의지가 아닌 비선의 이익과 사심에 복무하며 유례없는 '국정농단'에 휘말렸다.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위해, 촛불을 들어 권력자를 교체하는 정당한 권리를 직접 행사했다. 그러나 재판 거래 의혹에 연루된 '사법 농단'은 여전히 진통을 낳고 있다. 아직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회복 중인 셈이다.



열정이 식은 후 이성이 활약할 차례가 왔다. 시민들의 직접행동 이후 공은 다시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국정농단을 막지 못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는 국민의 대표가 촛불혁명의 후반부를 맡았다. 손상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정치권이 너나 할 것 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여기 그 고민에 도움이 되는 고전이 있다. 바로 민주주의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야 말로 최신 발명품이다




민주주의의 지적 재산권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게 있다. 그러나 상식과는 달리, 달은 아테네의 몰락 이후에도 민주주의가 전 세계 각지에서 여러 시기마다 자연발생적으로 발견되고 있음을 사례를 들어 밝힌다. 심지어 북유럽 바이킹에게서조차 팅(Ting)이라는 지방의회와 최고의회인 알팅(Althing)이라는 의회제도의 전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를 꽃피운 아테네의 소도시 민주주의는 시공간의 제약 및 규모의 압박으로 인해 역사상에서 종적을 감추고 만다. 달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서로 직접 대화를 나눌 경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따져가며 논한다. 한마디로 대규모 공동체에 직접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부적합한 체제였다는 것이다.




비용절감의 원칙은 민주주의에도 적용됐다. 불어난 인구와 국가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인류는 아테네가 남긴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에 '대표'라는 중세의 관행을 덧붙여 새로이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발명한다. 여기에 군주 한 사람의 자의적인 횡포를 막고자 '피통치자의 동의'를 중요시 하는 사상이 법에 집약되고, 이것이 다시 법치주의로 발전하게 됐다.




달에게 민주주의란 일종의 절차였으며,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호하고 소수의 독단에 의한 전제정치를 방지하는 유일한 체제였다. 달은 여기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공정한 선거, 표의 등가성, 결정과정의 개방성과 결정의 변경 가능성,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대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을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으로 명시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최신형 대의제 민주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불편한 동거의 미래



민주주의는 세계대전이라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맹렬한 도전에서 살아남아, 20세기를 민주주의 승리와 확산의 시대로 선보였다. 비민주 국가들이 민주화하기 시작했고, 신흥 민주국들은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선진 민주국들은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로버트 달은 2014년 2월 5일 99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꼬박 한 세기를 민주주의를 탐구하며 살아낸 대학자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독재국가조차 자국을 민주주의라 자칭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민주주의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달은 안도하지 않았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71세에 <민주주의>를, 92세의 나이에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를 저술하면서, 말년에 집중적으로 경제적 불평등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탐색했다. 특히 시장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의 모순적인 결합과 그 불안한 미래에 관하여 진지한 고찰을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시장자본주의는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며 민주화를 이끌었다. 자유경쟁은 정치권력의 자원독점을 방지해, 권력자의 횡포에서 개인들을 해방하는 촉매로 기능했다. 그러나 보편적 민주화 이후, 오늘 날의 자본주의 뿜어내는 경제적 불평등은 이내 민주주의의 근간인 시민 간의 정치적 평등에 아주 중대한 손상을 가하고 있다고 달은 말한다. 경제력의 격차가 이내 정치적 발언과 참여의 기회의 격차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8년 올해 동명사에서 새로 펴낸 <민주주의> 증보판은 이전 판과는 달리, 달의 제자 이안 사피로의 보론 두 개가 추가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안 사피로는 스승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경제적 불평등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덧붙였다.



그가 핵심을 가해 비판하는 것은 "돈도 곧 표현의 자유다"라고 못 박으며, 미국의 무제한 돈 선거를 촉발시킨 미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사피로에 따르면 빈곤층은 투표 밖에 참여 할 수 없지만, 부유층은 추가적으로 선거 자금을 보탤 수 있다. 그의 지적은 한마디로 부유층은 투표와 운동 두 가지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치적 평등이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이 해친 자리에는 민주주의의 퇴행이 찾아와



달은 어떠한 현실의 정치체제도 완벽한 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함을 말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정치가 끝까지 민주주의의 이상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이상이지만 닮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현실인 셈이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민주주의의 긴 역사에서 숱한 퇴행과 일시적 좌절은 있었으나, 그 진보와 확산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기본을 다시 세우려는 한국의 현 정세에 달의 <민주주의>는 적지 않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본 서평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7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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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8-12-12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수정권 9년, 민주주의의 퇴행과정을 적나라하게 서술했더니 그만 편집과정에서 다 삭제되었습니다.....정말 밋밋하고 보잘 것 없네요..
 




1.  


나는 음성 매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음성은 휘발되기 쉽다. 말은 논리공백이나 비약을 얼버무려서 넘어가기 좋다. 정치 뒷담화는 재미로 듣는 것인데, 몰입하고 믿는 순간 종교가 될 확률이 크다. 팟캐스트에서는 재미(혹은 분노)와 논리가 구별이 잘 안간다. 반면, 활자에는 틈이 적다. 있어도 금방 들통 난다. 더군다나 내용을 습득하는데 나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단단하다.

 


2.


기본적으로 자기 읽을거리는 자기가 골라야 한다. 요새 언론의 수준이 처참하고, 아무리 기레기들이 활개 친다지만 선구안을 기르는 것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다. 페북에 좋은 글 쓰시는 분도 많다. 주간지 정도로 고르면 성향 안따지고 지뢰밟을 확률이 적다. 언론에 대한 반감과 신뢰성 부족으로 팟캐스트를 고른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어차피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니 진짜 조선왕조로 회귀하자라는 말로 들린다. 불량식품은 맛있지만 탈이 날 확률이 높다.


 
3.



싸움의 시대가 가고 건설의 시대가 오면, 진짜 실력이 뽀록난다. 보수정권 9년에서는 사방천지가 다 적이니, 어딜 향해 던지든 누구 하나는 맞았다. 그러나 우리가 집권한 이상 무언가를 비판하는 것에서 창조하는 곳으로 영역이 옮겨온다. 그럼 전문가와 장사꾼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보수 시절에 전문가인줄 알았던 양반들이 몇몇 국면에서 본 실력의 하찮음이 드러난다던가 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해진다. 전문가는 방법을 찾지만, 장사꾼은 음모를 찾는다. 팟캐스트가 다루는 영역은 주로 후자다.

 


4.


아 무엇보다도, 정치학 4년 배우고 대학원까지 다니면, 음악 듣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다. 굳이 재미로 듣자면 차라리 침펄토론을 보자. 팟캐스트보다 침펄 토론이 훨씬 더 유익하다. 제발 한국인이라면 호랑이 응원합시다.



-2018.11.25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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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국의 동물들이 단결한 날이 있었다. 그날 자본주의 농장은 뒤집어졌다. 왕후장상의 씨를 감별하고, 뼈에도 품질을 매기며 성골이니 진골이니 6두품이니 꼭 급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던 호모 사피엔스의 못된 버르장머리가 동물들의 반란에 잘려나간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적 파괴의 빛이 내렸고, 차별의 제국은 평등의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모두가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그런 신천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승리의 감동과 혁명의 열정이 온 세상을 북돋웠다. 그러나 옛말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달콤한 달밤도 잠시, 공화국의 두뇌를 접수한 돼지와 이빨과 발톱을 과점한 개들의 눈빛이 시퍼렇게 변한다. 마침내 돼지가 위스키에 빠진 날, 혁명의 순수함과 동물들의 순진함은 그날로 끝이 났다.


 

모든 독재자는 소싯적의 영웅이었다. 영웅은 악을 무찌르고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한다. 그러나 영웅의 존재는 악마로 증명되는 법. 악마가 없는 영웅은 어떻게든 변하고 만다. 초라한 실업자거나 험악한 독재자거나. 영웅은 악마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용사는 여러 차례 괴물을 찾아다니며 무찌른다. 괴물이 없다면 만들어낸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순진한 망상이 아니다. 권모와 술수와 야심과 계략으로 만들어낸 허수아비를 베어가며 독재자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돼지의 탈을 쓴 공산주의나 인두겁을 한 자본주의나 모두 권력 중독자들의 타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인간의 내면이 무너지는 틈을 타, 파우스트식 계약을 넌지시 내미는 권력의 악마가 속삭인다. “그대에게 지배와 복종과 부귀영화에 사치향락이 함께하리다. 나와 계약을 맺지 않겠소?” 중요한 것은 체제나 이념이 아니다. 악마의 꼬드김에 순수한 열정을 보호할 두터운 내면이다. 오로지 인간성을 수호하는 자만이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대개, 괴물이 죽고 난 자리에서 피를 뒤집어쓴 용사는 괴물로 타락하고 만다. 마르크스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었지만, 속세의 권력은 용사들의 사탄이자 아편이었다. 숭배된다는 점에서 영웅과 악마는 동일하다. 한때의 용사는 단지 영웅 지망생이자 잠재적 견습 악마인 셈이다. 이제 영웅은 다시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시켜 지배할 뿐이다.

 


내면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내지 못한 채, 외적인 부조리만 부숴내는 것은 절반의 혁명이다. 혁명은 반쪽으로 성공할 수 없다. 승리에 도취해 도덕을 재무장하지 못한 영웅은 타락한다. 신과 사탄은 항상 한 끗의 경계에 있다. 도덕 없는 힘은 천국을 삽시간에 지옥으로 만든다. 이렇듯 오웰의 동물농장은 좌절한 혁명과 변절한 영웅에 대한 일종의 추도사라 할 수 있다.

 


아아. 파스칼이여. 나는 인간의 옷을 입은 돼지의 모습과 돼지머리에 제사를 지내는 인간의 모습을 모두 기억하노라. 아아. 갈기갈기 찢긴 교향곡 <영웅>이여. 베토벤의 좌절이여. 나는 그대의 실망을 추모하노라.

 

 



2.

 

미문(美文)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던 한 사내는 정치적 격랑기에 눈을 뜬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권력의 야비함에 맞설 비판의 칼날을 간다. 통제와 검열의 시대에 작가는 오로지 외로운 혁명의 저격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가장 정치적인 글쓰기로써 풍자와 문학의 게릴라로 권력과 감시의 폭력에 대들었다. 겁이 없어 비겁할 수 없었던 조지 오웰.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야비했던 철권 통치자에 날카로운 펜촉으로 맞섰던 반골의 자유인이자, 전체주의를 혐오하며 표현의 자유를 사랑했던 떠돌이 방랑 검객이었다.

 


오웰은 조준경을 통해 동물농장에서 혁명이 배신당하는 과정 및 권력 탈취가 낳은 강철 돼지들의 디스토피아를 관찰했다. 이어 그는 활자의 탄약을 장전한 뒤, 인간을 소모품으로 치부하는 온갖 전체주의의 차가운 심장을 겨누었다. 차가운 심장은 차가운 피를 흘려보내 이내 뜨거운 생각을 잠재우고 비판 의식을 거세하며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드는 전체주의적 심성을 주입한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이들은 꾀부리지 않고 그저 열심히만 할 줄 아는 착한 이가 되고 만다. 자신은 갈빗대를 훤히 드러낸 채, 돼지들의 살을 찌우면서 말이다. 착하기만 한 이들을 위한 칼로리는 없다. 동물의 법칙은 이제 동물 농장의 기율이 된다.

 


만일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도구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동물농장의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재발한다는 것을 오웰은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사상마저도 이다지도 손쉽게 타락하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내가 더 열심히라는 무비판적 성실은 불만이 설 자리를 없앤다는 것을, 양 떼들의 단순하지만 큰 목소리는 묵묵부답이 보여주는 또 다른 진실을 질식시키고야 만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한 성실함은 조작된 기록에 맞춰 진실한 기억을 수정하는 데까지 열심이었고, 감히 의심하고 비판하는 데는 심히 게을렀다. 그 결과는 성실한 복서의 노년이 요양원이 아닌 도축장이었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3.

 

한국이 싫어서, 또 한국이 좋아서, 한국 사람이라서 한국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안함은 옳고 세월호는 나쁘다!”

 

양 떼들이 폭식을 하며 소리쳤다. 하루 치 저열함이 최고조로 폭발한다. 굶고 있는 유가족들은 멍하니 어린 양들을 바라본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다. 스퀼러가 말한다. 지상 최고의 구조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한강 다리는, 아니 세월호는 안전합니다.”풍차는 무너졌고, 구조는 실패했다.

 


다시 양 떼들의 고함이 온 세상을 울린다. 요란 법석한 구호뿐, 천안함은 천안함대로 세월호는 세월호대로 엉터리 공화국에서 분열된 채 가라앉는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유유히 퇴장한다. 몰래 우유를 마시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우유를 빼돌리듯 세금과 기업의 곳간을 털어갔다. 검은 목록의 문화 예술인들이 있었고, 자기검열에 피로해진 시민들의 자조 섞인 농담이 있었다. “판사님 죄송합니다.”



눈치 없는 한 공무원이 민중이야말로 개돼지라며 힐난했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개와 돼지들의 시대였다. 벗어난 줄만 알았던 동물농장으로 다시 역행하고 있던 것이다. 거짓과 권력의 기만적 합작이 또다시 반복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나는 좌절했다. 권력의 오남용이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만성질환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게다.



한국의 산업 전사들은 풍차를 타고 날아가 독일에서 중동에서, 탄광 먼지와 모래 바람과 싸우며 가난한 나라를 일으켰다. 한국의 풍차는 실제로 잘 돌았다. 그러나 한국의 복서들은 내가 더 열심히를 외치면서도, 숨이 차오르도록 발 벗고 뛰며 일하면서도, 가끔 막걸리를 마시다 참지 못한 울화로 인해 보안법 위반죄로 끌려가면서도,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이 땅의 복서들은 산업전사면서 민주투사였다. 그러나 오웰의 우울한 시선처럼 한국에서도 혁명은 매번 좌절과 배신의 연속이었다. 419일의 혁명은 516일에 좌절당했고, 518일의 운동은 군홧발에 짓눌렸으며, 6월의 항쟁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배반되었다. 하지만 성실하면서도 차근차근 민주주의를 가꾸어 내더니,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자유로운 산업 국가를 이룩해냈다. 38선 이북에서는 여전히 빅 브라더가 살아있는 것과 아주 대조적으로 말이다. 오웰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반절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던 셈이다.

 


그러다 잠시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유행성 독감처럼, 수두에 걸린 신생아가 노곤한 노년에 재차 대상포진을 앓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큰 몸살에 떨었다. 나무 밑동에 이를 갈던 개들은 계엄을 준비했고, 복서는 굳건한 두 다리로 촛불을 들었다. 외신을 번역하면서. 글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전공을 십분 발휘하면서. 그렇게 스퀼러가 설 자리를 없애버리면서. 78기의 정신으로. 이번에는 꼭 지켜내겠다는 믿음으로. 굳건한 내면이야말로 민주국가의 면역체계다. 독재국가의 뇌는 지도자의 뇌지만, 민주 공화국의 뇌는 시민들의 집단지성의 온전한 실현이다. 몸살이 멈춘다. 농장은 광장이 된다.

 


좌절했던 나는 다시 일어선다. 발굽 없는 두 다리로. 먼지 묻은 손바닥을 털어내면서. 정치적 글쓰기를 알려준 오웰을 떠올리면서. 나는 역사 곳곳에서 황제가 된 양치기 소년을 생각한다. 동시에 영웅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는다. 오직 한 사람만이 영웅이던 시절은 갔다. 모든 시민이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모든 영웅의 평준화, 영웅의 평범성. 악마는 더는 쉽게 꾀어내지 못한다. 타락을 권유할 영웅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위로를, 양들에게 침묵을. 권력에는 책임을, 언론에 정직을. 역사에 반성을, 미래에 교훈을. 시민에게 자유를. 평범해서 위대한,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적을 무찌르는 무적 필법이 아닌 치유의 글을 쓰고 싶다. 한국의 흉터를 보듬고 싶다. 인간의 무의식은 절대로 지배당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권력의 비열함이 침투케 하지 못할 두터운 내면을 위해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정치적 글쓰기가 치유의 작문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도하는 마음에서, 나는 우리의 희망을 응원한다. 순박한 사람들의 미소를 위하여.  


※본 서평은 협성문화재단에서 주최한 2018년 제7회 협성독서왕 독후감 공모의 입선작입니다. 서평의 저작권은 글쓴이와 협성문화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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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11-2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프리즘 님 서평 !

프리즘메이커 2018-11-29 23:42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뫼르소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시큰둥하고 무덤덤하게 세상을 삽니다. 이미 가버린 과거의 추억보다 오늘의 기쁨이 중요합니다. 어제, 아니면 오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만, 그것은 삶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여인과 몸을 섞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친구를 사귀는데, 그 친구의 치정문제에 엮입니다. 남의 싸움에 휘말린 뫼르소는 졸지에 아랍인을 죽여 재판을 받습니다. 칼날에 햇빛이 번뜩여 총을 쏘았답니다. 판결이 나옵니다. 사형.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뫼르소라는 한 이방인에 대해 카뮈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고작 몇 가지 전혀 관계없는 상황으로 한 인간의 내면과 인생 전반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원래 미친 사람이 결국 저질렀구나’를 원하는 사회의 시선은 뫼르소라는 사람의 인생을 제 입맛대로 짜 맞춥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솔직을 강요하는 세상의 위선, 이것이 바로 카뮈가 지적하는 ‘부조리’인 것이지요.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는 의지의 인간형이 있습니다. 사는 거 마음대로 되는 게 몇 없으니, 큰 기대하지 말자 믿는 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의 긍정형 인간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인간이 있다면, ‘꼭 뭐가 되어야 하오?’라고 반문하는 잘생긴 룸펜도 있습니다. 사소한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도저히 잠 못 드는 사람, 귀찮음이 억울함에 앞서는 뫼르소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오해의 간격이란 결코 좁힐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합니다. 망막에 맺혀 마음을 거쳐 간 활자의 수만큼, 지면의 여백에 한 사람의 세계가 가득 채워지는 것.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는 타인의 내면을 부드럽게 훔쳐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고집스럽게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인간 내면의 복잡함, 세상만사의 우여곡절을 조금씩 알게 되면, 한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워집니다. 누군가는 예의 없이 함부로 넘기도, 벽에 숨기도 합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읽고 싶습니다. 우리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가끔은 가깝게 하고 살자고 말입니다. 이방인들의 독서,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는 편견 덩어리에 앞으로도 성급한 실수를 반복하여 저지를 테지만, 적어도 한 권씩 거쳐 가는 책과의 만남 속에서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 어쩌면 조금도 가까워질 수 없는 당신과 나는 한 달에 한 걸음씩, 일 년이면 열 두 발자국이나 가까워질지 모른다는 묘한 설렘을 기대합니다. 당신의 서사를 탐냅니다. 한 이방인이 다른 이방인에게.

나호선 (정치외교학 석사 17)


본 서평은 필자가 <부대신문>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7802&fbclid=IwAR0ETDqUgxjkuqMmIJT9hkWMglS-u-RltfdDdBrBFfhSZdMfCx6st1ZQO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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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그 사랑에는 순서도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제 망설일 것도, 앞으로 달성할 것도 없다고.
그냥 만나서 함께 숨을 쉬자고. 그거면 됐다고.
또 한 번 기록한다.

2018.11.3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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