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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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스페인 내전> -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한 사람의 절정이 담겨 있는 역작을 읽을 때의 기쁨이란 것이 있다. 8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육중한 두께의 이 역사책과 나는 무려 10일을 함께 했으나, 지겨움과 버거움없이 술술 페이지를 넘겨 나갔다. 앤터니 비버는 복잡하고 방대한 스페인 내전의 역사를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필체로 풀어 나간다. 그가 평생을 연구하고 수집했을 빽빽한 자료를 씨실과 날실로 잘 엮어 아주 훌륭한 책을 뽑았다. 번역자 김원중씨의 깔끔한 번역은 이 책이 주는 풍미를 전혀 해치지 않았으며, 친절하게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역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스페인 내전의 시작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좌파정부를 군부를 필두로한 우파세력이 불복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앤터니 비버는 그것은 당시 스페인 정치 세력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이는 양비론이 아닌 명확한 사실이다. 선거 직전 좌파는 선거에서 진다면, 폭력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우파는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 공언했다. 단지 선거에서 좌파가 근소하게 승리했을 뿐이었다.

정부 공화파는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했고, 반란군 우파는 쿠데타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전선이 교착되었다. 쿠데타는 이제 내전이 되었고, 적색테러와 백색테러가 난무했다. 반군의 수장 프랑코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좌파는 소련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전은 이내 국제전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평범한 스페인 사람들은 이념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배가 고파서 참전한게 다수였다. 전쟁이란 원래 지배층의 말겨룸이 민중에겐 생사의 결단이 되는 그런 잔악한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프랑코의 국민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데 반해, 소련은 소극적으로 지지하며, 스페인 내전을 공산당 세력확장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 내전이 세계대전으로 확장될까 우려하며 효력없는 중립을 고집했다. 특히 영국은 파시스트들이 공산당을 유럽에서 몰아내주기를 바라며, 내심 국민군을 응원했다. 프랑코의 군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지원한 압도적인 공군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반면 스탈린은 막대한 금을 갈취하면서도 구식 무기를 지원하였고, 소련의 지령을 받은 스페인 공산당은 스페인의 권력을 탈취한 뒤, 자신에게 반하는 아나키스트를 비롯한 다른 좌파세력 숙청작업에 돌입한다. 공화파는 한 편으로는 국민군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이 일으킨 권력투쟁에 휘말린다. 권력을 쥔 공산당은 체면과 권위를 위해 어처구니 없는 전투를 반복하다, 막대한 희생만 치루고 결국 패배한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가 잘해서가 아니라 공산당이 못해서 졌다.

앤터니 비버는 어느 한쪽 편을 들지도 않으면서 한 챕터씩 교차로 양측의 객관적인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민군의 실수, 공화군의 실수 가릴 것없이 인물과 사건과 상황의 정황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있다. 군데군데 관련된 유명인사들의 일화 및 관계에 대한 부연설명은 비버가 우리에게 주는 보너스이기도 하다. 혁명과 쿠데타, 그리고 강대국들의 손익계산서에 희생된 것은 스페인의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그는 책임소재를 섣부르게 예단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택했다. 그것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장점일 것이다.

앤터니 비버가 재현한 혼돈의 역사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지 또한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스페인의 지방명, 이를테면 안달루시아,아라곤,카스티야에 관한 간략한 지도가 없는 게 약간의 흠이지만, 스페인 내전에 관해 자세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배우고 싶은 이에게 매우 권하는 책이다. 다소 두꺼운 분량은 간결한 문체와 구성이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이 책에 들일 비용과 시간은 절대 아깝지 않을 것이다.


-본 리뷰와 리뷰 속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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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2-12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대단하심다.
엄청 두꺼운 책인데...!
완독 스타일이신가 봅니다.^^

프리즘메이커 2018-02-12 17:40   좋아요 2 | URL
네 그렇습니다. 성격이 끝을 보지 않으면 안되는 스타일입니다.. 이걸로 각잡고 써야할 글도 있구요ㅠ 저는 책 표지에 손바닥으로 길을 낼 때와 마지막장을 덮을때 퉁하는 그 느낌때문에 책을 완독하나 봅니다 ㅎㅎ

stella.K 2018-02-12 18:26   좋아요 1 | URL
저도 가급적 완독을 하려고 합니다.
요즘엔 꼭 완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있는데 뭐 그게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완독을 하고 안 하고는 뭔가 다른 것 같긴 하더라구요.
독서의 만족도가 좀 다르다고나 할까?
또 그게 습관이 되면 완독은 평생 못할지도 몰라요.
자기 좋아하는 책은 완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ㅋ
 




본 책은 임마누엘 칸트의 역사 철학과 관련한 논문 모음집이다.


총 7가지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 페이퍼에서는 아래 두 가지 논문만을 다루기로 한다. 



1.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6. <다시 제기된 문제: 인류는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진보하고 있는가?






1. 인간은 도덕세계에 있기에 존엄하다



인간은 오묘하고 복잡한 존재다. 인류는 동물에서 시작하여 고등사유 능력을 가진 인격체로 진화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동물처럼 쾌락과 충동에 이끌리며 살면서도, 동시에 도덕법칙을 구축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당시 철학자들은 이를 두고 감각과 이성의 문제로 설전을 벌였다. 철학사에서 말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두 전통이다. 칸트는 이성과 느낌에 각각 합당한 자리를 마련 하여[1], 인간이라는 이 복잡 미묘한 존재를 규명하려 했다.

 


칸트는 철저히 자연세계와 도덕세계를 엄격히 구별했다. 자연세계는 야생으로 식욕과 성욕으로 가득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이 세계의 지배원칙은 서슬 퍼런 발톱과 핏기어린 이빨에서 비롯된다. 본능과 충동에 따른 자연법칙이자 어쩔 수 없이 생명체에 내장된 타율법칙이다. 단지 동물들은 이미 주어진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법칙을 거스를 이성의 힘이 있다. 이는 곧 동물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도 대체로 동물의 법칙으로 일상을 영위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스로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본능과 충동의 법칙에 구속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지배할 자기헌법과 이성의 왕국을 만들 능력과 권리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하다. 날씨는 흐렸다 개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은 높았다 낮았다 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도덕세계를 직접 만듦으로써 스스로 존엄해진다.



[1표정훈.철학을 켜다. 을유문화사. 2013. p.230에서 인용

 




2. 용기있는 자가 자유롭다



칸트가 묻는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답 한다. 계몽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계몽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대다수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성체로서 스스로 판단할 자유와 책임의 무게를 아는 것이다. 칸트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책임지고 판단하기 보단 권위 있는 타자에 의존하고 결정을 내맡겨버리는 것을 속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타고난 인간이 이성의 사용처를 스스로 막아버리는 이유는 무식하거나 지능이 낮아서가 아니다. 바로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홀로서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타자에 복종하고 지배받던 삶에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배할 헌법과 관리책임을 맡는다는 것 이 생소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동물적 복종의 세계에서 인간적 사유능력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 스스로 깨달아야한다. 깨달은 자는 박차고 나와야 한다. 도덕의 세계에서 자유의 주체로서 책임의 무게를 용기 있게 감수해야한다. 자유의 비결은 역시 용기뿐이다.






3. 자연인, 자유인 그리고 세계시민

 


칸트는 진보의 조건을 자유를 부여받은 존재의 행위로 보았다.[2]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보와 인류의 진보는 맞물린 것으로 보았다. 역사발전은 인류의 진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역사가 퇴보한다고, 또 어떤 이는 반복 된다 믿지만, 사실은 진보하고 있다. 인간 안에 이성의 불꽃이 잠재 되어있는 한, 진보의 불길은 언제고 일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보의 불길은 어떻게 확산되는가?

 


칸트는 인간을 3단계로 보았다. 인류는 동물의 법칙에 예속된 자연인, 용기를 통해 깨우친 자유인, 공적이성을 발휘하여 영구평화에 도달한 세계시민 순으로 발전한다. 그렇기에 칸트는 전쟁을 혐오했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부추기며, 타락을 강제한다. 인간세상을 피투성이로, 도덕법칙의 세계를 야생의 세계로 퇴보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이 사라지는 영구평화의 세계를 꿈꿨고, 그것이 인류전체의 목표이며 결국엔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단계는 전쟁이 멸종한 영구 평화시대의 세계시민이다. 생물학의 한 종으로서의 인류가 자유와 책임을 지는 사회적 어른으로, 그 어른이 다시 공적이성을 갈고닦아 세계시민으로 변증법[3]적으로 발전을 거친다. 즉 용기의 결핍을 극복하는 것이 자유의 확산, 공적이성의 보편화를 촉발 시킬 것이다. 전쟁을 저지르는 것이 동물적 본성이라면 평화를 창조하는 것은 인류의 능력이자 과제인 것이다.

 


보편적 도덕원칙은 머리를 공명시키고 가슴을 공감시킬 것이다. 보편적 도덕원칙이 보편적 통치원칙으로 제정되면 정언명법의 세계화가, 자연법의 보편화가, 만인의 만인에 관한 평화상태가 창조 될 것이다. 진보란 용기의 계몽이 자유를, 자유의 번식이 영구평화를 몰아오는 과정인 것이다정말이지 칸트의 꿈, 엄청나다.

 


[2]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역.칸트의 역사 철학. 서광사. 2015. p128 인용

[3] 본문에서의 변증법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해나간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하였다.



※ 참 고 문 헌  




※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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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8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8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폴 라파르그는 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며 또 운동가다그는 마르크스가 생전에 그렇게 싫어했던 프루동주의자로 정치활동에 데뷔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와 교류한 뒤 정통 마르크스 주의자로 전향했다. 마르크스의 둘째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했고, 그 역시 엥겔스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69세가 되자 늙은 몸으로는 운동에 기여할 수 없어 아내와 동반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했다. 마르크스 일가에는 어떤 묘한 피가 흐르나보다. 그의 최후를 보면 나는 항상 그런 생각에 잠긴다.






1. 버티는 삶에 관하여

 


소제목이 쓰라리다. 안 해본 알바가 없었다. 젊은 날 뿐만 아니라 늘 빈곤했고, 커서는 자립해야만 했다. 돈이 급했다. 등록금이야 공부 좀 하고 장학금을 받으면 됐지만,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늘 문제였다. 야간 편의점·대형마트·예식장·뷔페·학원·이사 등 일거리가 있다면 닥치는 대로 뛰어들었다. 임금수준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일단 일거리가 있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했다. 시간당 만원을 넘어서게 받은 적도 있지만, 야간에 일하고도 푼돈 4천원을 겨우 넣은 적도 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육신이 고통스러웠던 노동은 설날을 대비하는 마트 알바였다. 앞에 다른 일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문제였다. 가령 친구는 유럽에 놀러가 있는데, 난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먼지나 들이 마시며 등짐을 질 때 빚어지는 그런류의 비애감이었다. 그러나 이 알바는 정말이지 45일간 육신이 녹아내리는 경험이었다. 슬플 겨를도 힘도 없었다. 12시간 노동이야기 하는데 나는 13시간을 했다. 매일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에 퇴근했다. 식사는 하루 30분씩 2, 물론 식대는 없었다.

 


6일을 꼬박 다 채워 일했다. 13x6, 무려 주당 78시간을 일했다. 버텨야 했다. 매일 걷는 길에 잠시 망각되었던 통각이 돌아왔다. 발이 저렸다. 발바닥이 항상 아파왔다. 걷는 게 고역이었다. 족저근막염을 앓았다. 자다가 늘 연필을 꽉 쥐고 쉴 새 없이 글을 쓴 것처럼 팔이 저려 깨길 반복했다.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식은 항상 자거나 목욕탕에서 근육을 풀어줘야 했다. 내 몸에 체취는 사라졌고 파스냄새가 대신했다. 하루하루가 소모전이었고 참호전 이었다. 버티는 삶의 연속이었다.

 


수십 번을 도망치고 싶었다. 탈주기도는 늘 머릿속에서만 그쳤다. 설령 도망친다 해도 세상이, 이 나라의 경제가 나를추노(追奴)’할 테니까. 이 상황에서 나는 개인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일 년에 40여권 가량 책을 읽는 본인은 단 한권의 책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나 피곤하고 당장 아파 죽겠는데 잠이나 자야지, 책이 뭐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내가 알게 뭐람!’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래서 깨달았너무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사람은 체제의 변화와 부조리의 시정을 이야기할 여력도 관심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그래서 빈곤보수의 등장을 

깊이 있게 포착한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몰입해서 읽었다내 삶이 몸으로 깨달은 내용을 참 잘 정리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2. 자본주의 정신과 저주받은 노동윤리, 그리고 피로사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면, 사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지금이야 당연히 월급 오를 때 바짝 시간 늘려 일해서 최대한 많이 벌어두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월급이 오르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먹고 놀았다. 이윤보다는 자신의 삶과 만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에세이 건투를 빈다에서도 이 같은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아테네 올림픽 때 만난 그리스의 어부는 고품질의 물고기는 자신과 가족이 먹고, 남은 물고기를 시장에 팔았다. 한다. 더 비싸게 팔아 돈 좀 더 안 벌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 보려는 오늘날의 사고방식과 반대였다. 무언가 어느 날 세상의 영혼통치술이 바뀐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항상 필요 이상을 생산한다. 체제의 소화력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증식욕구대로 무한정 제품들을 쏟아낸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휴식과 여가를 즐길 균형 상태를 이 체제는 허락하지 않는다. 과잉생산과 과잉공급이 야기한 불균형은 노동자를 굶주림으로, 자본가를 탐욕의 굴레로 밀어 넣는다. 노동자는 과잉 노동을 담당하고 자본가는 과소비를 도맡게 된다. 주기적 공황은 자본주의의 예고된 고질병이다.

 


기존의 좌파 이론가들은 자본가 계급이나 자본주의 구조자체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파르그는 노동자의 잘못도 아울러 지적한다. 즉 노동자 스스로가 자본가 계급의 윤리의식과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경제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과소비와 낭비만하는 유한계급으로, 노동자는 생산의 고역을 담당하는 무산계급으로 불균등한 역할배분에 동조하고 부역했다는 것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착취가 나쁘다면서 왜 그렇게 사람들은 착취(고용)당하길 원하는가?’ 라며 마르크스주의자를 공격한다. 라파르그는 잘못된 노동윤리가 퍼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노동윤리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동은 신성한것이며 게으름은 악이라는 자본가들의 윤리를 노동자계급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너도 나도 일단 앞뒤 재지 않고 일하려 들기 때문에, 항상 노동의 과공급이 발생하고, 노동조건은 계속해서 열악해진다. 일단 일부터 하자는 발상을 노동자 스스로 끊어야 이 바닥을 향한 경쟁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르트르 식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노동하도록 저주받은 존재다. 아니 자본주의 체제하의 인간은 노동하도록 세뇌당한 존재가 더 옳겠다. 우리는 항상 노동이 신성하다고 배웠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와 같은 직설적인 것에서부터, 세련된 포장지를 둘러싼 노오력자아실현까지 말이다. 특히 한국인은 더 그렇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밤낮없이 가장 열심히, 가장 오래 일하면서 노는데 죄의식을 느끼는 나라다. 이쯤 되면 노동윤리가 아니라 노동저주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런 라파르그의 문제의식을 물려받은 현대의 철학자는 한병철이다. 그는 자신의 저작 피로사회에서는 착취방식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기존의 착취방식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한경쟁을 강요하며, 기계에 의해 축출될 예비실업자들이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다. 새 시대에는 구시대적 계급착취에 새 시대적 자기착취가 포개졌다. 자기착취의 고리에 얽힌 자는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의 과다 지출을 내면화한다.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한경쟁에 스스로를 감사히내던진다. 병든 노동윤리는 이제 유한한 인간 존재를 환각시켜, 사람을 자본주의의 가미카제 전사로 탈바꿈 시킨다.


 


신자유주의가 탈구축한 한국은 피로사회다. 집단적 일중독 상태에 놓여있다. OECD 통계가 너무 많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는 공부하다 죽고 어른은 일하다 과로사 한다. 늙어서 폐지 줍다 병사한다. 그 과로할 일자리조차 없어 과로사 직행열차에 태워달라고 고용을 요구하는 형국이다. 이러니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도 부릴 수가 없다.

 


최근에야 한국에서도 게으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김정운 교수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에서 기존의 노동과 여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비판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주장했다. 전쟁보다 자살과 과로로 더 많이 죽는 이 나라에서 위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직 한심한 전 정권의 여당 대표는 복지하면 국민이 게을러진다며 핀잔하지만 말이다.


 


3. 기계화 시대의 게으름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에세이 보다에 일본소설 한 구절을 인용했다. 너무 인상 깊었기에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이해가 안 되네. 로봇은 고장 나면 큰돈을 들여 고쳐야 하지만 나는 다쳐도 좀 쉬면 낫는데……. 게다가 건강보험도 들어있어 치료비도 거의 안 드는데, 웬만하면 값싼 나를 쓰지 우스우면서도 꽤 슬픈 이야기다.


 


기계가 발전하면 기계가 줄여주는 만큼 인간은 쉬고 놀아야한다. 라파르그는 하루 최대 3시간 노동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인간이 쉬는 만큼 기계의 힘이 메워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더 발전된 기계로 더 사람을 굴린다. 기계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인간은 즉각 교체된다. 기술발전과 기계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기계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즉 기계의 증대된 생산력을 노동해방의 구세주가 아닌, 착취율을 증가에 앞잡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노는 것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게으름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기에 라파르그식 진보는 본성 회귀적이다.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맡고 인간은 노동고역에서 해방된 뒤 자유로이 노니는 세상. 게으를 권리는 이른바 노동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뜻한다. 인간 본성의 회복이다. 기계로 인해 인간은 게을러 질 수 있다. 우리는 게으름을 위해 기계를 사용할 수 있다. 게으름은 축복이다. 기계는 모든 인간을 유한계급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문제의식을 여기에 집중해야한다.

 



4. 게으름은 진보의 원동력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말미암은 계급투쟁이야 말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 말했다. 진보의 원동력을 투쟁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베블런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피곤해서 투쟁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는 가뜩이나 피곤해 버티기에 급급한 노동자에게 투쟁까지 요구한 무심한 사람일 수도 있다. 라파르그의 말처럼 인간은 육체적 발전이 정점에 이르러야만 최상의 에너지와 도덕적 활력을 얻기때문이다. 피로에 찌들어 노곤한 육신을 달래기에도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이나, 하루하루 밥벌이의 지겨움에 종속된 자는 버틸 뿐 발전할 수 없다.

 


역사발전 5단계 이론에서 다음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물적 잉여가 축적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무언가를 많이 생산해서 진보하던 시절은 지났다. 관념 차원에서의 진보역시 함께 가야한다. 정신적 잉여는 게으름이다. 게으름을 축적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즐기고 놀아야한다. 자본이 뭐라고 하든 말이다! 우리의 놀이와 작당에서 창조가 비롯된다. 21세기 게으름은 단순한 재충전과 재생산을 넘어 창조의 밑거름이다.

 


부지런의 대명사인 개미집단에조차 게으름뱅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쉴 새 없이 일하는 개미 중 20-30%는 놀고먹는다. 자연의 섭리는 이들에게도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이 놀아야 집단이 장기 존속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미가 일해 피로가 쌓일 경우,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 반면 게으른 개미가 한 축을 차지하는 집단은 변화에 유연하다. 덕택에 오래 존속 할 수 있다. 이렇듯 게으름은 유연성을 낳는다. 자연의 법칙이다.

 


신자유주의는 비효율을 적출해낸다고 하지만, 마른수건 쥐어짜기의 명백한 퇴보다. 위기에 한방에 무너지는 비상사태다. 사람이 어찌 무한정 전시상태로 살 수 있을까? 위기에 짓눌려 눈에 보이지 않는 평형수의 중요성을 간과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모두에게 부지런을 강요하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동력을 요구하는 현 체제가 개미집단에게 배워야 할 차례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어서 게으름을 허하라.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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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백의 일주일, 그리고 근황


 라식 15개월차 시력검사를 했는데 좌안 1.2/우안 1.0이 나오더군요.

저는 생물학적으로 좌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활자중독으로 일시적으로 근시가 왔다네요.

그래서 적힌 시력만큼 안보이고 어두침침 한거라고.. 

꽤나 명예로운 진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눈 좀 쉬고 돌릴겸,

부산에 일주일간 요양을 갖다 왔습니다.




2. <자유론> 삼형제

 

밀의 <자유론>은 원래 쓰고 있는 책의 한 챕터를 담당하는 고전인데, 

글이 안 써지길래 그냥 세 종류를 비교하는 포스팅을 한번..(쿨럭)


글쓴이는 맨 오른 쪽 펭귄 클래식 문고판을 예쁘다는 이유로 샀는 데, 

번역이 영.. 

그래서 다른 번역판을 급하게 부산의 지인들에게 찡찡거려 얻어왔습니다.

그렇게 받아온 게 가운데 책세상 문고판과 좌측 문예출판사 단행본입니다.





3. 본격 비교



펭귄클래식의 자유론(권기돈 선생 번역)


장점 : 예쁩니다. 심플하게 예쁩니다. 포켓북이라 예뻐요.

가격이 쌉니다.(7,700원->6,930원 -10%)


단점: 번역에 한자투가 심합니다.

대표적으로 오류가 없다를 '무류' 혹은 '무류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전 번역은 평준화 되어있어 해설판과 역자후기도 중요합니다만,

역자후기도 너무 볼게 없고, 해설판은 외국 학자의 평을 그대로 번역해왔습니다. 

가뜩이나 딱딱한 번역에, 외국학자 해설판을 재번역한 것이 더해지니

너무 학술적이고 고루한 느낌을 줍니다.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


추천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저같이 펭귄클래식의 문고판을 시리즈로 모으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읽고 활용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권하지 않습니다. 





② 문예출판사의 자유론(박홍규 선생 번역)


장점 : 문고판이 아니라 큽니다. 

그래서 편집상의 가독성이 좋습니다.

단행본치고 저렴합니다. (10,000원->9,000원 -10%)

한자투지만 비교적 깔끔합니다.

 흐름에 따라 적절한 소제목을 달아두어

내용 파악이 쉽습니다.


단점: 그러나 역시 한자를 세련되게 잘 이용했다고 한들,

법학자 특유의 현학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루합니다.

가끔 멋있는 번역이 있어 인용을 하고 싶은 욕구가 종종 생깁니다만,

그와 맞먹는 정도로 딱딱한 번역이 많습니다.

해설도 2009년에 근거한 해설이라 시의성이 좀 떨어집니다.

(국가보안법이니 반공정서니 하는 그런 시대배경을 담고 있는 해설입니다.) 

물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도 있지만 좀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입니다.

디자인도 영..  


추천도: 포켓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면 추천해봅니다. 책이 크거든요.




③ 책세상의 자유론(서병훈 선생 번역)



장점 : 번역이 평이합니다. 셋중에 가장 쉬운 번역입니다. 

포켓북이라 가격이 저렴합니다. (7,900원-> 7,110원 -10%)

해설이 튼실합니다. 셋중에 가장 가성비가 좋은 듯 합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팔렸겠지요?)


단점: 쉽게 읽히나 번역이 밋밋합니다. 

이해에 쉬운 번역이나, 인용에 불리한 번역인 셈이지요.

(박홍규 선생의 번역과 반대)



추천도: 셋중에서는 가장 무난히 만족스럽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해제도 튼실하고 잘 읽히는 편입니다. 추천합니다.







4. 앞으로는?


써야할 글이 너무 많은데 밀렸습니다. 

투고기사도 몇개 써내야 하고, 공모전 서평도 써야하는 데..

왜 제 게으름은 여전한지요...

자유가 방종으로 빠져서...

최저의 글 생산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분발하겠습니다.


-2017.11.3 늦장 포스팅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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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11-04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본 비교는 독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 주로 서병훈 고수님 번역과 저서로 스튜어트 밀을 배웠는데, 박홍규 교수님 번역도 궁금해 지네요.

프리즘메이커 2017-11-04 13:35   좋아요 1 | URL
제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었을 때, 홍신문화사 번역이 정말 좋았었는데요..밀의 자유론도 있더군요.. 저는 이걸 한번 구해봐야겠습니다 ㅎㅎ

cyrus 2017-11-04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번역체가 밋밋해도 저는 책세상 판본을 선택할 것입니다. 밀 전공자의 번역을 선호해요. 해설이 충실해서 좋고요. ^^

프리즘메이커 2017-11-04 20:0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해설이 특히 월등합니다.
 


 1. 사자 무리와 유한계급

 



 사자는 힘의 상징이다. 특히 사람들은 수컷의 화려한 갈기와 날카로운 발톱을 숭상한다. 위엄 있는 몸짓은 보고 있기만 해도 기운차다. 사자는 강하기에 초원에서 배를 내밀고 원 없이 잘 수 있다. 초원에서의 여가는 오직 사자에게만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 부른다. 야구팀에서 부터 군대의 깃발과 여러 집단의 상징물로서 사자를 새겨 넣는다. 용맹한 인물 앞에 ‘사자왕’ 이라는 칭호를 영광스레 붙여준다. 사자는 화려하고 강하다. 강해서 화려하다.






 그러나, 사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수컷 사자는 쓸모가 없다. 백수(百獸)의 왕이 아니라 백수(白手)다. 하는 일이 없다. 과시용 갈기는 매복에 불리하다. 갈기로 장식하기 위해 크고 무거워진 머리로 인해 굉장히 느리다. 도주하는 사냥감을 도저히 잡을 수 없다. 단지 날렵한 암사자 뒤에 서서, 하이에나들 못 오도록 어슬렁거리는 게 사냥에서 하는 일의 전부다. 사자 수컷은 겉모습만 그럴 듯 할뿐, 철저히 비실용적이다.


 수컷 사자들이 하는 거라곤 빈둥거리거나 자는 게 대부분이다. 배고프면 암컷이 사냥해온 것들 뺏어 먹는다. 다른 사자들과 쓸데없이 서열대결을 벌인다. 안 그래도 밉상인데 발정기엔 암사자 주변에서 자꾸 귀찮게 치근덕거린다. 살림을 하느라 항상 바삐 뛰는 암컷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서 종종 수컷은 암컷의 구박과 발길질 세례를 받는다. 화려함 이면엔 비생산성이 숨어있다. 


 인간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야생의 법칙은 인류 문명에서도 통한다. 사자 수컷의 습성은 그대로 수컷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전래되었다. 이들은 인간무리 생존투쟁에서 승리하여 막대한 부를 독점했다. 이제는 생산 활동을 면제 받고 전문적으로 돈 자랑만하는 세련된 한량들로 재탄생했다. 스스로 노동능력을 물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세한 후, 온갖 분야에 과시용 ‘갈기’를 달았다. 


 이들 집단에 베블런은 유한계급(The Leisure Class)[1]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줬다. “이제까지의 철학이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해온 것이라면, 앞으로의 철학은 세계를 변혁 시키는 것이다” [2] 라며, 참여를 강조한 마르크스 달리, 베블런은 그저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를 담담히 기록할 뿐이었다. 차분한 어조로 또 조용하고 치밀하게 이들의 행태를 기술했다. 이점에서 마르크스가 피 끓는 혁명가라면 베블런은 3인칭 관찰가였다. 물론 그 타겟은 ‘부자’였다.



[1]유한계급이라는 번역은 딱히 와 닿지 않는다. ‘유한’이라는 단어는 보통 한자가 위세를 상실한 작금, 한계가 있다는 통상적인 뜻으로 직감되기 때문이다. ‘한가한 무리들’ 이라는 번역도 있지만, 이 역시 성에 차지 않는다. 여가라는 것도 사전적으로 노동하고 남는 시간이라는 의미이므로, 노동을 면제받는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사치 계급’ (문맥에 따라 유흥계급)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2]엥겔스의 책 『포이에르 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부록으로 실린,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나온 말이다. 워낙 유명하여 이곳저곳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2.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

(1) 생존본능과 과시본능간의 관계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원리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 하는 개체만이 살아남음으로써 우월함을 증명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이 요구하는 특정조건에 알맞게 강해야 한다. 이 자연의 원리는 인간 문명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3] 이른바 사회에서도 특정 ‘제도’와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는 자가 승자요 지배자에 위치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의 승리의 필수요소는 ‘완력’이다. 사회 발달이 미미한 만큼 강함을 증명하는 수단은 눈에 바로 보이는 근육과 덩치, 즉 힘이다. 야생과 다를 바 없는 초기조건에서, 자기보존 및 경쟁자와의 서열싸움에서 생존하려면 힘이 세야한다. 문제는 강함에서 멈추면 안 된다. 생존투쟁 당시만큼, 투쟁 이후가 중요하다. 승자가 승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독점하려면, 강함을 ‘과시’하고 ‘증명’하여 잠재적 경쟁자들의 도전을 사전에 틀어막는 예방조치를 취해놔야 한다. 


 과시는 승자의 전유물이다. 승리한자만이 과시 할 수 있다. 과시의 본래 기능이 도취감에서 비롯되었건 복종유도 차원에서 유래했건 간에 과시는 승자만이 할 수 있다. 원시시대 이래 권력자의 화려한 치장구, 수많은 미모의 부인들, 장대한 건축물, 수많은 종교적 의식 행위 등은 승자의 강함을 증명한다. 이것들은 후대에 세습되어, 나중에는 강함과 과시의 인과관계가 뒤섞여 ‘본능화’ 된다. 즉, 강한과 과시가 혼연 일체되어, 근거 없는 과시와 허세라도 은연중 강함을 떠올리게끔 각인된다.




[3]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사회에 적용된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 ㄷ프로이트와 마르크스, 그리고 다윈은 인류 지성사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중 다윈의 이론만이 2015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베블런 역시 이 책에서 진화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2) 제작본능과 과시본능간의 관계


 베블런은 노동이 인간의 본능임을 누누이 밝혔다. 그러나 스미스와 리카르도,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 같이 이윤의 원천을 다루는 본질적 차원의 접근은 아니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했으며, 누구나 제작본능을 가지고 생존해왔다는 정도의 기본 입장일 뿐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제작본능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격하와 전가였다. 즉, 태초에 모두가 가졌던 제작본능이 멸시받고 하층의 전유물이 된 과정과 근원에 있었다.


  시간을 다시 미개사회로 돌려보자. 이 부분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더 직관적이고 이해에 용이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설명을 빌리기로 한다. 자연의 괴롭힘 및 짐승과의 대결에서, 열악한 신체를 타고난 인간에게 제작본능은 불가피했다. 기초적인 생계유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본능이었다. 원시 공산사회에서는 모두가 노동을 하며 평등한 관계로  협력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생산력이 일정정도 증대하였고, 사유재산 제도와 소유개념이 등장하였다. 이를 비롯해 권력관계가 형성되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형성되었다. 


 다시 베블런의 설명으로 돌아오자. 여기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제도와 환경에 빨리 적응한 자들은 지배계급이 된다. 힘을 통해 정치-경제적인 자원을 독점 소유한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노동을 착취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생산에 나설 필요가 없게 된다. 기초생활은 물론 부귀영화를 누릴 조건까지 완비된다. 이제 생산 활동을 면제 받고 누리기만 하는 전사, 성직자등의 계급이 탄생한다. 이렇게 지배계급은 유한계급으로 탈바꿈 한다.


 계속해서 유한계급은 우월함을 증명하고 또 과시하기 위해 유리한 제도를 명문화하고 만들어낸다. 이른바 유한계급 제도다. 제도에 덧붙여 생산은 비천한자들의 몫, 소비는 유한계급의 몫이라는 이분법적 정신태도를 줄기차게 주입한다.[4] 새롭게 태어난 이 제도에 상층부 하층부 할 것 없이 적응 경쟁이 분다. 제도와 결합한 유한계급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에 확대 재생산되며,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뇌리에 알게 모르게 뿌리를 내린다. 

 

 한번 확립된 유한계급제도와 유한계급적 태도는, 인간의 적응과정 및 보수적 습성[5]과 맞물려 대를 이어 갈수록 강화된다. 최초의 유한계급과 달리 세습한 2세대의 유한계급들은 제작본능 자체를 사용해본 경험이 없다. 제작본능을 잊고 살며, 노동이 하층에게 전가되는 상황을 태생부터 당연시 여긴다. 2세대 유한계급은 제작본능 대신 철저히 과시본능만 발현하며, 노동하는 자를 천대하고 혐오하는 지경에 이른다. [6]

 



[4] “없는 것들”, “없는 집안”, “때려치우고 공장에서 일이나해라”, “막노동(노가다)” 같은 표현이 비속어로 쓰이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공장에서 미싱할래? 대학에서 미팅할래?” 류의 수험생 다짐으로 쓰이는 표어들이 특히 더 그렇다. 

[5] 인간의 보수적 습성과 적응에 관해서는 3장에서 다룰 것이다.

[6] 맨손으로 시작해 대기업을 일군 한국의 재벌 창업주들이 근면, 성실, 절약, 검소의 이미지를 주로 갖는 반면, 재벌 2-3세들이 오만한 태도로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현상도 이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조현아의 땅콩회항’ 사건을 들 수 있겠다. 



(3) 완력에서 금력으로 : 공격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낭비하라


 권력과 명성을 획득하는 원시적인 방법은 완력을 통한 결투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경제양식이 확립됨에 따라, 완력결투방식은 더 이상 통용 될 수 없었다. 이제 겨룸의 양태는 금전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완력에서 금력으로의 진화다. 유한계급들은 금력과시 경쟁을 벌인다. 승리하는 자는 후한 평판과 높은 명성을 거머쥘 것이다.


 베블런이 주로 연구한 유한계급들은 미국의 부자였다. 미국의 부자들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거부(巨富)였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좁은 영토에 그마저도 여러 국민국가의 경계로 쪼개진, 속칭 케인즈-베스트팔렌 체제였다. 또한 전통과 역사가 얽혀 대자본이 완전히 발현하기 힘든 제약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토착 인디언들에게는 송구한 말이지만, 서구 제국주의자들 입장에서는 그 땅이 주인도 없고 규제도 없는, 잠재력이 살아 숨 쉬는 기회의 땅이었다. 공백상황을 이용하여 자유경쟁을 통해 미국의 시장경제는 무한대로 팽창했다. 유럽보다 넓은 땅을 단일 경제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 소위 ‘규모의 경제’에 의해 독점 대자본가들이 출현했다. 이들이 세계에 유래가 없는 갑부, 미국의 유한계급이었다. 


 

특히나 미국의 유한계급들의 금력과시 경쟁은 그 사이즈나 규모 역시 미국다웠다. 이들은 혼자서 아무리 낭비하고 자랑하고 허비해도, 한명의 사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기존의 단순 낭비방식으로는 자신의 흘러넘치는 금력에 걸 맞는 과시본능을 충족치 못함을 자각 한다. 이제 이 유한계급들 자신의 금력을 증명할 방편으로, 자신 대신에 과시해줄 ‘대리 유한계급’을 창조한다. 이들이 돈을 대신 허비 할수록, 본 주인의 명성이 상승한다. 


 초조해진 유한계급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부를 소비하고 낭비하고 과시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재벌 총수가 세우는 대학들,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후원(식객), 막대한 종교 기부금등이 있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후원자의 금력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의 홍보 대행사의 자연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스포츠 구단에 대한 후원[7]이 가장 전형적인 과시소비인데, 스포츠 자체가 인간의 경쟁본능을 충족시킬뿐더러, 영웅 심리를 조장하여 구단주에게 귀속시켜 줄 뿐만 아니라, 생산성이 전혀 없기에 귀한, 가장 파급력이 큰 낭비 법이기 때문이었다.



[7] 영국 프로축구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 억만장자 만수르나 첼시의 구단주 로만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천문학적이고 공격적인 투자는 대중을 열광시키고 있다. 여기저기서 유한계급들이 스포츠에 투자해 유명세를 타는 현상을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 유한계급제도와 보수주의

 (1) 생산 계급의 과시본능 

  

 제작 본능을 활용하여 하루하루를 힘겹게 영위하는 일반 대중 들은 부에 관한 모순감정을 갖게 된다. 집중된 부를 혐오하면서도 동경한다. 마르크스가 전자에 초점을 맞추어 세상이 뒤집힐 것을 예견했다면, 베블런은 후자를 보고 세상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유지될 것을 암시했다. 생전 경험하지 못한 유한계급의 화려한 삶은 대중의 박탈감을 자극하면서, 종국에는 선망으로 승화되었다.[8] 제작본능과 과시본능간의 철저한 계급적 분리는 ‘부’ 자체가 신성시 [9] 되도록 만들었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는 전 계급에 모방 열풍을 일으킨다. 모든 계급은 자신의 형편껏 체면과 겉치레에 낭비하기 시작한다. 사회전체의 복리를 더욱 증진 시키는데 그 자원을 사용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한계급의 생활양식을 일정 부분 따라한다. 생활필수 활동을 줄여서라도 체면치레를 위해 과소비한다. 유한계급은 과시를 통해 사회의 유행 창조권을 쥐고, 문화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사회전체를 온전히 지배한다. 그람시 적으로 보면 유한계급은 문화 헤게모니를 쥔 지배계급이다. 


 유한계급들은 독특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일부러 비싼 것들만 골라 사다보니, 비싸야 아름답다고 혼동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 가격이 가치를 정한다.[10] 문제는 생산계급이 이 법칙을 선망하며, 더욱 추종한다는데 있다. 생활 여력이 모자라는 이들도 사회생활을 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 

 

 생산계급의 소비는 개성과 자기만족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없어 보인다는 멸시를 받기 싫어 무리하게 소비한다. 노력하여 유한계급에 오르고 싶지만 번번이 좌절당한다. 심적으로 방어하며 살지만, 무시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 자식만은 나와 같은 삶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희생하기로 결의한다. 

 

 위와 같은 생산계급 부모의 희생적 태도는 인구변화에도 영향을 준다. 맬서스는 그의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벌어질 재앙들을 걱정했다. 그러나 베블런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생산계급은 유한계급의 생활기준을 따라잡기 위해, 하나만 낳아 모든 부모의 희생을 몰아주기 때문에[11], 오히려 인구는 감소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도국의 경우 맬서스의 이론이 타당한 것 같지만, 이미 선진국들에서 벌어지는 출산율 저하현상은 베블런의 이론을 뒷받침 한다. 




[8] 드라마의 단골 소재는 재벌2세남과 평범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다.일종의 대중 판타지로 자리매김했다.

[9]10년 전 한국의 유행어는 모 카드사의 광고 멘트 “여러분 부자 되세요!”였다.

[10] 시장 가치가 가격을 정한다고 말하는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설명 할 수가 없다. 베블런의 조용한 한방에 벙어리가 된 주류 경제학은 ‘베블런 재’라는 예외를 두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

[11] 한국에 신조어 중, ‘등골 브레이커’ 라는 말이 있다. 대개 저소득–비정규직 서민집안의 과시적 소비행태를 비꼬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부모는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후줄근한 옷을 입으면서 희생을 담당한다. 반면 자식에게는 고가의 패딩점퍼와 같은 사치품 및 고액의 사교육 제공을 마다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소비행태를 보인다.



(2) 만인의 만인에 대한 보수성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생존을 위해 적응하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적응한다. 한번 접한 환경에 온 힘을 다해 적응하고 나면, 어제 살던 대로 오늘을 살고, 오늘 살던 대로 내일을 살 것이다. 삶에 대해 한번 형성된 인간의 인식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은 그럭저럭 여태껏 나를 생존하게 만든 꽤 확실한 방법이며,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제도와 환경에 적응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진보는 정말 어려운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진다. 진보는  첫째로, 기존의 제도가 새로운 환경에 부적합하며, 둘째로 불편함이 계속 누적되어야하고, 셋째로 불편함을 감수할 인내심이 모두 소멸되어, 변화가 불가피할 경우에만 이루어진다. 진보는 계단함수다. 문제는 결국 이루어질 진보도 계층별로 다른 속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늦게 받아들인 계급의 강한 저항에 추가적으로 부딪혀야 한다.[12]진보하기 정말 어렵다.

 

 유한계급의 보수성에 관해서는 ‘잃을 것이 많기에 보수적’이라는 통상적 설명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베블런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유한계급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변화하는 환경의 압박에 최대한 적게 노출된다. 그래서 변화를 뒤늦게 알아차리기에 기존제도대로 별 탈 없이 살아간다. 따라서, 풍요로움이 변화의 노출을 차단하여, 문제의식이 생기지 못하므로 보수적이다.

 

 문제는 이 유한계급제도 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생산 계급이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은 칼 마르크스가 예기치 못한 부분이다.[13] 유한계급은 그렇다 쳐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제작본능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변혁을 꿈꿔야 한다. 사회의 생산성과 혜택을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요구해야한다. 그러나, 착취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생산계급은 보통 보수적이다. 분명 이는 쉽게 납득 할 수 없는 사안임이 분명하다. 


  베블런은 간단하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피곤해서 보수적이며, 진보는 피곤함과의 투쟁이다. 생산 계급은 고된 노동에 지쳐, 변화에 대응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힘겹게 적응한 기존제도가 수명이 다 할 때 까지 어떻게든 버틸 만큼 버틸 수밖에 없다. 변화에 굴복하는 순간 불가피 하게 새로 적응한다. 생산계급은 가혹한 착취로 피곤하기 때문에, 문제를 의식할 여력이 없어서 변화를 기피한다.


 결국, 유한계급제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의 보수 동맹으로 굳건히 유지되는 보수적 체제다.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 바빠 바꿀 여력이 없기에 보수적이고, 부자는 바꿀 필요를 못 느껴 보수적이다.[14] 이 사이에서 중산층이 고통 받는다. 결국 진보의 주도세력은 중산층이 될 수밖에 없다. 중산층이 가장 진보적이며 변혁을 주도하는 계층임은 여러 경험 연구에서 실증되고 있다.[15]




[12] 또한, 사회 한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기 어려움도 감안해야 한다. 제도의 각 부분은 진화와 적응의 과정을 거쳐 최적화된 상태로, 유기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13] 부의 불평등 분배가 혁명의 트리거 아니라 오히려 봉쇄장벽으로 기능함을 뜻한다.

[14] 2012년 한국의 대선은 이를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대학교 강원택 교수에 따르면 , 저소득층의 66%가 보수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또한 상위계층의 57.4%가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230943421&code=910110

[15] 최근 한국에서는 소위 ‘강남좌파’ 현상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4. 과시의 나라 한국

 


(1)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과 타워 열풍


 과시는 행정의 영역에서도 유효하다. 특별히 내세울 자연경관이나 아이템이 없는 지자체는 너도 나도 대규모 랜드 마크를 건설한다. 대형 랜드 마크로 무특색을 감출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각 지자체 마다 천편일률적인 랜드 마크 건설의 목적은, 첫째 정치인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다른 도시보다 발전했음을 과시하는 목적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빈곤한 한국의 관료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타워를 짓기 시작했다.[16] 전시 졸속 행정의 문제는 세금이 정말 돌아가야 할 복지나 경제발전에 들어가지 않고 전시용으로 낭비된다는 차원에 있다. 유한계급의 낭비가 공공복리에 돌아가지 못함을 밝힌 베블런의 지적이 또 다시 들어맞는 부분이다.


(2) 완장 문화, 완장 페이

 

 완장 문화는 권력을 남용하는 행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소설가 윤흥길 「완장」이라는 작품에서 유래했다. [17] 이 단어는 권력과 권한의 관점에서도 유용한 말이지만, 그 사람의 높은 지위와 특별함을 과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베블런 적이다. 우리는 어제까지 순진하고 선했던 사람이, 완장을 찬 이후 권위적으로 급변하는 현상을 종종 목격한다. 지위를 과시함으로써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행태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동의 영역에서도 완장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일반 노동현장에서 같은 돈을 주지만, ‘매니저’, ‘부점장’ 등의 완장을 채워주고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는 행태를 종종 목격 할 수 있다. 부족한 임금에 명예를 부여해서 정당화 하는 지급행태를 필자는 완장 페이(Pay)라고 부른다.


  문제는 돈이 적고 업무가 과함에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있다. 일가친지 및 친구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높은 직급에 있음을 과시하면 무시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장 페이를 받는 노동자는, 당장의 임금이 부족한 것보다 과시를 할 수 있는 상황에 만족한다. 노동착취의 내면적 정당화 기제로서 과시가 충분히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16] 전국에는 양산타워, 대구타워, 남산타워, 구리타워, 부산타워, 경주타워, 청주명암타워, 속초타워, 완도타워 등 수많은 타워들이 각지에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모든 타워가 다 낭비용이고 나쁜 타워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 꼭 도시에 타워가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거액의 돈을 써야만 하는 가?

[17]설명은 유시민 선생의 『국가란 무엇인가』의 292페이지에서 빌려왔다. 더 정확한 각주는 유시민 선생이 다음과 같이 별첨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윤흥길, 「완장」, 현대문학, 2002



5. 소회(所怀)

(1) 불편한 독서의 적나라함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트 그리고 베블런의 공통점은 이들이 쓴 책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대개 인정하기 싫지만 그럴 수 없는 적나라함에서 온다.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변태성과 악마성을 밝혔다. 마르크스는 당신이 바보같이 착취당하고 있다 말한다. 그리고 베블런은 부자들의 허세와 이를 부러워하는 우리를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과시본능이라는 대목에서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나는 비싼 패딩이 없었다. 꽤 의연한 척 했지만, 속으론 내심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돈 없어도 괜찮다 스스로를 달래며 넘겼었지만, 머릿속으로 그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고, 또 그 기억을 부정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베블런의 글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음을 확인하고 말이다.


 불편함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평소라면 덮어두고 부정했을 것들을 진지하게 때론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불편한 독서와 적나라한 서술을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사람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기준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곧 나를 더욱 존중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힘겹고 지겨운 독서에서 꽤 벅찬 기분을 느꼈다.



(2) 진화론의 진보적 재해석


 한국의 진보주의자에게는 나쁜 습성이 있다. 안보와 같은 불리한 영역의 담론은 아예 피해버린다. 또 애국과 같이 보수 세력이 지배하는 단어는 애초부터 사용하기를 기피한다. 유한계급론의 기저에 깔린 사회진화론도 마찬가지다. 다윈이라는 말만 꺼내도 인상을 찡그리거나 기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태도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보수의 담론일수록 보수의 언어일수록 진보적으로 재해석해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회진화론은 주류경제학으로 무장한 보수우파의 전유물로 인식된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피할 수 없다. 경쟁은 제1의 원리이며, 경쟁 끝에 존재하는 것은 이미 승리한 것이다.(보수주의) 진보주의자가 진화론을 보기만 해도 혐오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냉혹한 자연의 법칙 이상의 약자를 존중하는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진화론을 보수의 전유물로 방치 할 수는 없다. 나는 베블런을 읽으며 진화론의 진보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적 진화론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보수주의 전제 부정). 현존하는 것은 단지 불완전한 적응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더 완전한 적응을 위해 투쟁한다. 구제도 보다 더 적합한 제도로 진보한다면, 우린 새 제도에 맞춰 언제든 적응하고 진화할 것이다.(진보의 당위) 꽤 그럴듯하지 않은가? 


 보수의 정서적 기반은 ‘공포’다. 반면, 진보의 정서적 근간은 ‘용기’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주의자는 보수우세 지형에 주눅 들어 정당한 반론조차 펼치기를 포기하고 있는 추세다. 이 과정에서 보수파는 진보가 우위에 있던 단어들을 마음껏 빼앗는다. 이를테면 ‘경제민주화’, ‘복지’ 등이 그렇다. 이들은 ‘애국’, ‘성장’과 같은 민중이 사랑하는 단어는 지키고, 반대진영의 단어는 빼앗는 담론공세를 펼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용기를 잃고 방관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경계한다. 나는 베블런이 자신의 담담하지만 적나라한 기술법을 통해, 체제를 비판하고 진화론이라는 강력한 법칙에 새로이 진보성을 부여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용기를 냅시다. 겁먹지 맙시다. 당당히 공론장에 나가 모든 것을 새롭게 재해석 합시다! 새가 좌우 두 날개로 날 듯 생각도 양팔로 나는 것임을 다시 되새겨봅시다.” 라고 말이다.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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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29 02:18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베블런은 사회변화에 새로 적응할 여력이없어서라고 보겠지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