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민상 )




공자님 말씀은 세상에 설자리가 없지만 자신은 꼭 '이립'하길 원하듯, 원래 사람은 모순적이고 분열적이다. 오전에 일었던 생각은 오후에 돌아설 수 있으며, 이 사람 앞에서 한 말을 금세 잊고는, 저 사람 앞에서 정반대로 꺾인 말을 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 순간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속인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외려 가장 속이기 쉬운 것은 자기 자신일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께서는 항상 자기관리와 자기객관화에 만전을 다하라 하셨다. 조언대로 살지 못해 부끄럽다.




자기기만에 중독된 사람은 의도치 않게 자꾸 남을 속이려 든다. 그러나 거짓말인지 모르고 내뱉은 무수한 말들이 어느날 채권추심장을 들고 예기치 못한 관계의 파산을 이끌어낸다. 말도 돌려막다가 보면 더는 꺾을 핸들의 각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렇게 보면 말도 공짜가 아니다.



사람들은 착해서 일부러 속아주곤 한다. 약간의 잘못과 거짓말보다는 그사람과의 지내온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멍청하고 적당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도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쯤은 금방 간파해낼 수 있다. 무척이나 똑똑한 사람도 '언어의 완전범죄'란 불가능하다. 매순간 누구에게나 겸손해야하는 이유다. 그렇지않으면 당장은 몰라도 반드시 돌아온 말빚으로 인해 인격이 구질해진다.

나는 끊임없이 자기를 정당화해야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변명으로 연명하는 인생만큼 초라하고 구차한게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앞뒤와 경우는 맞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동시에 같이 지내오면서 날이 선 나의 발언들을 그러려니 이해해준 친구들이 고맙다. 지키지 못한 말들을 원래 없던 것인양 넘어가준 그들의 아량을 나도 닮아야겠다.

이념이 친구를 잡아먹지 않도록, 지나온 시간이 한두번의 잘잘못보다 소중하다는 교훈을 다시 새기게 된다. 관계, 그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속이지 못할 것이라면 솔직하게, 어설프게 교활할 바에 매순간 정직하자는 다짐을 해본다.

 -2018.02.2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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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09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는 부분은 솔직하게 밝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행동도 정직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없거든요. ^^

프리즘메이커 2018-02-09 16:01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ㅠ
 






오늘은 여사님의 51번째 생일이다.
오늘 부천은 영하 12도를 기록했다.
그녀는 겨울에 태어난 섬마을의 딸이다.

양력보다는 음력이 좋다고 했다.
그래야 나이를 조금 늦게 먹을 수 있기에.
그러나 셋이 한데 모일 기회가 얼마 남지않았다는
어떤 시급한 강박이 해와 달을 바꿨다.

요즘은 그녀의 지나온 삶보다,
그녀가 포기해왔을 많은 나날들에 연민이 생긴다. 
그녀는 내가 살아온 날만큼이나 나를 지켜봤으나,
나는 이제 절반이 조금 넘게 그녀를 보았을 뿐이다. 
우리 사이에 있는 그 공백의 시간만큼이나,
우리는 서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가족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다.
이해받지 못한다고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이따금 서로를 생각하고 아끼면 그뿐이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니까.

모카 케이크와 피자를 좋아하는 오십대 초입의 여성.
오래간만에 만개한 그 함박웃음을 눈에 담아두고 글로 기록하기로 한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아들이. 


-201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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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2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8-01-12 17:31   좋아요 0 | URL
cyrus님 감사드립니다 ㅎㅎ
 


 



20년도 더 지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큼직한 여행용 손가방이 보였다. 새까만 새벽이었다. 여인은 옷가지를 비롯해 이것저것을 분주히 주워 담고 있었다. 꼬마는 잠이 깼지만, 일부러 일어나지 않았다. 지퍼가 다르륵 하고 잠겼다. 문을 나서기 전, 여인은 자신이 낳은 피붙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려 몸을 돌렸다. 아마 그것이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으리라.

 

꼬마는 황급히 일어나 와락 여인을 껴안고는 가지 말라 울어 보챘다.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눈망울이 가득 차올랐다. 이윽고 한숨이 깊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다시 짐을 원래대로 돌려놨고, 그녀의 매 맞고 무시당하는 삶도 도로 원상복구 되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나는 여자의 체념이 주는 어떤 한기를 직감했던 것 같다. 이제는 화조차, 슬픔조차 찾아오지 않는 그런 극한의 체념. 그 싸한 분위기가 꼬마를 깨웠던 것이다. 다만 그 꼬마는 자라면서 자신이 저지른 순간의 이기적 어리광의 결과를, 두고두고 확인하며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다.

 

여행 가방을 싸면서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버티는 삶의 나날들을 치러냈다. 나는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외국에 간다. 그녀는 아마 회사 작업장에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묶여있을 것이다. 눈이 잘 안 보여 최근 돋보기를 샀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녀가 공장에 남아있기에, 내가 밖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인이 어디로 여행 가는지 조심스레 물어왔다. 최근 모자는 장기간 불화상태에 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불한당에 인질로 잡혀있던 꼬마의 애원에 가택연금을 자처했던 그녀였다. 그 뒤론, 자연스레 노동과 빈곤이라는 쳇바퀴에 하차 불가상태에 있었고, 앞으로도 몸이 성할 때까진 계속 무한동력의 소모품으로 거기 감겨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 해방될 것인가. 여인의 인생에 석방 가능성은 있을 것인가. 나의 화내는 모습이 꼭 누군가와 닮아 소스라치게 불쾌한 적이 있었다. 잉카의 마추픽추를 좋아하는 여인은 생에 자신만의 비행기를 띄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여행 가방에 그날의 기억을 담았다. 언젠간 석방된 그녀와 함께 고지대의 만년설에 모조리 그 기억을 얼려버리리라.


-2017.12.11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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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11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01개의 좋아요를 날렸는데, 1개만 들어갔군요...

프리즘메이커 2017-12-11 07:0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300개는 견문색 패기로 미리 받았습니다 ㅎㅎ 여행다녀올게요!!

evergreen-0907 2017-12-11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 잘 다녀오세요!

프리즘메이커 2017-12-15 13:56   좋아요 0 | URL
여행 무사히 재밌게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외여행, 그것은 나의 부동항이다. 일 년 중 절반이 항구가 얼어붙어 출항하지 못하는 배의 심정을 아는가? 나는 모른다. 아마 외교사 가르치시는 전홍찬 교수님도 모르시겠지. 하여튼 답답했을 거다. 그래서 그 옛날 바닷길이 모두 얼어붙어 욕구불만의 세월을 겪었던 러시아 제국의 짜르는 약소민족을 두들겨 패면서 역사적 히스토리, 아니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한다. , 나는 히스테리가 없어서 다행이다. 더 옛날 창세기의 모세는 에굽에서 유민들을 탈출시키며 홍해를 갈랐다고 한다. 나는 스물여섯 먹고 꼴랑 일본에 가는 거라서, 그런 멋은 나지 않는다. 이건 조금 아쉽네. 폼 나게 살고 싶은 게 내 꿈인데.

 


물리학의 관성의 법칙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때를 놓치면 늘 힘이 든다. 남들 갈 때 대학을 가고, 남들 입대할 때 따라가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하며, 하다못해 중박은 치는 평탄한 선택지인 것이다. 사회적 시계는 늘 어설프게 철저하다. 어쩌겠는가. 나는 삼수를 했고, 군대를 미뤘다. 애초부터 직선도로가 없었기에 돌아갔다. 지나간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달리기가 빨라서 다행이다. 뭐 하여간, 이십대 초반의 두근거리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덜컥 여행권을 샀다면, 지금쯤 심리적 빙벽 같은 건 없었을 것인데, 기껏 현해탄 너머 일본 가면서 살짝 쿵 쫄리는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역시 사람은 세월이 겹쳐질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더니, 놓쳐버린 때가 사람을 더 큰 겁쟁이로 만든다. 일본 온천에서 묵은 때를 잔뜩 밀고 올 것이다. 



나는 여행이 초래하는 인생의 우발사태를 좋아한다. 두 번째 수능이 끝나고 부산에 놀러 갔고, 그것이 아예 부산에 터를 잡고 살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산대를 졸업했고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들어갔다. 틈틈이 여기저기를 싸고 경제적으로 다녀왔다. 강원도 산간 오지에서 차를 놓쳐 친구들과 덜덜 떨며 노숙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가 부지런한 나의 한계였다. 제주는 정말 맛있고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나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철옹성처럼 굳게 지켰던 곳이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경주로, 어머니 세대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듯이, 그 시대의 한계치 같은 그런 곳이 있지 않는가. 나의 급발진은 여기서 멈춘 듯 했다. 그래서 속이 답답했다.

 


부산에 있으면서도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와 체중과 함께 덩달아 늘어가는 생활비와 소비습관의 맹렬한 공세에 방어전을 치르던 나는 번번이 공항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다. 내가 진 장남의 등짐은 매번 공항 수하물의 무게 한도를 초과해버린 것이다. 없을 땐 없어서 못 갔고, 있을 땐 무서워서 못 갔다. ‘아 이 돈이면 6개월을 놀면서 학교 다닐 수 있는데.’ 유물론의 벽을 넘으면, 관념론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일본에 간다. 이곳에 가기 위해 대학원을 그냥 쉬어버렸다. 휴학하면 장학금 하나가 끊기는데, 그 출혈을 인생의 수업료라 생각해야지 별수 있나. 참고로 이건 깨알 틈새 자랑인데, 나는 지난 학기에 장학금을 다섯 개를 받아서 학교 한도를 초과했다. 하하하.

 


나는 분명 느리고 더디지만 성장하고 있다. 내 성장판은 아직도 많이 열려있다. 나는 이 주문을 내 마음속에 주입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때를 놓쳐 복잡해진 여권을 만들고, 항공권과 숙박을 구했다. 사실 하마터면 이것도 어영부영 기다리다 생활비로 다 까먹어 못 갈 뻔했다. 원래 돈이라는 게 두루마리 휴지 같아서, 처음엔 막 써도 닳지 않다가 어느 순간 심에 힘겹게 엉겨 붙은 빈약한 쪼가리만 보이기 마련이다. 지갑사정의 휴지심이 보이기 전에 남은 돈을 다 털어버렸다. 모조리 탕진하고 새로 출발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의 이름처럼, 나는 부활할 것이다.

 


새내기 때 서른이 되기 전엔 꼭 이루고 싶은 숙원사업을 세 가지 정했더랬다. 하나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스물두 살에 고강도 육체노동으로 이뤘는데, 유지하지 못해 초기화의 아픔을 겪고 있다. 사진이나 찍어둘걸. 두 번째는 책을 내는 것이다. 일상 에세이 한 권, 또 고전에서 찾은 정직한 생각들을 추려낸 교양 인문학 도서 한 권을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자력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남자인생은 서른부터다. 뒤는 나도 모르겠다. 원래 사람은 자기의 하찮은 선택에 늘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다. 바다는 얼어도 하늘은 얼지 않는다. 4일 남았다. 굿바이.

 

 

-2017.12.07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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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unsun09 2017-12-07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쓴이의 심적 변화와 상황들이 잘 들어옵니다. 제 30년 넘는 독서이력??
으로 평한다는 오만속에 님 글이 좋아요.
더불어 일본여행 잘다녀오세요^^

프리즘메이커 2017-12-07 22:16   좋아요 1 | URL
제 글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일본도 잘 다녀오겠습니다 ㅎㅎ

syo 2017-12-07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프메님의 글을 볼 수 없는 건가요? 아니겠죠?

다녀오시면 더 멋진 글들을 만날 수 있겠군요. 기대합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2-07 22:16   좋아요 0 | URL
잠깐 재충전 좀 하고 다시 필봉을 빛내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2년 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눈이 왔다. 

흡연자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나도 좀 쉴 겸 눈 사람 하나를 몰래 만들었다.

 

 

수학을 싫어하는 해로운 '문돌이'도 머리를 싸매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가 있다. 빈약한 통장 잔고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할 때, 요즘 같은 마무리의 계절이 1년 치 성찰을 강요할 때가 그렇다. 나는 경제관념이 투철한 김생민 씨처럼 꼼꼼한 계산과 '스튜핏! 그뤠잇!'의 상벌체계를 갖추진 않았더라도, 기초산수로 잘 궁리하면서 나름의 재무계획을 짜곤 한다. 돈이 없으면 원래 머리라도 잘 굴려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알뜰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전해 내려오는 삶의 비법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나의 경험과 주변의 삶에 관한 관찰을 종합한, 심리묘사가 주를 이루는 '극사실주의 팩션(Faction)'이다. 이 의식의 흐름이 청춘이 당면한 삶을 이해하는 데 조금의 도움이 되길 바란다.

 


대학가는 물가가 싸다. 더 멀리 나가지 않기로 한다. 넉넉잡아 칠천 원짜리 밥을 하루 두 끼만 먹는다. 이젠 10대가 아니니, 하루 세끼 다 챙겨 먹으면 살이 찐다. 아침에 한잔, 점심 먹고 한잔.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하루 두 잔 사 먹는다. 쿠폰은 반드시 받기로 한다. 나 하루 만 육천 원씩, 달에 48만 원을 먹어 치우는구나. 등록금은 짬짬이 공부해서 장학금으로 퉁치기로 한다. 거주지는 임대료가 무료인(그러나 마음의 빚과 눈치가 복리로 쌓이는) 부모님의 집을 이용하기로 하자. 여기에 휴대전화 요금이 달에 6만 원. 교통비가 10만 원. 옷은 가성비 좋은 스파 브랜드의 기본템 위주로, 한 달에 위아래 합쳐 한 벌씩만 3만원. 아니 살아 숨 쉬는 의식주 비용만 벌써 67만 원이 필요하다.

 


까짓것 벌어보기로 한다. 팔다리 멀쩡하고 젊으니까, 시간이 남아봐야 놀기밖에 더 하겠나. 아직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른다. 어차피 흘러갈 시간, 돈으로 바꿔놓는 게 최선이겠지. 이미 부모님에겐 신세를 지고 있지만, 협상력을 발휘해 내친김에 부모님께 교통비와 전화 요금만 대신 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럼 51만 원. 다행히 내년도 최저시급이 많이 올랐다. 7,530. 그 정도면 주말을 투자해 충당할 수 있다. ·일 하루 9시간씩 일하면, 54만 원. 3만 원이나 남는다. 이 돈이면 울적할 때 치킨 한 마리, 매달 미용실에서 컷트 한번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바 소개하는 어플리케이션을 깐다. 학교 커뮤니티에 구인란을 뒤적거린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괜찮은 게 없다. 이 돈 주고 그렇게나 부려먹겠다고? 그럴 거면 정직원을 채용해야지, 무슨 알바를 쓰나. 6개월 1년씩 일하는 게 직원이지 아르바이트인가? 이것저것 재고 따지니까 할 일이 별로 없다. 다들 양심 불량이다. . 아니다. 나 말고도 일할 사람 많구나. 갑자기 자기 주제를 단번에 깨닫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몇 군데 면접을 본다. 겨우 얻은 알바, 사람 불편하게 만들고 잘릴지도 모르니 주휴수당 그런 거는 머릿속에서 잊기로 한다. 이 정도는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배웠다. 어떠한 난관도 청춘의 긍정은 이겨낼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착각하지 말자. 나는 직장인이 아니다. 학생이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아르바이트는 생활비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남는 시간에 공부해야 한다. 이왕이면 남들보다 잘 해야 한다. 좋은 직장과 풍족한 미래를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투자금을 융통해야 한다. 학원비부터 토익시험 응시비가 도통 비싼 게 아니다. 뭐 토플은 30만 원이나 한다고? 최대한 소비를 줄인다. 시간은 고정되어 있으니, 더 일에 체력과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 부모님께 한 번 더 굽혀본다. 마법의 '엄마 카드', 그 화수분 같은 힘을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한다. 그 대신 친구나 선후배 관계 따위, 다 유지비만 잡아먹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다. 안 만들고 돈을 아낀다.

 


외롭다. 벚꽃이 피고 바다가 어른거리며 단풍이 들고 눈이 온다. 춘하추동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괴로운 계절이다. 그렇게 피했는데도 사람인 이상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면 어떡할까. 부모님께 계속 손 벌리는 것도 찜찜한데, 그 돈으로 연애까지 하다니. 불효가 막심하다. 커피값이고 밥값이고 예산이 1.5배가 뛰어버린다. 사랑하는 사이에 분위기도 내고 좀 해야 하니까. 누가 사랑에 마음이 전부라고 했는가. 구애에서부터 사랑은 매번 증명하는 것이다. 기념일이 다가온다. 선물을 사야 한다. 진도는 브레이크를 모르고 앞서간다. 놀이공원이나 모텔이라도 갈 적엔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심지어 콘돔마저 비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좋은데 별수 있을까.

 


몽상을 멈추고 주판을 다시 굴려본다. 아무래도 연애를 하려면 유지비 견적이 나오질 않는다. 견적이 안 나오면 구애도 하지 않는다. 그게 비용이 저렴하다. 우리에겐 위험을 감수할 돈이 없으니까. 구조적 실업이 있듯, 구조적 독신이 있는 것이다. 숨 쉬는 비용으로 70에 육박하는 돈을 쓰고, 연애를 시작하면 돈 백이 필요하다.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그것까지 어떻게 감당하랴. 20대는 그렇게 혼자 살아간다. 정치의식이 없고, 패기가 없으며, 사회성이 부족한 20대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아르바이트를 빼먹으면서 데모할 청년은 더는 이 땅에 살지 않는다. 밥을 굶으면서 사당오락의 신화를 써 내려갈 혈기도 이제는 옛일이다. 나름대로 젊은 세대는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다. 버티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다. 더 이상 위대한 헌신과 고상한 동기를 요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온갖 담론으로 분칠해도, 청춘의 맨 얼굴은 아마 이것과 가까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별 수 없다. 청춘의 대표를 자처하며, 또 좌파 이데올로기적 충동에서 시작한 정의감이 충만한 글이 아니었다. 그냥 나는 돈이 급하다. 그런데 오마이 뉴스에서 원고료 5만 원 출금 제한을 걸어 놨다. ‘빨리 몇 개 더 써서 반드시 고료를 타내고야 말 것이다!’ 라고 다짐하던 찰나, 기사채택에서 까였다. 아씨.. 마지막 문장은 삭제하는 편이 좋았나?



-2017.12.05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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