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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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읽을 때마다 그저 그렇게 끝나는 법이 없다. 제목에 이미 익숙해있어 오히려 큰 기대나 호기심이 없이 읽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읽으면 빠져들고 집중하게 만든다.

이유가 뭘까.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원적 고민을 건드리기 때문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는 그 고민들을 해보는데 그치지 않고, 그치지 못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몸과 정신을 소진시키고 앓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물을 우리가 읽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소설 <싯다르타> 역시 1922년, 헤르만 헤세 나이 45세 되던 해 일년 반 동안 창작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심한 우울증을 앓고 정신 치료까지 받은 후 발표한 작품이다.

지금도 독일과 스위스에서 헤르만 헤세를 서로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우긴다는 얘기를 들었다. 독일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이후로 스위스와 독일의 국적을 왔다 갔다 하며 살다가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미 22세때 소설 '한밤중 이후의 한 시간'을 발표하였고 25세때 시집 'Gedichte'을 출간하여 이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지만, 더 앞서 15세때 벌써 자살 기도를 하여 신경과 병원에 입원한 경력이 있는 그였고, 여행, 이 나라 저 나라 이주, 정치활동, 군 입대, 잡지 발간, 그림 활동 등 다양한 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는 '싯다르타'라는, 석가모니 세존과 비슷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이 책이 석가모니 전기문은 아니다. 바라문을 아버지로 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싯다르타. 그러나 그에게 다른 사람이 가르쳐준 것을 성실하게 공부하고 따라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통 수행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진정한 수행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과연 행복하게 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가?

무엇때문에,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아버지가 날이면 날마다 죄업을 씻어내어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시키려고 애써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그 일을 새삼스럽게 반복하여야만 하였을까?

바로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어야만 하며, 바로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탐색하는 것이요, 우회하는 길이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데 불과하다.

싯다르타의 생각들은 이러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그의 목마름이었고, 이것이 그의 고뇌였다. (18쪽)

 

그의 출가 이유이다. 다른 사람이 전해준 가르침, 지혜, 깨달음은 모두 소용없다는 것.

출가 이후로 싯다르타가 만나게 되는 사람중에는 석가모니 세존도 포함되어 있는데 한동안 석가모니 수하에서 수행을 하기도 하지만 어느 날 스승과 대담하게 논쟁을 한다. 석가모니 세존이 말하는 해탈에 대하여 그것은 당신 스스로 겪은 구도 행위, 생각, 침잠, 인식, 깨달음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지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자기 생각을 말한다. 덧붙여, 모든 가르침과 스승을 떠나서 홀로 목표에 도달하든가 아니면 죽든가 하겠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벗어나려고 했던 나 자신이 곧 내가 스스로 배워야 할 것이고 나는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내가 탐구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비밀이라고 생각하게 된 싯다르타. 그래서 내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그 순간 한 마리 작은 짐승이나 한 마리의 새, 한 마리의 토끼가 자기와 다름없음을 알고 가슴속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유아독존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함께"라는 말보다는 "홀로"라는 말을 더 자주한다. 그 이유가 여기 있다.

석가모니 수하에서 벗어나와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싯다르타는 아름다운 기생을 만나 즐거움을 맛보는 생활도 하고, 노름꾼도 만나며 강가의 뱃사공과 함께 지내기도 한다. 나중에 깨닫는다. 그들이 모두 스승이었음을. 여행을 떠나기전 가르침을 받았던 석가모니 세존뿐 아니라 그가 만나서 영향을 주고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는 자기 자신의 비밀을 찾아나갔던 것이다.

싯다르타는 피안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다. 깨달음 자체에서 자유로와진 그는 차안 (삶과 죽음이 있는 세계. 열반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의 세계에 상대되는 이 세상을 이르는 말)의 세계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일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75쪽)

 

구도를 할 경우에는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는 대목을 읽으며 얼마나 섬찟했는지. 차라리 싯다르타가 맨 마지막에 함께 지냈던 뱃사공이 구도자였다. 그는 따로 수행을 하지 않았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애쓰지 않았으며 더구나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따라 배를 저으며, 강물의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흐름에 동의하고 있었다.

읽다가 여기서 '단일성'이라는 말의 뜻을 곱씹어봐야했다. 영어번역본 "Siddhartha" (아래 사진) 를 찾아 보니 단일성이 'the unity'라고 되어 있었다.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쾌락, 선, 악, 이 모든 것들이 따로 따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그 일부에만 자기 영혼을 열어놓는다거나 몰입하지 말고 모든 것에 귀울이라.

<데미안>에서 아프락사스가 모든 양극성을 한몸에 지닌 채 세계의 대립적 다양성을 포괄하여 하나로 합일시키는 존재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지도 모른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그랬듯이 <싯다르타> 역시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말한다면 아니라고는 못하겠으나 정확하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성장이란 것 자체가 어린 아이와 어른 사이의 간격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헤르만 헤세는 모든 것을 하나의 단일한 세계 속에서 볼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하나 하나가 다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때 함께 수행의 길을 걸었고 여전히 수행자로 살아가는 친구에게 싯다르타는 뱃사공 얘기를 하며 말한다.

 

"그는 스승도 없고 책도 없이 자네나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던 거야." (213쪽)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 사상 이런 형태로 전달되는데, 정작 진리나 지혜는 말로 전달될 수 없는 속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추구한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 본질 밖에 있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나는 몇번이나 더 이 책을 읽게 될까. 언제, 삶의 어느 대목에서 다시 읽게 될 것인가.

내가 스스로 겪고 내가 발견한 것 외에 다른 것이 무슨 소용 있냐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이 쓰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에 몰입하기 보다는 나의 내면을 잘, 제대로 들여다보라는 뜻이다. 스승도 없고 책도 없이.

 

싯다르타가 찾아낸 단일성이라는 말은 평소 복잡하고 확장만 일삼는 나의 사고 방식에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스승도 없고 책도 없이.

뱃사공이 강물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배를 젓듯이.

갈 길이 요원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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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6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03-17 04:53   좋아요 0 | URL
제가 보내드렸었다는 것도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렇게 침울한 내용 말고 밝은 기억으로 남을 책이면 좋았을걸 ^^

2019-03-17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3-19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싯다르타, 2007년 아니면 2008년쯤 읽었는데 저는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 아니었어요.
지금 읽으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읽고 작가의 명성에 비해 실망하게 될 때 저의 수준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건가, 하고요. 이 책도 그랬어요.
단 하나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강물을 보고 주인공의 독백이 길게 이어지던 장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 읽었던 것을 하나 하나 다시 읽어 보고 싶군요. 그때와 다른 느낌으로 읽을지 모르므로...ㅋ

hnine 2019-03-19 21:12   좋아요 1 | URL
책과의 인연도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 책, 그리고 상황. 아마 지금의 저의 상황이 이 책을 쏙 빨아들이기 적합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읽어볼 생각도 안하던 책이었어요. 그런데 제 아이가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읽는 책이라고 사다놓고 제대로 안 읽고 있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어느 팟캐스트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데 소개하는 문학평론가,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분께서 이 책을 고등학교때인가 읽고 너무 좋아서 필사까지 했다는 거예요. 그 말 듣고 어디 어떤 책이기에 그런가 궁금해져서 안읽어볼 수 없었어요.
저는 필사까지는 아니지만 밑줄을 마구 그으면서 읽었답니다. 말씀하신 강물을 보고 싯다르타가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는 장면을 기억하시다니, 이 책의 거의 정수에 해당하는 부분이어요.
혹시 인연이 된다면 다시 읽으시게 될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