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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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은 미래에 목이 잘려 죽는 꿈을 꾼 여성이 있다. 함께 사는 과자 친구 마들렌에게 또 꿈을 꾸었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잠이 깬 순간 마들렌이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팔에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다른 나였다.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였다. 나는 출근을 하고, 다른 나는 마들렌을 따라 법원에 가기로 했다. 퇴근 후 마들렌이 눈치채지 못하게 찜질방, 모텔 등을 전전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라고 할 만큼 바쁠 때 또 다른 내가 있다면 할 일을 분산해도 되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 실제로 두 명이 존재한다면 난감할 것 같다.

 


우리를 상상의 나라로 안내하는 소설이었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듯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그림을 따라가다 보며, 소설을 읽는 이유를 깨달았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서울에서 강원도로 향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감염된 자들을 피해 차로만 움직일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하고 낮에는 움직여야 한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순간에 대비해 도끼를 들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지도 않는다. 만약, 운전하지 못한다면 감염자를 피해 달아나기도 힘들 것 같다. 운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차를 바꿔가며 남편이 있는 강원도로 향할 수 있는 거다. 그녀의 새로운 동승자인 남자애는 감염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감염되지 않았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학생들이 떠올랐다. 바이러스 감염자들의 이야기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상상의 세계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나는 남자애와 비슷한 종일까. 아니면 조만간 걸릴 수도 있을까.

 




일곱 편의 소설 모두 주제가 다르며 느낌도 달랐다. 소설의 재미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재미있다, 재미있다 중얼거리며 읽었다. 젤로의 변성기는 애니메이션의 시리즈에서 몇십 년째 소년 역할을 하고 있는 오십 대 성우의 이야기다. 아이돌 외모에 팬덤을 가진 여자애와 함께 오디오 녹음하며 젊음과 늙음의 경계에 선 인물들을 그린다. 소년 목소리를 냈던 그녀는 소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생각과 다르게 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소년이 변성기를 거치는 듯하다.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석류를 먹는 그녀를 상상해보니 어쩐지 안타깝다. 늙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한나와 클레어는 호텔 메이드로 일하는 여성과 미스터리 쇼퍼 활동으로 분기 투숙 바우처를 친구에게 받은 여성이 나온다. 손님과 메이드.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고 클레임을 받기도 하지만 이들의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거다. 서로의 위치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때로는 갑의 위치에서, 어느 순간에는 을의 위치로 바꿔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 글을 쓰기 전, 남편이 틀어놓은 TV 프로그램에서 남성의 목소리를 가진 여성 출연자를 보고 정체를 알고 싶어 검색했더니 트랜스젠더라고 나왔다. 김수진의 경우는 트랜트젠더인 김수진이 인공 자궁 이식 수술 실험에 참여하는 내용이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김수진이 수술에 성공하고 남자일 때 채취해둔 정자를 이용해 수정, 착상의 과정을 겪는다. 엄마가 되는 과정이 이렇게 힘든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새로운 가족관계의 변화를 엿본다.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정된 사고방식으로는 도태될 뿐이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이해해달라고 말하지 말자. 내가 이해하면 된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다양한 이야기만큼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숨겼던 것처럼, 타인이 말하는 숨은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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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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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다문화 청소년과 탈북 이주민, 결혼 이주 여성을 돕고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해 온 저자의 사물과 기억에 얽힌 사람에 대해 말하는 글이다. 소박한 일상에서 우리는 사물을 보고 사람을 떠올리는 삶을 살아간다. 아픈 남편, 딸 둘과 함께 한국과 영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작가다. 한국에서 먹었던 음식과 영국 생활하며 느꼈던 고국에 대한 그리움, 이웃들의 따스함 때문에 견딜 수 있는 이야기들은 퍽 다정하다.


 

우리나라의 산모는 미역국을 먹는다. 이 습관은 외국에 가서도 변하지 않는지 아이를 낳을 때 미역국을 끓여 밥을 말아서 병원에 갔다고 한다. 미역국에 불은 밥이 맛이 있을 리 없지만, 찬 미역국을 먹는다는 건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이후 마른 미역을 담아 보낸 소포를 떠올리고 엄마의 마음(혹은 돌봄)을 이해한다. 결국 음식은 위로의 한 형태다.




 


저자의 남편 토니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그는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된 팔찌를 손목에 끼고 다닌다. 팔찌에는 저는 파킨슨병 환자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라는 문구와 연락처가 적혀있다. 파킨슨병 환자는 떨림 증상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 팔찌를 보여주며 느려도 양해해 달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해 보였다. 남편의 속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었는데 팔찌를 보며 생각을 바꾸었다고 했다. 병을 받아들이고, 속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결혼한 지 20년이 되어도, 나는 혼자같이라는 두 바퀴의 균형을 찾느라 종종 휘청댄다.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한다. 혼자여야 하는 일이 있고, 같이 하면 더 좋은 일이 있다. 그러니 어느 한쪽에 너무 마음을 쏟지 말자. 다 혼자 하겠다고 모질어지지도, 늘 같이 하겠다고 애쓰지도 말고, 그저 순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자.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의 뒤를 따라가지만, 내 뒷모습을 보이게 될 날도 올 거다. 짝이 되어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등을 보이면서 긴 시간 함께 가는 자전거 여행 같다. (39페이지)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를 향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려 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이 다정해 보일 것 같다. 낯선 곳을 가도 덜 무서울 것이며 누군가가 넘어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저자가 남편과 같이한 일 중에 자전거 타기가 괜찮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함께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긴 시간 함께 해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삶은 기차 여행이다. 대강의 방향을 정했지만, 그렇다고 경로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경유할 수 있다. 어쩌면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함께 타고 있는 이들이 많아 안심이다.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사람으로부터 위안받을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 힘을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241페이지)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를 변화시켰다. 실제로 만나지 않고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며,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의지가 된다. 저자의 휴대전화 속 이웃들도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만들어졌다. 갑자기 전기가 나갔을 때 도움을 청하자 전기를 고쳐줄 수는 없어도 음식이나 간식을 줄 수도 있다. 불확실한 시대에 서로를 살펴보는 커뮤니티 그룹이 있어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외국에서 김치를 나눠 먹는 풍경을 그려본다. 누군가 김치를 얻었다고 두 통이나 주었다. 그 김치를 학교에 가져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저자도 몇 포기 가져와 다양한 음식을 만들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김치 나눔의 정경이 아름답다. 저자는 말한다. ‘김치는 나눔이고 위로고 그리움이고, 고마움이다.’라고.

 


사물을 보고 떠올리는 건 그리운 기억들이다. 따뜻한 음식을 보며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에 대해 편견에 갇히지 않는다. 소수의 일원으로 시작되었던 삶이 여러 사람과 깊숙이 연대하며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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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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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들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을 디테일하게 표현한다. 탁자의 모양, 소파나 침대,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 하나에도 이름을 붙인다. 어느 공간에 손님을 초대했다고 치자. 손님이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물건을 배치하여 그 세세한 묘사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처럼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소설을 읽는 효과를 준다. 각자의 색채를 가진 물건과 인물 앞에서 우리 내면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 같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상황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대학 생활과 대학에 속한 사람들의 실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한 인간의 일생이 마치 우리 눈앞에 있는 인물을 마주하는 것 같다. 학문적인 성과나 큰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고 화목한 가정도 아니었으며 사랑이라고 일컬을 만한 일에도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저 보통의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윌리엄 스토너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작은 농가의 외아들인 스토너는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아버지를 도와 당연히 농사를 지을 줄 알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컬럼비아에 새로운 대학교가 생겼다며 농과대학을 가라고 했다. 2학년 때에야 대학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필수과목으로 영문학 개론을 들을 때 강의를 맡은 아처 슬론 교수의 질문 하나가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주는 의미를 물었다. 그때부터 농과대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고 철학과 고대역사, 영문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삶은 이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바뀌는 것 같다.

 


소설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제1차 세계대전이다. 대학생들이 참전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통했던 두 친구, 데이브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가 입대했다. 스토너는 고민 끝에 징병 유예를 결정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데이브 매스터스는 프랑스에 파견되었다가 전사했다. 아처 슬론 교수는 서서히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고든 핀치는 대학의 학장 비서로 업무를 시작했다.

 


스토너가 아내와 결혼하기 전, 첫 만남에서 반하게 되어 만남을 청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 결혼하며 스토너가 상상했던 결혼생활에서 벗어난다. 스토너의 아내 이디스는 그저 아버지의 그늘에서 뛰쳐나오고 싶어 결혼을 선택했던 것 같다. 침대에서 스토너를 거부하고 오로지 임신을 위해서만 관계를 가진 후 아이를 낳자 그마저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디스는 스토너와 딸 그레이스를 통제하고 군림했다. 아이를 낳은 후 돌보지 않아 스토너가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스토너에게 그레이스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강의 준비와 집필을 하던 공간을 없애 그를 구석으로 몰았다.

 


이디스와 마찬가지로 아처 슬론 교수를 대신할 로맥스 또한 이해하기 힘든 부류였다. 로맥스가 지도하던 찰스 워커 때문에 스토너와 앙숙이 된다. 로맥스가 학과장이 되면서 스토너가 좋아하던 라틴 전통문학과 르네상스 문학 강의를 빼고 1, 2학년을 위한 수업을 맡겼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스토너를 미워하고 배척했는지 그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방식이 조금씩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 나는 살아 있어. (350페이지)

 




스토너는 어떠한 압박과 반대에도 강의를 멈추지 않는다. 진정한 학자와 교수로 거듭나게 된 사건은 그가 타협을 거절했을 때부터다. 스스로 알에서 깨어 나오듯 그는 예정되었던 강의계획서를 빼고 중세 문학 강의를 하며 비로소 학생들 뿐 아니라 동료 교수들에게 인정받는 교수로 거듭나는 장면은 감동이다. 삶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거로 인식했으나 그가 농과를 뒤로 하고 영문학에 뛰어드는 순간에도 그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했다.

 


문학 애호가들이 뽑은 진정한 인생소설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이 이토록 감동적이어도 되는가. ‘인생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소설의 마지막, 스토너가 후회하는 부분이 있다. ‘~ 했더라면으로 시작되는 말에 우리의 삶과 대비해 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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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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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다 보면 느끼는 게 있다. 잊으려고 애쓴 고통스러운 기억들도 결국엔 글로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자신을 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글쓰기가 되는 것일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1편부터 읽어오고 있다. 드문드문 이어지지만 늘 눈여겨보고 있다. 아마도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던 것 같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낼 수 없었던 누군가가, 뒤늦게 발견할 수 있는, 아니면 휴지 조각으로 변할 수도 있는 달력 뒤에 유서를 썼을까. 그 고통이 전해오는 것 같아 궁금했다.




 


작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두 편의 소설집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읽지 않은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아버지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아버지를 발견한 기억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작가로서 풀어내야 할 숙제처럼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이제야 소설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기억은 단편적이어서 전체적인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한 장소로 찾아가는 과정이 그의 번민과 맞닿아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꺼내는 게 힘들어 주저하지만 글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기억과 마주해야 한다. 글쓰기의 고통이 드러난다. 아울러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남들이 읽지 않은 소설을 쓴다는 것의 고통.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대한 고민도 엿보인다. 편집자와 나눈 메일은 작가와 편집자 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알게 한다. 좋은 편집자란 그가 가진 것을 이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잊고 살았던 장소에서 마주하는 것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풍경일 수도 있다. 아버지를 발견했던 공간에서의 기억은 이미 잊혔다. 그럼에도 단편적인 기억들이 부유한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던 아버지. 못 박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심코 흘려보냈던 일, 창문을 깨고 들어가야 했던 기억들이 그를 괴롭힌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고통을 극복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랜 기간, 아니 매일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9페이지)

 




그가 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는 건 기억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이다. 소설을 쓰는 일은 사랑했던 아버지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작업이다.

 


모든 건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 (151페이지)


 

아들의 문장을 읽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도 마음이 언젠가는 닿기를 바라는 염원. 민병훈 작가를 기억하게 해줄 작품이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을 지난한 과정이 보였다. 이제는 기억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다른 작품에서 삼켰던 그의 문장들이 제대로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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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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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여름, 이선 프롬을 읽으면서 이디스 워튼을 더 읽고 싶었다. 우리나라에서 초역인 버너 자매는 기대했던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지만 그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을 법했다. 뉴욕의 골목, 허름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자매. 자매가 만나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인물을 보며 작품이 쓰인 그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수록된 작품은 중편 버너 자매, 단편 징구로마열이다.


 

버너 자매는 뉴욕의 허름한 거리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가난이 주는 무게는 큰 법이어서 자매의 생일 선물조차 쉽지 않다. 옷 수선과 바느질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는 버너 자매는 소소하지만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앤 엘리나가 동생을 위해 생일 선물로 탁상시계를 선물한다. 에블리나는 탁상시계를 선물 받기 전, 시계를 보기 위해 광장의 시계탑까지 뛰어가야 했다. 째깍째깍 들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에 행복하기만 한 자매였다.

 




시계가 고장 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매는 생김새가 다른 만큼 각자 맡은 일을 했다. 작은 가게에서 바느질로 물건을 판매하는 앤 엘리나와 물건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에블리나는 배달을 주로 하며 바깥의 일에 매진했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시계방에 가면서 한 남자가 자매의 삶에 들어왔다. 일이 끝난 저녁 시간에 자매의 작은 방을 방문해 머물다 갔다. 남자의 등장은 평온했던 자매의 삶을 바꿔놓는다.

 


래미 씨의 방문 후, 자매는 서로를 시기했다. 원작 영화가 있는 매혹당한 사람들의 결말을 예상했다. 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싸운다. 결국 자매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도의 결말 말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렀다. 남자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이자 단점을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사랑에 빠진 에블리나의 열정 때문에 비교적 많은 사람을 상대한 앤 엘리자 또한 사람 보는 눈을 키우지 못했다. 그로 인한 비참한 결론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겨우 몇백 달러의 돈에 눈이 멀어 마음을 훔쳤다. 중독된 사람의 특성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디스 워튼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었다. 물론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앤 엘리자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걸을 것이므로. 평온한 삶에 파문을 던지는 건 의외로 아주 간단한 것 같다. 돈 이나 사람의 마음을 훔치면 된다. 그리고 달아나면 아웃이다.

 


버너 자매를 읽으며 바뀌어버린 자매의 삶에 안타까워하다가 징구로마열을 읽는데 두 작품은 풍자극에 가까워 웃음이 났다. 먼저 징구를 보자. ‘문화생활을 추구하는 부인들이 모여 런치 클럽을 결성한다. ‘런치 클럽은 점심을 먹은 후 독서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클럽이 유명해지자 유명인사를 초대하곤 했다. ‘저명한작가 오스릭 데인이 마을에 도착하던 날 모임에 초대했다. 오스릭 데인의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이 나뉘기 마련, 자기를 내세우려는 부인들의 속물적인 모습이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유명한 작가를 초빙하니 토론의 주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른 상태에서 질문이 이어지는데, 작가 또한 곤혹스러운지 불편해한다. 한 부인이 징구에 대하여 질문하며 토론을 시작하는데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장면은 블랙코미디를 엿보는 듯하다.

 


로마열은 여자의 우정이란 종이 한 장처럼 얇기만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여성들의 우정이 모두 이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순전히 단편 로마열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중년의 두 미국 여성이 딸들을 데리고 로마 여행 중이다. 처녀 때 친구였던 부인들은 각자의 삶에 바빴다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다시 친구가 되었다. 겉으로는 친한 친구지만 상대방을 질투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보다 더 아름답다거나 부자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편지 한 장에 얽힌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표면적인 우정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각자가 속한 세계에서 계급의 상승을 꿈꾸지만, 희망 사항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드러나듯, 결혼을 일종의 계급 상승으로 보았던 것도 잘못이다. 동화적인 발상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여성의 지위와 내면세계에 좀 더 파고들었던 소설이었다. 앞으로도 이디스 워튼 읽기는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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