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의 소설은 『위안의 서』로 먼저 만났다. 작가가 건네는 묵직함에 이름을 기억했다.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가볍지 않은 글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신작 또한 얇은 책임에도 책 속의 내용에 깊이 스며들었다. 누군가는 과거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뱉어내고 누군가는 과거는 아예 존재하지 않은양 입을 닫는다. 그 어떤 것도 내보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참이다. 그 기억들을 꺼내면 자기가 무너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꼭꼭 숨겨두었다.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도 들어올 수 없는 방. 오로지 자신만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문밖에서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열어주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침잠했다.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기 힘겨워서일까. 기억들을 떠올리면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였을까. 오로지 발레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얻은 타이틀. 성공한 무용가였다. 

 

자기 나이 또래의 많은 무용가들이 이미 은퇴를 한 상태였다. 제인은 은퇴를 미루고 다시한번 재기를 노렸다. 한참 뜨는 안무가 텐의 러브콜을 받았다. 정석대로 해온 자신의 무용스타일과 맞지 않다고 여겼지만 텐이 원한건 제인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나던 날 자신을 아는 것 처럼 이야기 해 제인은 놀랐고, 일부러 제인의 반응을 지켜보고자 했던 텐의 의도가 통했다. 

 

텐이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춤은 과거 그녀의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것이었다. 세 사람이 눈을 가리고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었던, 로프를 몸에 감고 갈망의 몸짓을 했던 기억이었다. 텐이 그 춤을 어떻게 알았을까. 한 학년 후배라고 말했지만 그의 이름과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앨범 뒷편에 수록된 사진에서 발견했다. 맥스의 옆에 서 있는 허약한 소년의 모습으로. 레이라는 이름이었다.

 

 

소설은 제인의 시점으로 쓰이다가 결말 부분에서 텐의 시점으로 쓰였다. 제인의 입장에서 바라 본 텐의 정체가 궁금했었고, 텐의 입장에서 본 제인은 또다른 이야기였다. 전혀 접점이 없었을 거라는 예상을 뛰어 넘었다. 어느 순간이 조금 의심스러웠는데 그게 텐이었다. 사실을 조작하고, 두 사람을 수렁에 빠뜨렸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건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는 성공한 무용가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래전의 숲 속으로 늘 돌아갔다. 갈망에 찬 몸부림. 그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방에 스스로 갇혀 있었다. 그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방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우리나라가 아닌 싱가포르이다. 적도의 섬. 그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버려진 섬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제인과 복수를 꿈꾸었던 텐처럼. 엄마의 마음을 다치기 위한 행동을 서슴치 않은 레나처럼.

 

제인, 지금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오히려 지금부터는 네가 보고 싶은 것들을 볼 수 있는 거야. (127페이지) 

 

 

이해할 수 있겠니? 어둠 속에서 추는 춤만이 진정한 춤이라는 걸. 그런 춤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런 춤을 춰야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거라는 걸.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오직 너의 춤을 춰. 제인. (155페이지)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제인이 입양된 아이였다는 것이다. 엄마의 친딸과 제일 닮았다는 이유로. 또한 친 딸이 발레를 했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레를 시작했다. 엄마의 마음에 들겠다는 이유로. 아마 그래서였을수도 있다. 애써 숲속에서 추었던 춤을 기억 저편으로 보낸 것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았던 것도 엄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려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녀를 그토록 침잠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어야만 해결될 일이었다. 그녀가 기억속에 묻어두었던 불온한 숨. 자신만의 춤을 출 수 있었던 희열도 그 숲속에서였다는 걸 깨닫는 일일 것이다. 비로소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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