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 한강이 등단 후 20대 중반에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첫 소설집이다. 1994-1995년에 쓴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벌써 20년이 지난 소설들인지라 개정판에서는 지금의 감성에 맞게 소소한 어미들을 다듬었으며,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작품은 뺐다고 한다. 지금은 중견 작가가 된 한강의 대표 정서는 누가 뭐래도 슬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결같은 기조는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등의 최근작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러므로 한강의 초기작들을 읽는 건 그의 슬픔이 자리 잡은 원류(原流)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한강의 소설을 몇 편 읽어 본 사람이면 그의 초기작도 당연히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쓰였겠거니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야기들은 심연의 상처를 가진 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절대적인 상실감-혈육의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중심인물 두 명의 대립을 통해 이야기가 서술된다. 『여수의 사랑』의 정선과 자흔,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과 명환, 『야간열차』의 영환과 동걸, 『진달래 능선』의 정환과 황 씨, 『붉은 닻』의 동식과 동영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다. 『질주』에서는 직접적인 인물의 병치가 없고 회고로부터 고통이 환기되는 구조를 가지지만, 혈육의 죽음이라는 상실감의 근원은 앞선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들은 대부분 한 명의 초점 화자가 다른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구조이며 중심인물들은 제각각의 상처와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난하며 체념적인 이들은 동거를 통해 (여수의 사랑, 진달래 능선, 어둠의 사육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을 사랑하기도 어려운 불완전한 인간들이기에 남을 이해하기란 더욱 어려워 보인다. 희망 없는 바닥의 날들은 그저 견뎌내야 하는 걸로 보인다.


혈육을 잃은 절대적인 상실감, 지키지 못한 가족, 가난. 이런 상처들은 치유할 수 있는 것인가? 한강은 쉽사리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작품들도 쉽사리 희망을 비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상실감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에 함께 공명(共鳴) 한다. 작중 인물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절망의 병존 속에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건 타자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화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밤하늘은 숨이 막히도록 어두웠다. 베란다 방에서 여러 번 밤을 지새워본 나는 아파트촌 위의 하늘이 가장 어두울 때를 지나서 새벽이 동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장 지독한 어둠이 가장 확실한 새벽의 징후임을 나는 수차례 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새벽을 의심했다. 고질병을 가진 사람이 한차례의 통증이 지나갈 때마다 죽음을 확신하듯, 나는 얼마 안 있어 지나가고 말 어둠이 영원할 것만 같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135p

친구 녀석들의 모임이 재개되었다. 나는 왠지 그곳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은 피가 끓고 눈이 부신 젊음이 있을 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지 이제는 내 몸에 잘 맞는 껍질이었다. 그 껍질 속에서 나는 편안했다. 186p

정환은 그동안 자신의 앙상한 희망을 혹사했다. 곰이나 원숭이 같은 짐승들을 먹이지 않고 채찍으로 다스리는 곡예사처럼 정환은 자신의 희망을 함부로 다루고 소모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환의 지친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작정의 희망이었다. 의지나 가능성과는 무관한 성질의 감정이었다. 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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