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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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이 무려 인생이다. 인생, 인생 뭘까. 가끔 쉽게 인생 뭐 있느냐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체념이지 인생의 본질을 깨달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인생 모른다.

 

소설 내용은 중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상실만을 반복하던 개인의 인생,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패왕별희, 마지막 황제, 같은 영화에서 보던 그런 종류다. 전쟁을 겪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고, 개인의 삶은 속수무책으로 휘말리고, 뭐 그런 정도. 근현대에 멀쩡한 나라 없었고 한국도 역사의 질곡 심했지만, 예술 작품에서 접하는 중국 역사의 폭력성은 늘 상상 이상이다. 

 

소설 주인공 푸구이는 지주였다가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는데, 자신의 전 재산을 따간 상대방은 공산주의 정권에서 지주라는 이유로 처형 당한다. 그럼 인생지사 새옹지마구나 역시 나쁜 일은 그냥 나쁜 일이 아니야, 라고 쉬운 교훈을 얻고 말아야 할까. 그러기엔 여전히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전쟁에 강제 징집되고, 가족들은 계속 죽고. 자신만 알고 철없던 푸구이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땐 남은 가족도 없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늙은 소 한 마리뿐.

 

그런데 모든 걸 잃은 노인이 들려주는 기구한 인생에서 묘한 위안 같은 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 감정을 엄밀히 말하면 위안은 아니다. 이런 기구한 인생을 보니 내 힘듦은 힘듦도 아니구나, 라는 안도 같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그래도 살아가니까 인생이구나, 하는 체념적 납득이라고 하면 조금 더 정확한 정리일까. 또 한편으론 체념적으로 납득해버리기엔 이건 어쨌거나 살아남은 주인공의 이야기 아닌가. 주인공 이야기에 동하는 건 무의식적으로 나를 세상의 중심에 놓는 사고일지도 모른다. 내가 주인공은 아닌데. 그렇다면 문제는 언제나 주인공 주변인의 인생이 된다. 내 인생은 어쩌면 제 명 살지 못한, 운도 없이 죽어나가는 소설 속 주변인의 그것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회상은 살아남은 자의 특권이다. 일단 평균 수명은 살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위내시경 검사는 일 년 전 받았으니 빨리 대장 내시경 검사도 받아 봐야 하는 걸까. 책은 잘 읽히는데 정리 안 되는 소회가 느껴지고, 괜히 애늙은이 된 기분이고, 비는 오고, 소주 마시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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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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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첫 단편소설집. 이젠 시의성이 그다지 없지만, 당시엔 센세이셔널 했다고. 기실 90년대 중반은 세계와 투쟁할 필요가 없던 시대였으니 세계와 분리된 듯한 윤대녕 소설이 주목받은 것은 당연하다.

 

많은 평론가와 독자가 읽고 해석했듯 소설은 개인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평론가 남진우가 멋들어지게 요약해낸 주제 의식은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 작가도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를 여섯 글자로 슬쩍 흘려놨다. "근원결락강박 (223)"

 

평론가, 독자 모두 거의 같은 해석을 내놓고 작가도 동의하는 주제의식을 내가 한 번 더 해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어떤 인간은 왜 은어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넌 왜 그렇게 사니?" 이런 존재론적인 질문(ㅎㅎ)에 대답은 저마다 다를 테니까.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인 은어는 강에서 나고, 바다에서 성체 시기를 보냈다가, 다시 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산란하고 죽는다. 인간도 자신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과거에 묶어놨던 진짜 나를 찾아가든, 어딘가에 잠재된 나를 찾아가든, 모든 여정은 현실의 불만족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짐짓 만족스러워 보이는 지금 삶이 실은 진짜가 아니었다, 라는 차원보다 아예 현실 자체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나를 찾아야 한다고 허둥대는 것이겠지. 윤대녕 소설 속 인물들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먹물들이다. 지성과 자의식은 날카로운데, 생활은 그럭저럭이라고 하면 될까. 세상 탓을 하기엔 민주화도 됐고, 경제는 쭉쭉 발전하고. 뭔가 내 자리는 없는데 투쟁할 대상은 없다. 그렇다면 개인은 혐의를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라고 2017년의 독자는 현실적으로 삐딱하게 이야기를 읽었다.

 

현실이 불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내 심성이 왜 이리 글러먹었을까, 라는 생각이 종종 들어 근원을 생각해볼 때가 있긴 하다. 현실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진 못하니 잠자리에서 잠 헤쳐가며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내 근원을 결락시킨 것은 무엇일까. 그때마다 가정사와 트라우마 같은 것들에서 혐의를 찾긴 한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다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은어는 강으로 거슬러올라가 결국 그곳에서 죽는데,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어찌 됐든 불만족스럽고, 무언가가 결락된 현실에서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회귀는 은어처럼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회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죽음 충동은 소설과 영화로만 느끼고 다시 현실로 복귀하면 된다. 그것이 예술이 주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회복을 위한 회귀 행위로, 삼국지5 (KOEI, 1996)를 며칠 동안 재밌게 했다. 음, 써놓고 보니 개뻘소리 서평이네.

귀소하고 싶어요. 목숨을 걸고!
영원회귀? 좋지, 거기서 우리는 죽고 우리의 아들딸들이 되어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러고 나서 우리는 쉼 없이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하며 또 은어 얘기를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의 쓰레기를 게워내면서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모든 걸 뒤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거슬러오르고 있다. 우리의 경과가 시작된 곳으로, 부활하기 위해, 지금 수만의 은어떼들이 나와 함께 강물을 거슬러오르고 있다. 그래, 우리는 다시 무언가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뒤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벗어던지기 위해 정든 너를 처단하기도 한다.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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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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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필립 로스를 읽었다. 한 인간이 몰락하는 이야기일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읽는다. 역시 비극이다. 르네상스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있었다면 현대엔 필립 로스의 비극이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인간의 몰락, 필연적인 몰락. 필립 로스는 왜 집요하게 인간의 실패와 몰락을 쓰고, 독자는 왜 필립 로스를 찾아 읽을까.

 

이념이 인간을 유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분명 이 소설도 크게 보면 그런 궤에 속한다. 매카시즘 광풍에 스러져 간 개인의 이야기 정도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의 악 때문에 선한 인간들이 스러져 나갔다,고 말하면 이는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반쪽 사실이다. 그 안에서 실패하고 스러진 인간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오류를 범했다. 그 오류는 인간이라 할 수밖에 없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난 이 소설을 개인의 오류가 시대의 오류와 맞물리며 인간을 쓰러트린 이야기로 읽었다. 필립 로스의 몰락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 외면하는 그 자신의 절박한 오류를 끈질기게 밝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공산주의자 아이라 린골드는 라디오 스타가 되고, 유명 배우와 결혼하지만 그의 삶은 결국 실패한다. 결혼에 실패하고, 여러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그 자신의 신념에 삶을 일치시키는 데에도 실패한다. 그를 쓰러트린 결정적 한방은 아내의 고발 회고록이지만 이는 그 자신이 쌓아올린 오류들의 결과다. 아내의 배신 이전에 그가 삶의 모든 것을 배신하며 살았으므로. 그렇다면 아이라 린골드의 몰락을 지켜본 독자는 인간의 몰락이 인과율에 따른 필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그의 형 머리 린골드는 균형감 있는 중재자 역할을 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그의 아내는 살해당한다. 흑인 아이들을 버리면 안 된다는 교사로서의 신념과 선의가 그의 삶을 배신한 것이다. "종교,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같은 명백한 망상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도, 여전히 자신의 선량함이라는 신화는 족쇄처럼 (530)" 남아 그의 아내를 희생시켰다. 인간의 악은 당연히 오류지만, 선의 또한 오류로 귀결되는 이런 불합리가 어딨단 말인가. 독자는 끝내 "삶 자체가 오류다. (533)"라는 처연한 명제를 인정해야 할까?  이런 삶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모든 인간이 실패하는, 희망을 찾기 힘든 비정한 이야기를 쓰고 읽는 건 그 몰락 속에 인간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려 말하면 이렇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소설 마지막 페이지에서 화자 주커먼은 모두 각자의 용광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시대의 광풍 속에서 각자의 용광로 속에 자신을 던진 인간이었다. 우리는 그 삶들을 목도하며 인간을 증명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장담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몰락한 삶을 인간의 패배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필립 로스는 작중 문학 교수의 입을 빌려 문학은 "모순을 지우고 모순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모순 안에 놓여 있는 고통받는 인간을 보는 것 (374)"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문학은 단순한 실패담이 아니다. 인간의 실패에서 인간다움을 찾고 끝내 인간다운 세상이 당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실패가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인생을 비난할 순 없어. 한 인간에게서 제멋대로 사회적 지위를 빼앗고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기술들을 보면 오히려 인생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 (12)" 아, 이번에도 완패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만큼 기품 있게 인간을 위로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 시절 수많은 미국인이 파멸했지. 그들의 신념 때문에 정치의 희생자, 역사의 희생자가 된 거야. 하지만 내 기억에 아이라처럼 파멸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건 아이라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기로 선택했음직한 미국의 위대한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어. 어쩌면 이념, 정치, 역사 같은 걸 떠나서, 진정한 재앙은 결국 개인의 근저에 자리한 나약한 감상이 아닐까 싶네. 실패가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인생을 비난할 순 없어. 한 인간에게서 제멋대로 사회적 지위를 빼앗고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기술들을 보면 오히려 인생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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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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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김연수가 뻔하게 읽히니 이 책이 별로거나 마음이 피폐해졌거나, 둘 중 하나다. 김연수는 달리기로 인생을 대유하며 말한다.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누구를 항상 이겨야 하고 이기지 못할 때는 괴롭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상대하며 나아가는 과정은 괴롭지 않다는 말이다. 아, 좋은 말이다. 나도 알긴 아는데 인생은 꼭 눈에 보이는 경쟁만으로 이뤄지지도 않는다는 게 문제다. 모든 일이 암묵적인 경쟁이라 꼭 자기를 극복하는 달리기처럼 살 수는 없다. 결국 누군가보다는 영어를 잘해야 하고, 누군가보다는 말을 잘해야 하고, 누군가보다는 음식을 잘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보다는 소설을 잘 써야 한다. 그래야 여유롭게 달리기도 할 수 있다. 아, 제길. 난 너무 찌들었다.

그래도 늘 달려야 결국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다는 루틴의 중요성에는 공감했다. 수학 정석을 늘 두 시간씩 풀었던 루틴은 경쟁자들보다 더 나아가기 위한 루틴이었으니 행복할 리 없었지만 그 꾸준함이 없었다면 근의 공식도 모르던 내가 수능 수학 만점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랑 ㅎ). 경쟁이 아닌 루틴은 그래도 즐거운 편이다. 별일 없으면 하는 달리기 하루 한 시간, 독서 하루 한두 시간 정도가 지금 나를 채우는 루틴이다. 특히 일 년 전부터 시작했던 러닝은 자전거 타기에 비해 장점이 많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자전거 타기는 복장과 장비를 갖추는데 시간이 걸려 최소 3시간 이상은 타야 아깝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밤에 타긴 어렵다. 루틴으로 하기엔 왠지 어렵다. 그러나 러닝은 러닝화 하나만 있으면 된다. 겨울이면 타이즈 정도 추가. 한 시간이면 운동 효과는 충분하니 시간 뺏기는 느낌도 덜하다. 약속 있는 날 아침 자전거를 타긴 빡세지만 러닝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러닝 꾸준히 했더니 체력 검정도 특급 나오고, 술 자주 마셔도 살 별로 안 찐다 (자랑2 ㅎ).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 또한 이제 직업은 다 결정됐으니 한가롭게 러닝하고 책 읽는 루틴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이기기 위한 루틴이 지지 않는다는 루틴에 선행할 수밖에 없다. 아, 정말 나는 찌들어버렸다. 김연수의 낭만적인 문장들을 읽고 이런 생각밖에 못하다니.

어쨌거나 일단 계속 쓰고 썼더니 작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김연수 아니더라도 수많은 작가가 이미 말하고 또 말한 인생의 진리같은 것이다. 동의한다. 비단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그렇겠지. 진정 원하는 일이 루틴이 되어도 여전히 즐겁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먹고 사는 루틴도 빠듯한 사람들에게 지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겠지. 아, 또 이야기가 샌다. 난 이미 너무 삐뚤어져 버렸다. 완전 망한 독서다.

왜 제목이 고문일까? 고문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자들이라면 결국 변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은 바뀌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남는 찌꺼기 같은 게 있다. 그 찌꺼기 가은 게 고통으로 변심한 자들을 구원한다. 구원은 굴하지 않는 강청같은 인간의 마음이 하는 게 아니다. 인간들이 모두 변하고 난 뒤에도 찌꺼기처럼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얼룩 같은 게 우리를 구원한다. 그걸 일러 영혼이라 할지도 모른다. 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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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의 탄생
이언 모리스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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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의식은 시간이 지나며 성숙해졌다. 노예가 해방되고 여성에겐 참정권이 주어졌다. 절대다수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다. 실제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관념상으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지금은 이것들이 당연하지만 수백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인류의 가치관은 변했다. 그렇다면 인류의 가치관은 어떻게 탄생하고 변했을까.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인권이라는 개념이 이전엔 없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원래 존재하던 개념이 억눌렸다가 사회 변화 기류를 따라 발현됐을까? 저자는 이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정한다."

 

저자는 유물론적 이론을 제시한다. "에너지 획득 방식이 인구 규모와 밀도를 결정했고, 이것이 특정 사회 체제에 상대적 유용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이 특정 가치관에 경쟁력과 비교우위를 주었다. (205)" 설명하자면 이렇다. 수렵채집인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는 비교적 평등한 생활을 했고 정조 관념엔 상대적으로 무심했다. 폭력에는 관대했다. 1인당 획득 열량이 더 많은 농경인들은 반대였다. 정치적·경제적·성별 위계를 전반적으로 합당하게 여겼다. 정조 관념에 엄격했다. 폭력에 대한 허용치는 낮았다. 수렵채집인의 폭력에 대한 관념은 원시적이었지만 정치·경제·성에 대한 관념은 진보적이었던 걸까? 아니다. 저자는 그 시대에 적합한 가치관이 선택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동 생활하는 수렵채집인에겐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이 없다. 반면 정착 생활하는 농경민에겐 물질적 재산이 있다. 물려줄 재산이 있다 보니 물려받을 아이도 자기 자식이 맞는다는 걸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농경민들에겐 노동생산성 증대가 관건이었고 남자의 강한 상체 근력이 농사일에 중요해져 바깥일은 남자의 일이 된다. 농경민의 아내는 여성 수렵채집인보다 아이를 훨씬 많이 낳았다. 대체로 일곱 명 정도였다. 성년의 대부분을 임신, 수유, 육아에 매달려야 했다. 이런 점들이 남녀 간의 노동 분업과 위계를 정당화했다. 즉, 농경사회에선 가부장제가 노동 조직화에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화석연료 시대와 농경 시대의 가치관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전근대적 가치관은 화석연료 사회에서 퇴출된다. 화석연료 이용자는 정치적 위계와 성별 위계를 나쁘게 보고, 특히 폭력을 죄악시한다. 경제적 위계에 대해서는 수렵채집인보다는 긍정적이고 농경민보다는 부정적으로 본다. 이 역시 인간의 의식이 진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필요성에 의해 가치관이 선택된 결과다. 유아생존율의 향상, 기술의 진보는 여성을 집 밖으로 자연스럽게 불러냈다. 노예 해방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책에서 가장 예리한 부분이다. 설명은 이렇다. 임금노동이 매력적인 대안이 되자 자유노동자가 수백만 명씩 노동시장에 유입됐고, 농경시대에서 필요악이던 강제노동은 퇴출됐다.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서 농노와 노예는 제조품을 살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기업가들이 강제노동을 점차 이익 추구와 성장의 걸림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경쟁자가 강제노동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노예 해방도 시대의 필요였다. 논증은 치밀하지만 메시지는 간명하다. "우리의 가치관도 우리의 유전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208)" 

 

저자는 1982년 그리스에서 노인 부부를 만난다. 남자 노인은 당나귀에 앉아서 편하게 가는데, 옆에선 노파가 무거운 자루를 짊어진 채로 걷고 있었다. 둘은 부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풍경 아닌가. 저자의 일행이 남자 노인에게 부인은 왜 당나귀를 타지 않았냐고 묻는다. 대답이 걸작이다. "부인은 당나귀가 없다." 너무 당연하듯 대답하여 물어본 사람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혼란스러운 경험은 계속된다. 2012년엔 탈레반이 자신들을 비판하던 16세 소녀 유사프자이의 머리에 총을 쐈다. 2014년엔 보코하람이 250명이 넘는 여학생을 납치했다. 탈레반과 보코하람은 전통적 성 역할을 굳건히 믿는다. 소녀는 학교에 가면 안 되고 이것을 비판하는 여자는 죽거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런 사례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맞고 그들은 틀렸다. 내가 그들보다 가치화를 잘해서가 아니라 농경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로는 탈레반과 보코하람의 죄는 도덕성의 결여가 아니라 도덕의 후진성이다.

 

혼란스러운 경험은 국내에도 있다.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은 전 국민을 경악게 했다. 이를 두고 천사의 섬이 아니라 '악마의 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홍어나 전라디언 운운하며 지역비하의 논리로 발전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용서받아선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악마여서, 전라도 사람이라서 그랬다는 접근은 분노 해소 이상의 기능은 없다. 염전업이 이뤄지는 전라남도 섬들이 경상남도에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비인간적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섬 특유의 폐쇄성은 사람들을 농경시대 가치관으로 살게 하고, 어디서라도 폐쇄된 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현시대의 많은 갈등은 모두가 같은 시대를 살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저자의 거시적 시각을 미시적으로 좁혀 사회를 바라봐도 어느 정도 유효할 것이다. 가령 '틀딱'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노인 비하 정서를 생각해보자. 그들과 우리는 분명 다른 시대를 살았다. 한국은 농경 시대부터 화석연료 시대로의 이행을 급격하게 겪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아직 극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가난은 화석연료 시대 가치관의 정착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적 사고는 궁극적으로 폐기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진 지금 우리는 그들 행동을 이해할 의무도 있지 않을까.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용서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 비합리의 발원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없다면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가치관은 일종의 적응형질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 시스템이 변하면 자체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치관을 조정한다. 이는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는 당위의 실현이 아니며, 가장 개연성 높았던 잠재의 실현일 뿐이라는 뜻이다. 가치관은 더 큰 전체를 위해 기능하는 부분이다. 가치관을 현실의 맥락에서 뜯어 내 상상의 저울로 가늠하고 판단한다고 절대 보편의 완벽한 가치관을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치관은 엄연히 현실 세계에 속한 것이고, 사회 시스템의 부분으로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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