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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북쪽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9
현택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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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가 쓰고, 입도민이 읽는다!"

 

10여 년 전 4개월간의 제주 생활이 내가 제주도와 첫 인연을 맺은 시작이다. 다소곳한 새색시의 수줍음을 간직한 듯 태곳적 신비를 머금은 제주도는 내게 터전 이상의 곳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원초적 매력의 땅. 이런 이끌림이 나와 우리 가족을 이곳 제주도, 그중에서도 제주 북쪽에 자리 잡게 했다.

이제는 각종 SNS로 인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제주도 곳곳의 핫플레이스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진짜 제주를 만나려면 눈을 돌려야 한다.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작은 깡촌 바닷가 마을의 구멍 난 현무암 돌담길을 걸어보았는가? 시간이 멈춰진 듯 온몸을 휘감는 고즈넉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깡촌 포구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볼 때 찾아오는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낯설다.

이렇듯 리얼 200% 제주의 속살을 마주할 수 있는 특권은 먹고 마시며 진탕 소비만하고 돌아가는 관광에는 없다. 얼마 전 화장기 없는 제주의 민낯을 마주하게 만드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제주 북쪽>은 제주 토박이가 쓴 진짜 제주에 관한 이야기다. 서점 매대에 가득한 제주도 관광 가이드북과는 결이 다르다. 한 지역을 바로 알고 싶다면 먼저 그 땅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배우는 것이 좋다. 이 책은 바로 제주도가 품은 사람과 삶에 관한 일종의 인문 에세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의 동서남북 중 북쪽 5개 동네, 내가 사는 고장의 숨은 이야기가 사뭇 친숙하고 정겹다. 저자는 단순 여행 정보가 아닌 땅과 사람 이야기를 푼다. 아름다운 제주도 이면에 숨겨진 아픔의 역사와 그것을 오롯이 한 몸에 짊어지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이들의 체취가 깊고 아리다.

제주의 중심 북쪽 지역 28개의 다양한 이야기가 어우러져있다. 저자는 4.3으로부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진짜 제주도를 알고 싶다면 먼저 4.3과 마주해야 한다. 천혜의 관광지로서의 제주에 새겨진 4.3의 끔찍한 기억을 제주시 봉개동 4.3 공원에서 만난다. 이념과 색깔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임 당했다. 불과 70여 년 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주의 하늘 아래서 일어난 일이다. 제주도 전역에 4.3의 핏물이 고여있다.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들어봤는가? 아우슈비츠나 킬링필드와 같은 제노사이드 현장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다. 4.3의 비극을 품은 제주에도 있다. 슬픔은 묻어둘수록 저며온다. 아픔을 직시할 때 회복과 상생의 활로가 보인다. 70여 년 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주에서 자행된 인간성의 끝단을 마주할 때에야 만 지금의 빛나는 제주를 누릴 자격이 생긴다. 제주항, 금오름, 진아영 할머니 삶터, 곤을동 등의 이야기들이 독자를 4.3이라는 삭힌 비애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어둡고 슬픈 이야기 일색은 아니다. 저자는 종종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맛집에 대한 질문을 받는단다. 그런데 토박이들은 관광객 맛집은 꺼린단다. 비싸고 화려한 곳은 찐 맛집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진정한 토박이 맛집에 관한 이야기가 다수 등장하기에 입도민으로서 반가웠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서문시장 삼복당을 만난다. 50년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제주의 명물 빵집이다. 지금도 빵 한 개의 가격이 500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동문시장의 빙떡, 오메기떡, 모닥치기 떡볶이, 상외떡, 수애라고 불리는 보성시장의 베지근한 순대 국밥,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인 책밭서점 등 이야기 속 사람 냄새가 구수하다.

 

 

저자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제주 북쪽이 간직한 천혜의 관광지와 역사, 신화와 설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골고루 버무렸다. 제주도는 삼성 건국 신화에서 보이듯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공생했다. 제주도의 텃새 문화라고 알려진 '괸당'도 시간 속 어우러짐 속에서 볼 때 외지인들까지 괸당으로 받아주는 넉넉한 인심의 확장을 포함한다.

고려 시대 말을 관리하는 원나라 목호, 조선 시대 유배인들, 6.25 피난민들, 21세기 입도민들까지... 제주도는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

"먹엄직이 살암직이" 어떻게든 살려고만 하면 살 수 있다는 제주 어르신들의 말이란다. 나는 아직 여기 사람들에게 새댁이라고 불리는 입도민이다. 배 타고 가다가 폭풍 만나 죽어도 상관없기에 극악한 죄인들을 유배 보냈던 조선 시대 유배지에서 나름 잘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다. 낙향해서 뭐 먹고살지 하는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막상 내려와보니 정말로 먹엄직이 살암직하다.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제주 북쪽의 숨결을 토박이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제주의 숨은 이야기들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을 울린다. 제주도를 여행하며 '찐 제주'를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캐리어에 이 책 한 권 담아 가길 권한다.

슬픔과 환희가 공존하는 신비의 땅, 제주도는 오늘도 말없이 고요하다. 오늘 유난히 보룸이 많이 분다. 일어나 바당 보룸이나 맞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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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남매 별난 방탈출 3 흔한남매
김언정 지음, 차차 그림, 흔한컴퍼니 감수, 흔한남매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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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남매(이하 흔남)는 초등 저학년들에게 거의 뽀통령 수준이다. SBS 웃찾사 출신 개그맨 으뜸이와 다운이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다. 흔남은 이제 TV, 유튜브를 벗어나 출판물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흔한남매 별난 방탈출> 시리즈이다.

우리 집 1호가 오매불망하던 3권을 받았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1독을 끝내고 잠시 후 재독에 들어간다. 내 차례는 며칠이 지나서 돌아왔다. 흔남 정규 애니메이션 북으로 이미 8권까지 출간이 되어있고, 이 책은 방탈출 미션 스토리 북 시리즈로 기획된 책이다.

책은 총 세 개의 미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정판 게임기를 두고 오빠인 으뜸이와 동생 에이미가 펼치는 요절복통 미션 대결, 한여름 밤의 꿈과 현실을 오가는 모험, 학교에 갇혀서 외계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주인공들이 학교를 탈출하는 미션의 재미가 사뭇 쏠쏠하다.

각 에피소드에는 미션을 완료하기 위한 과제가 주어진다. 중간마다 주어지는 퀴즈를 풀어야 하고 깜짝 반전을 추리해야 한다. 더불어 보너스 테스트가 매 챕터의 말미에 던져져 있다. 주어진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재미가 아이들을 휘감는다.

흔남이 벌이는 코믹적인 대화와 행동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혀져 있기에 한번 책을 잡으면 놓을 줄 모른다. 거기에 더해 아이들의 성취욕을 자극하는 다양한 미션과 문제들이 어린 독자들의 집중력과 창의력 버튼을 건드린다. 나 또한 책을 잡고 어느새 낄낄 거리며 문제를 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느낀다.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함께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남매가 있는 집들은 200% 동감할 것이다. 어린 시절 남매는 보통 친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물론 예외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매들은 동료이기 전 경쟁자다. 맛있는 것은 하나로도 더 먹으려고 하고, 재미있는 장난감이나 게임기도 내가 먼저 차지하려고 싸운다. 집안에서는 하루에도 수차례 전쟁이 벌어진다.

학교 다닐 때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친구가 자신의 여동생과 대판 싸우는 것을 보고 식겁한 적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내가 남매를 키우다 보니 우리 집 남매들의 모습 속에서 흔남의 향기(?)가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흔남 유튜브와 책을 보면 흔남의 엄마가 무질서를 바로잡는 해결사이자 중재자로 등장한다. 엄마의 역할이 십분 이해된다.

흔남 캐릭터 중학교 3학년 오빠 으뜸이와 초등학교 5학년 여동생 에이미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이자 경쟁자다. 유튜브와 정규 스토리북에서도 이들의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재미있고 유쾌하다. 탈출 미션 스토리북에서는 이들이 경쟁자로서 등장하기도 하지만 함께 어려움과 곤경의 상황을 탈출해야 하는 동료로서의 우애가 더 강조된다. 내용상 과장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재미로서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는 부분이다.

TV 개그로 탄생한 흔남은 이미 그 대상이 대중적이다. 이후 어린 구독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기염을 토했다. 넉넉잡고 15분이면 다 읽는 책을 덮으며 흔남의 성공 요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소위 '자뻑'이라는 현대인들의 보편 심리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 아닐까? 자신이 모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생각하는 으뜸이와 전혀 아이돌과는 상관없을 것 같지만 아이돌 가수를 꿈꾸는 에이미의 모습 속에서 어린 시절 가졌던 우리만의 치기 어린 자뻑 페르소나를 발견한다. 유치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에 흔남은 여전히 어린 독자들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부모 세대에게도 어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코로나19로 아이들마저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대변하는 키워드는 '갇힘'이다. 집안에 갇혀 마음껏 나가 놀 수도 없고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답답한 마스크에 갇혀 지내야 한다. 코로나로 사방이 막혀 있고 갇힌 상황 속에서 호감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미션 스토리북 한 권을 통해 이야기 속 갇힌 방에서라도 마음껏 탈출해보는 간접적인 체험이 잠시나마 어린 독자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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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게으름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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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쇄 40만 부 판매. 기독교 도서 한 권이 이룬 쾌거다. 속편은 전편에 비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세간의 암묵적 편견을 불식시키는 책 한 권이 이 40만 부 판매 도서의 속편이다. 안양 열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남준 목사의 <다시, 게으름>

18년 전 <게으름>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문체부터가 범상치 않다. 간결해서 군더더기 없고 호흡이 짧다. 저자가 1년 동안 현대 소설과 SNS 언어를 공부했단다. 현대 독자들이 선호하는 독서 취향과 문체의 트렌드를 반영했기에 종교 유무를 떠나 독자의 접근성을 높였다. 그러나 책은 분명 기독교 신앙 도서다.

참으로 바쁜 세상을 살아간다. 저자는 책을 통해 방향을 잃은 삶을 게으른 삶으로 정의한다. 바른 목표와 목적을 갖고 살지 못할 때 그는 게으른 자다! 영원한 절대자에 대한 사랑을 잃었기에 잠시 후면 사라질 헛된 욕망을 향해 부지런히 달음박질한다. 큰 평수의 브랜드 아파트, 고급 외제차, 높은 학벌, 좋은 직장이 전부이기에 옆을 돌아볼 겨를 없이 미친 듯이 내달린다.

 

"사람으로 태어나 그냥 있다가 죽었다!"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도 게으른 사람일 수 있단다. 쓸모없는 일에 바쁘고 마땅히 할 일에 게으르기에."

진짜 부지런한 사람은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재정렬한다. 진리를 통해 삶에 진정한 목적과 방향의 좌표를 재설정한다. 진리를 알게 될 때 많이 가치 있는 것은 많이 사랑하게 되고, 조금 가치 있는 것은 조금 사랑한단다. 하위의 사랑이 상위의 사랑에 매달리는 형국. 사람은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에야만 기독교 신앙에 귀의한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라틴어가 유행이다. "오늘을 즐겨라!?" 천만의 말씀이다! 오늘 먹고 죽자는 게으름의 구호가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철학적 자각이며 신학적 반성이다. 유한한 삶 속에서 삶의 참된 의미를 잊지 말라는 현재적 가르침의 함의다. 저자는 오늘만 진짜 있는 날이고 내일은 덤으로 주어지는 날이라고 말한다. 즉 오늘만 내게 주어졌고 내일은 안 올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내일이 올 것처럼 산다. 그래서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그 진리를 위해 사는 것도 내일로 미룬다. 오늘은 그저 나를 위해 전전긍긍한다. 책이 말하는 게으른 삶이다!

 

 

전작이 성경이 말하는 게으름의 의미에 주목했다면 속편은 다소 철학적이다. 관통하는 메인 키워드는 질서다. 바르게 사는 삶은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데 있다. 진리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를 아는 진리로부터 파생된다. 저자는 하나님이 무질서한 인간의 삶 속에 질서가 되실 때 비로소 인간과 만물이 조화와 균정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참된 질서를 상실한 인간과 사회는 이기적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제 자식도 죽이는 인면수심의 세상은 질서 부재를 반영한다. 이처럼 무질서한 세상과 인간은 참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진짜 게으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200여 페이지의 짧은 책이다. 문체마저 토막 쳐 있기에 더 짧게 느껴진다. 하지만 울림은 깊다. 저자 김남준, 명불허전이다! 가벼운 신앙 도서들이 넘쳐나는 세대 속에서 여운이 깊은 책을 오랜만에 만난다. 저자는 인생을 가장 짧게 사는 비결은 사치와 허영 속에 사는 것이며 반면 가치 있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은 세월을 아끼는 길이라고 한다.

"사랑은 삶에 목표를 부여한다. 제일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질서가 세워진다." 스스로를 성찰한다. 나의 삶 속에 쳐내야 할 곁가지가 많다. 닦아내야 할 인생과 신앙의 묵은 먼지들...

촌철살인의 매 문장이 가히 예술이다. 독자에게 던지는 저자의 에필로그가 마음을 울린다. "살아야 할 이유가 죽을 이유만큼 분명한 사람으로 사소서. 그래야 그대 행복할 것이기에."

 

우리는 짧은 삶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것을 짧게 만들고 있다. 삶이 모자라는 게 아니라 낭비하고 있다...세네카

게으른 사람, 세월이 가도 후회하지 않을 목표가 없다. 그래서 그가 불쌍한 거다. 지금 마음 바쳐 사랑할 대상이 없다.(중략)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 바르지 않은 것 위해 사는 사람이니, 그는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보다 불행하다.

세상 사랑에 빠질 때, 자기 삶의 주체성은 사라지고 정신은 오직 보이는 세상에 동화된다.

많은 사람이 목숨으로는 80까지 살아도, 의미로는 서른까지밖에 못사니, 안타깝지 않은가?

뒤집힌 질서에 대한 사랑. 그게 인간의 악(惡)이다.

게으름,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영혼의 병듦이다.

p68,120,121,158,17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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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 수업 - 그들은 어떻게 더 나은 선택을 했는가?
조셉 비카르트 지음, 황성연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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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짜면! "짬뽕과 짜장면 중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를 외치는 일명 '결정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아이디어 메뉴다. 이는 사람들이 중식집 메뉴 하나도 쉽사리 선택하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그뿐인가! 오래전 주말 TV 프로그램 중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예능이 있었다. 주인공이 운명적인 삶의 갈림길에서 Yes! or No!를 외친다. 이후 주인공이 선택한 각각의 상반된 인생 결과를 보여준다. 당시 시청률이 꽤 높았다. 서로 다른 결정이 이끄는 삶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프로그램이었다.

이 책 <결정 수업>은 결정과 선택의 순간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솔루션북이다. 다년간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고 가르쳤던 저자의 경험이 사뭇 체계적이고 농밀하다.

우리가 결정을 미루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결과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저자는 완벽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내가 선택한 결정에 흠결이 없어야 한다. 최상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다. 이는 곧 자연스레 결정을 미루는 요인이 된다. 저자는 말한다. 불완전함을 용인할 때에만 결정할 수 있다! 일단 발을 내딛는 일이 중요하다. 완벽한 정보와 정답을 갖고 결정할 수는 없다.

나는 책을 통해 개인적으로 두 가지 포인트를 수확했다. 첫 번째는 의사 결정에 있어 '직관'의 중요성이다. 선택의 결과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나의 필요를 탐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나의 직관이다. 결국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 자신이 선호하는 내면의 욕구, 무의식 속 내면의 갈망이 투영된다.

쉽게 말해 인간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는 의미다! 본성이 그렇다. 조금이라도 싫고 꺼리면 안 한다. 그렇기에 그 미세한 차이의 틈새를 잡아내는 일이 필요하고, 그 작업에 있어 중요한 것이 바로 직관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거리 두기'의 가치다. 코로나19로 귀에 못이 박힌 거리 두기가 결정 솔루션에도 해당된다. 진학, 직장, 결혼, 이사 등 인생 대소사 결정과 선택의 순간에 직관만을 믿기가 미덥지 않은가? 그렇다면 필요한 것이 거리 두기다!

우유부단함의 끝판왕들에게 있어 거리 두기는 필수다. 저자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의 선호, 자아, 현재 자신의 위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멀리서 바라볼 때 당면한 문제에 대해 명료함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즉 내가 선택해야 할 문제를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조금은 시크하게 바라보라는 것이다. 달아오른 정신의 열망과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뭇 냉정하고 쿨하게 문제를 직면하는 것!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둘 때 우리는 좀 더 객관적이며 정확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다소 용이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총합이 우리의 삶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말했다. 인생은 출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선택(Choice)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선택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인생을 예리하게 간파한 통찰이다.

리뷰의 서두에 '짬짜면' 이야기를 했다. 죽느냐 사느냐를 외쳤던 햄릿의 고민이 아닌 짬뽕이냐 짜장면이냐를 외치는 우리네 현실이 웃프다. 끝없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개인적으로 육지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옛 유배지였던 곳으로 '셀프 유배'를 선택한 낙향의 문제가 최근 내 인생의 가장 큰 선택이고 결정이었다. 직관도 사용했고 거리 두기도 했다. 미래의 큰 그림과 작은 그림도 그렸고 득실의 차이도 따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자로서 믿음이라는 무형의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출생과 죽음 사이에 계속되는 선택을 강요받는 인생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선 존재들이다.

우유부단함이 신중함의 표상이며 미덕이었던 시기는 지났다. 지금의 시대는 우유부단함으로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허용치 않는다. 빠르고 정확한 결정이 박수를 받는다. 그렇다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탕 사듯 결정할 수만도 없다. 예측 불가의 수많은 변수 가운데 가능한 한 오류와 실패, 후회의 상수를 최소화시키는 결정의 작업은 우리에게 던져진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결정은 묘기이며 예술이다! 'The Art of Decision Making', 책의 원제가 그렇게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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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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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소녀가 3명의 불량 청소년들에게 납치되어 몹쓸 짓을 당하고 살해된다. 주인공 '나가미네 시게키'는 10여 년 전 아내와 사별 후 하나밖에 없는 딸을 이렇게 잃는다. 어느 날 누군가의 제보로 딸을 납치하고 살해한 범인의 집에 숨어들어가 방에 있는 녹화 영상 비디오를 보게 된다. 곧이어 자신의 딸을 유린한 짐승들에 대한 아버지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현대 일본 문학의 양대 거장으로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저작 <방황하는 칼날>이다. 저자는 단순한 '오징어 땅콩'식 추리, 스릴러 장르의 책을 쓴다기보다 작품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적절하게 녹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을 한 번 더 반추하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명성이 자자하고 한국에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게이고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난다.

명불허전! 이번에 읽어보니 알 것 같다. 소설이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에 매우 충실하다. 흡입력이 시쳇말로 장난 아니다. 한번 책을 펼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덮을 수가 없다. 500여 페이지의 스토리를 끌고 가는데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문장이 간결한 것도 장점이다. 배경 설명과 군더더기를 최대한 쳐냈기에 글 자체가 무겁지 않고 매우 라이트 하다. 그래서 극강의 몰입감을 선사하다. 더불어 추리 스릴러 장르가 갖추고 있어야 할 긴장감과 마지막 반전까지...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치밀한 구성을 보며 마니아들이 왜 그렇게 게이고를 연호하는지 알 것 같다.

사실 게이고를 만나는 첫 번 째 책이 조금 버거운 주제다. 우리 사회가 가진 '소년법'의 맹점을 부각시키며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사법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책의 전면에 스며들어 있다. 책을 읽으며 슬픔과 함께 분노했다. 완독 후에는 무기력함을 느끼며 우울했다. 완독은 이틀 전에 했지만 감정을 정리하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시간을 두고 리뷰한다.

 

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원해준다. (중략) 소년법의 벽은 가해자를 보호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법은 피해자에게 냉혹하다. p134, p375

 

가해자가 미성년이기에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갱생을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나는 우리 사회의 허술한 법적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피해자의 아픔은 어디에서도 치유받을 수 없는 부조리한 사법체계는 제2, 제3의 피해자만을 양산해낸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또다시 소년법의 그늘 아래 숨는다. 사람을 죽여도 술을 먹고 저지른 행위였기에 감형을 받는 요지경 같은 세상.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짓밟힌 인권보다는 한 사람과 그 가족들의 인권을 처참하게 짓밟은 가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중요시하는 미친 세상에 대한 일갈.

 

 

세상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괴물을 인간의 힘으로 인간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뿐이다.

일정 기간 '보호'된 죄인들은 세상의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 대다수는 또 다시 법을 어긴다.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어떤 보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나? (중략)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 '악'을 벨 힘을 가지고 있나? p508, p534

 

소설 속 주인공은 국가 사법체계의 무능함 속에 내리쳐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칼날의 끝을 본인 스스로가 짐승들의 목을 향해 겨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바벨론 함무라비 법전의 소환, 동해보복법의 현대판 버전이다. 법이 무능하기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야만 하는 슬픈 현실.

소설이 재미를 선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딱 킬링타임용으로 적당하다는 사고의 발현이다. 반면 소설과 문학이 재미라는 본연의 임무(?)와는 결이 다른 사회적 각성의 기능을 선사할 때 그것은 작가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신성한 의무를 실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동안 내가 현대 소설을 터부시하고 오해했던 것이 이런 부분이다. 시간이 아깝고 건질 게 없어서... 처음으로 만난 게이고의 작품이 나의 이런 편견을 한순간에 불식시킨다.

소설이 재미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파장과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우리 사회가 가진 사법체계의 허술함과 소년법의 맹점, 피해자 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초점 잃은 인권 의식에 대한 반성이 사회 저변에서 거세게 일어나면 좋겠다.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 속에서 나와 내 가족이 당한 일이 아니기에 쉽게 망각해버리는 현실을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지 않을 때 누구나 다음번 희생자로 뽑힐 수도 있음을 말이다. 게이고의 경고가 섬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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