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한국소설 12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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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이현우,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한국소설 12 – 남성작가 편), 청림출판, 2021


2020년에 출간된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의 개정판이다. 초판의 1950년대 손창섭을 제외하고 이문구, 김원일, 김훈의 소설이 추가되었다. 초판을 읽었으므로 일단 추록부분이 궁금해 먼저 읽어나갔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내면적으로 고뇌하는 이순신과 짧게 끊어가면서 이어나가는 하드보일드 문체로 정리한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저자가 생각하는 대표 작품을 선별해 분석하고 있는데 초판 서문에서 보듯이 당대 사회상과 작가의 성장환경과 집필 배경 같은, 독자로서 관심을 갖고 찾아보려면 품을 팔아야 하는 정보가 자세히 실려 있어 해당 작품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저자의 주관성이 강하게 들어간 시대구분이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반드시 출현했거나 출현했어야 하는 문학사조와 작품을 짚어주고, 해당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한 아쉬움과 바람까지 지적하고 있어서 가벼운 비평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책이다.

또한 내가 몰랐거나,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읽지 않았거나,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읽을 수 없었던 작품들을 메모해놓고 읽어가는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나는 이병주의 등단작 "소설. 알렉산드리아(2020년 개정판, 바이북스)"를읽어볼 참이다.


- 초판 서문 중에서

근대적 변화가 갖는 보편성을 각 나라의 문학이 공유하는 동시에 불균등한 발전과정에서 비롯되는 상대적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이 요체다.


전체적으로 반영론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읽고 평가하려고 했다. 작품을 시대적 맥락과 작가의 전기적 맥락에 비추어 읽고자 했다. 6쪽

1장 1960년대 1: 최인훈 《광장》 : 남한과 북한 체제 모두를 거부하는 ‘회색인간’의 의미와 한계


-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법, 이념, 사회적 질서 등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단순한 생물학적 아버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인정하고 이름을 부여해줘야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데 이렇게 주체를 보증해주는 존재를 다른 말로 ‘대타자’라 부른다. 대타자 부재의 문학, 결손의 문학이 바로 손창섭 문학이다. 그렇다면 손창섭 이후 문학의 과제는 ‘대타자의 설립’인 동시에 ‘주체로서의 자기 정립’이어야 한다. 34-35쪽


- 1960년대 문학은 두 단계 출발점을 갖게 된다. 첫 번째는 최인훈의 《광장》에서 나타난 ‘비어 있는 주체’이고, 그다음 단계는 김승옥이 탄생시킨 ‘속물’이라는 주체다. 37쪽


2장 1960년대 2: 이병주 《관부연락선》: 전혀 다른 문학의 길을 제시한 ‘한국의 발자크’ 이병주의 세계


- 이병주가 쓰는 표현인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할 때의 ‘산하’야말로 이병주 문학의 핵심이다. 이병주가 내거는 ‘산하의 허무주의’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61쪽


3장 1960년대 3: 김승옥 《무진기행》: 순수에서 세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포착한 현대인의 증상

- 윤희중의 결혼은 사랑에 의한 결합이 아니고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적인 세계다. (···) 다만 꺼림칙함은 갖게 된다. 사랑을 포기하고 돈을 선택하는 것인지라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은 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입장권이다. 91쪽


- 윤희중이 무진과 함께 연상하는 것이 세 여자다. 광주역에서 만난 미친 여자, 미쳐가는 여자인 음악교사 하인숙, 자살한 술집 여자.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인데 윤희중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부분은 그동안 상당히 과소평가되었지만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한다. 윤희중은 남자이지만 무진에서의 세 여자와 마찬가지로 ‘여성화’되어 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결정의 주체는 아내고 (134쪽) 윤희중은 아무런 힘이 없다. (···) 윤희중이 철저하게 수동적인 객체로 그려지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문제성이다. 92-93쪽


4장 1970년대 1: 황석영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은 ‘방랑자문학’을 넘어 ‘비판적 리얼리즘’에 도달했는가


5장 1970년대 2: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살아 있는 권력을 겨냥했던 가장 비판적인 소설로 다시 읽기


- 이 작품은 단순히 조창원 원장 개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조백헌 뒤에 조창원 원장이 있고 그 뒤에는 박정희가 있다. 142쪽

6장 1970년대 3: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


7장 1970년대 4: 이문구 《관촌수필》: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전근대 인물들의 의리와 인정

8장 1980년대 1: 김원일 《마당 깊은 집》: 해답을 찾기보다 상처를 드러내는 김원일의 분단문학

9장 1980년대 2: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중산층이 되려는 독자들의 열망을 자극한 이문열의 교양주의


10장 1980년대 2 :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 아버지의 그늘을 넘어 ‘탈주’를 모색하는 실험적 소설의 탄생


11장 1990년대: 이승우 《생의 이면》: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텅 비어 있는’ 현대인을 위로하는 문학


- 《생의 이면》도 일종의 성장소설이자 교양소설로 읽힐 수 있다. 동시에 최근의 여러 문학들에서 보이는 인물상인 ‘텅 비어 있는 인간’이 이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할 법한 주인공의 형상이다.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할로우맨’이라고도 불린다. 텅 빈 인간, 투명인간, 허수아비 인간이다. 이승우의 경우 아버지도 부재하고 어머니도 부재하는 ‘고아’다. 고아가 어떻게 자기가 될 수 있는가, 할로우맨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채울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신을 주체로서 정립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304쪽


- 이문열과 이인성, 이승우는 한국현대문학에서 ‘주체 형성’이라는 과제의 세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각자 당면해 있는 문제 상황이 다른데 이문열은 이념으로서의 아버지, 가족을 내버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있다. 그 애정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정립하려고 한다. 이인성은 너무나 막강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앞에서 스스로 분열되고 해체된다. 그래서 작품이 명쾌하지 않고 난해하다. 이인성 문학은 아버지로부터 일탈, 탈주의 시도다. 자전적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살아 있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필사적인 사투를 벌인다. (···) 그런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모델로 조이스, 카프카 문학 등을 참고할 수 있다.

이승우의 경우는 이인성과 완전히 반대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존재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부재한다. 동시에 어머니도 그를 고아 취급한다. (···) 이승우의 경우 동일시를 보증하는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데서 아버지를 데려와야 한다. 교회에 다니고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다. 306-307쪽

12장 2000년대 : 김훈 《칼의 노래》: 작가의 분신이자 근대적 인간으로서 ‘허무주의’를 말하는 이순신


- 결국 김훈은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소설을 쓰는 셈이다. 하나는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내면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문체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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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 개정증보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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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1959-2020), 돌베개, 2021(개정증보판)

 

2014년 초반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데이터를 업데이트 하고 2016년 이후 대한민국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 국정농단과 촛불혁명, 대통령 탄핵, 문재인 정부 출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일본의 수출규제, 코로나19에 관한 서술을 본문 곳곳에 녹여 서술하고

별도의 절로 추가한 부분도 있다. 초판을 가지고 있는 독자 입장에서 우선 추가된 부분을 확인했고, 그 다음으로 목차를 보고 흥미가 있는 부분을 먼저 읽고 다시 목차에서 골라 읽는 식으로 읽어나가 결국 완독에 이르렀다. 물론 단순 데이터나 사실의 언급에 불과한 부분은 건너뛴 부분도 있다.


최근 5년이 추가된 부분은 대한민국 국민이 대부분 몸소 겪은 체험의 영역에 속한다. 이런 경험은 심장과 세포 곳곳에 각인되기 때문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추위를 견디며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코로나19 선별진료소를 찾아 기다란 면봉이 콧속으로 들어온 기억들은 아마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몰랐거나 내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몰랐었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알아가는 재미가 훨씬 컸다.

해방전후 미군정 시기, 한국전쟁의 발발, 4.19와 5.16 유신,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까지 내가 없었거나 내가 존재했더라도 자각할 수 없었던 순간들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을 읽어나가게 하는 추동력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미래는 이미 눈앞에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과거-현재-미래는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어쩌면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내가 겪는 지금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을 적금처럼 차곡차곡 모아 나도 나만의 현대사를 써보겠다. 


- 개정증보판 서문 중에서

 

인구, 국민소득, 소득분배 등 사회변화를 보여주는 시계열 데이터를 업데이트

3장과 5장의 말미에는 각각 일본의 수출규제 사건(추격자에서 선도자로)과 소수자운동(장애인, 성소수자, 여성)에 대한 내용을 담은 절을 추가했다.

 

-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훌륭한 사람의 당선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악한 인물이 권력을 쥐어도 악을 마음대로 행할 수 없게 한다는 강점 덕분에 문명의 대세가 됐다. 이른바 ‘국정농단’ 이후 한국에서 펼쳐진 상황은 그런 역설을 증명해 보였다. 22쪽

 

- 외국의 식민지였다가 자주권을 되찾은 신생국가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세울 수 있다. 첫째는 역사의 대의명분이다. (···)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75쪽

 

- 박정희

동학 접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빈농 박성빈의 2녀 5남 중 막내로 1917년 11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충성혈서’를 동봉한 지원서를 제출해 일본 괴로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 입학허가를 받았고 1940년 제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수석으로 졸업한 다음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때 박정희 생도는 이름을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꿨는데, 평범한 조선 사람에게 창씨개명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두 번 창씨개명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그는 1944년 만주와 소련 국경 지역의 관동군 635부대에(91쪽) 배속됐다가 곧바로 화북 열하성 만주군 보병 제8단으로 전속되어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싸웠다.

일본의 패전과 만주군 해산으로 소속이 없어지자 박정희는 광복군을 찾아가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이 됐으며, 1946년 5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귀국해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의 단기과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반란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숙군작업에 걸려들었다. 형 박상희의 친구이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박정희 소령은 알고 있는 모든 남로당 인맥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조한 끝에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 혼자만 풀려났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과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이 이승만 대통령의 면죄 승인을 받아 구해 준 덕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괜히 백선엽 장군을 극진하게 예유한 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현역에 복귀했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대구에서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혼인했다. 92쪽

 

- IMF 경제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정부의 환율관리 실패였다. (···) 환율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한 변한다. 장기적으로는 물가인상률이 환율을 좌우한다. 물가인상률이 높은 나라의 화폐가치는 지속적으로 값이 떨어진다.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 좌우된다.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화폐가치는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147쪽)고 수출가격이 떨어지면 수입이 줄고 수출이 늘어나 경상수지가 균형을 되찾는다. IMF 경제위기 직전까지 달러 환율은 계속 하락했다. 물가인상률이 더 높고 경상수지가 적자인데도 우리 돈의 가치가 계속 오른 것은 환율 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과 금융기관의 대규모 해외 차입과 외국자본의 직접투자 때문에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이 늘어나 환율이 떨어진 것이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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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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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집,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아주 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대체로 이렇겠지,라고 예상하는 그만의 문체와 스토리 전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재즈, 클래식, 보사노바, 팝 등의 음악, 사랑은 언제나 어긋나고 사건의 작은 실마리 정도로만 기능한다. 일인칭 단수 '나' 즉 전후세대인 작가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녹아 있는 후일담 형식의 서사, 그리하여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회고하는 형식이 주종이다. 거기에 환상성을 더한 몇 작품들. 추함과 아름다움을 위한 위악적인 요소로서의 외모 언급과 여성 혐오적 시선도 꽤 보이는데, 이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비판받을 만한 부분도 눈에 띈다. 그게 하루키지. 단편을 고려하더라도 각 작품의 분량은 짧다. 묘사보다는 요약적 서사에 집중해 가지를 많이 쳐낸 느낌이다. 



「돌베개에」

 

「크림」

-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 Chalie Parker Plays Bossa Nova

 

「위드 더 비틀스」

- With the Beatles

- 사요코의 오빠와의 만남: 기억이 통째로 일부 날아가는 증상

- 사요코의 자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사육제(Carnaval)」

- 슈만의 ‘사육제’

- 그녀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169쪽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일인칭 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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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7
허먼 멜빌 지음, 김훈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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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허먼 멜빌, 「선원, 빌리버드」 외 6편, 현대문학 세계문학단편선 17, 2015

 

「바틀비」를 다시 읽어보니 또 새롭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 스트리트에서 일어난 당대의 비극을 넘어서는 참신한 의미로 다가온다. 필경사 바틀비는 근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투사도 아니요, 자본주의에 의해 좌절한 잉여 인간이 아니다. 내게는 바틀비는 인간에 의해 발명되어 인간적 필요에 의해 사용되다가 버려진 인공지능 기계처럼 느껴졌다. 소설 속 화자는 끊임없이 바틀비를 옹호하고 해고를 유예하다가 결국 도피해 버리는데, 이는 쓸모를 다한 기계를 방치하고 폐기하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또다른 중편 「베니토 세레노」는 중간에 세세히 묘사하는 선상의 상황이 약간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마지막 반전을 알고 나면 앞부분으로 다시 돌아가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유작 「선원, 빌리버드」에서는 수병 ‘빌리’를 절대적 순수의 존재, 실정법 이전의 자연법에 의해 지배되는 태초의 존재로 그려내고, 마침내 십자가의 못 박히는 예술의 심상으로까지 나아가는 서사가 볼 만하다.

 

전체적으로 문명 비판,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적 관점, 기독교에 대한 비판 의식들은 단편, 중편의 기저에 존재하는 흐름이다.

 

 

「바틀비」

- 나는 그런 자세로 앉아서 그를 부른 뒤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빠르게 말했다. 양이 얼마 되지 않는 서류를 나와 함께 대조하는 작업을 하자고. 한데 바틀비가 자신의 은신처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이상하리만치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얼마나 섬뜩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22쪽

 

- 소문은 이러하다. 바틀비는 워싱턴의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부서의 하급 직원으로 일하다가 운영 방침이 바뀌면서 갑자기 해고당했다. (···) 배달할 수 없는 죽은 편지들dead letter! 그 말은 마치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선천적으로, 그리고 불은으로 무력한 절망 상태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떠오려 볼 때, 끊임없이 그런 죽은 편지들을 취급하고, 그것들을 분류해서 불태우는 일보다도 더 그런 절망감을 부채질할 만한 일이 달리 또 어디 있겠는가? (···)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

 

「베니토 세레노」

- 에머사 댈러노: 배철러스딜라이트호 선장

- 돈 베니토 : 스페인 선장

 

- 델러노 선장은 산도미니크호를 올려다보면서 이제는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상태에서 흑인들을 제대로 봤다. 그들은 무질서하게 행동하고 할 일 없이 소동을 버링고 미친 듯이 돈 베니토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면이 벗겨지고 보니 그들은 손도끼와 칼을 휘두르면서 난폭하게 반란을 일으킨 해적 같은 자들이었다. 델러노 선장은 그 사실을 깨닫고는 바보의 두 손을 결박했다. 여섯 명의 아샨티들은 광란에 빠진 더비시들처럼 갑판 위에서 춤을 췄다. 적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스페인 소년들이 가장 높은 활대들 위로 황급히 기어올라 가고, 동작이 재빠르지 못해서 세 명의 스페인 선원들처럼 바다에 뛰어들지 못한 백인 선원들이 속절없이 갑판 위에서 흑인들과 뒤섞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206쪽

 

「총각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

 

「피뢰침 판매인」

 

「사과나무 탁자 혹은 진기한 유령 출몰 현상」

 

「선원, 빌리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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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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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호프 자런, 랩 걸(Lab Girl)(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알마, 2017


이 책을 이루는 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식물의 생장에 관해 쓴 전문성이 가미된 에세이, 다른 하나는 그의 동료 '빌'과 식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들. 그 둘은 씨실과 날실처럼 번갈아가며 이 책의 서사를 이루는데,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하게 얽힌 이야기가 주는 매력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인종(노르웨이 출신), 성별(여성), 성격(비사교적)을 받아들이고 극복해가면서 오직 자신의 수행하는 연구를 향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글을 보면서, 연구자로서의 직업의식을 넘어 어떤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위태로운 상황에 의해 주어진 시련이 아니라 그를 학문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해가는 추동이다.


내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저자가 아니라 그의 동료 '빌'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나 "모비딕"의 이방인 퀴퀘그처럼 '빌'은 전형적인 인물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 잘린 손가락을 가진 연구자로 그는 오직 연구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처럼 보인다. 저자처럼 정규직 교수도 아니고 정식 연구원도 아니지만 빌은 저자의 연구 수행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마치 빌은 저자의 그림자처럼 빛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캘리포이나, 조지아, 볼티모어, 하와이, 노르웨이까지 그와 함께 한다. 그리고 함께 할 것이다.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학문적 동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자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가족이나 일반적인 친구가 해줄 수 없는 영역을 담당하는 빌 같은 친구가 내게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 메모


- 아버지와 나는 장비들을 꼼꼼히 점검해서 고장난 곳을 고쳤다. 그리고 아버지는 고장 나기 전에 미리 장비를 뜯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어쩔 수 없이 고장이 나면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셨다. 무엇을 고장 나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고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19쪽

- 어릴 적에 나는 온 세상이 모두 우리처럼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주로 이사를 해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갈구했던 따뜻함과 애정을 마루렇지도 않게 쉽게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모르는 탓에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24쪽

- 이 가루가 오팔(opal)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나만의 독특하고 별난 유전자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일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해 내가 알게 된 그 작은 진실 덕분에, 그리고 내가 보고 이해한 그 진실 덕분에 실존적으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팽나무의 씨를 강(105쪽)화하는 광물질이 바로 오팔이라는 확실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는 오늘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나는 서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싸구려 장난감이라도 새것일 때는 빛나 보이듯, 내 첫 과학적 발견도 그렇게 반짝였다. 106쪽

- 그해 여름 전제를 콜로라도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었지만 나는 과학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실험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이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해 가을에 나는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여름이 가져온 재난의 잔해에서 새롭게 더 나은 목표를 만들어냈다. 식물을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식물들을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연구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무들이 왜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논리를 당연한 듯 적용하는 것보다 연구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12쪽

- 나는 빌의 바로 앞에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봤다. 빌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빌이라는 인간, 그리고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바로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그를 바라봤다.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를 받아들이며 느껴진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힘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그 부분은 언젠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오늘은 이미 할 일이 있었다. 오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눈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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