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홍세화, 결: 거침에 대하여(홍세화 사회비평에세이), 한겨레출판, 2020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처럼 나에서 출발해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사회(국가)로 나아가는 방식의 전개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성(생각)에 앞서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 corpus). 라틴어로 “당신은 몸을 소유한다”는 인신보호령(1679년, 영국)'을 가장 중요한 권리로 제시하고, '생각하다'와 '생각하지 않은 생각'을 구분해 인간은 이미 완성 단계의 존재가 아닌 부족하고 보충되어야 할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강조점이다.


다음으로 '20:80'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양분화 된 한국 사회에서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개선하고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해법으로 사회적 연대, 공감과 연민, 위와 앞이 아닌 옆과 뒤에 있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머릿속에 든 생각만으로 사회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명확한 인식이 중요하다. 특히 상징폭력과 자발적 복종 등 사회학적 개념을 빌려 와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관한 논란을 고찰한 부분은 내가 지금까지 가진 일방적인 피해자 프레임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부분에 동의할 수 없지만 프랑스 대입시험 바칼로레아처럼 나에게 몇 가지 무거운 숙제를 안긴 책이다.




-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생각하지 않은 생각’으로 충반하고 그것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것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태다. 85쪽


-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지배자들에게 복종하도록 이끄는 지배기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개념화) 134쪽


- 정확히 자각하지 못한 채 은밀한 방식으로 복종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과 흡사하지만,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의 의식과 욕망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135쪽


- 우선 계급배반의 문제가 심각하다. 중산층보다 서민층이나 빈곤층이 더 배반한다. 처지(존재)는 ‘80’에 속하지만 ‘20’편을 열심히 들어준다. 또 ‘80’에 속하는 사람들의 분열이 작용한다. 영남패권주의가 작동하고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열되어 있다. 여혐/남혐으로도 분열되어 있다. 또 ‘20’의 적극성에 비하여 ‘80’의 소극성도 문제다. ‘20’은 이미 좋은 자신의 처지를 더 좋게 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치지만, ‘80’은 정치에 소극적이거나 탈정치화되어 무관심하다. 또 ‘80’은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미래의 기대치로 오늘의 나를 배반한다. 지금은 ‘80’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20’에 속하게 되리라는 욕망을 갖고 있어서 미리부터 ‘20’편을 드는 것이다. 15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영재 시집,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 2020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시편보다는 그의 등단작(2014년 세계일보신춘문예 '주방장은 쓴다')3부(상대성)에 실린 시들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개인적인 취향이다. 특히 3부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단어)가 나를 멈추게 했다.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일, 자연스러움'. 인위적인 개입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작동된다는 문언적 의미다. 그런데 찜찜하다. 자연스러움이 내겐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은 역사적 기록처럼 대개 승자와 강자 같은 기득권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한 번의 실수가 실패로 한 번의 실패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 당신은 가진 게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든든한 배경은커녕 풍경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으므로 당신이 당신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라는 말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라면 과연 그 사회는 자연스러운가?



나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돌부리에 걸리고 신발 밑창에 진흙이 달라붙고 어깨가 축축하게 젖는 궂은 날씨의 부자연스러움을 그 끈덕진 다짐을 포기할 수 없다.





- 흰검정 11쪽


검정에 고인 열에 손을 대본다/ 평소에는 꽃들이 웃자라 있고 언덕이 높아지거나 모난 바위가 자연스럽다/ 개미들이 평소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두었다/ 평소였던 자리에서 불에 덴 것 같은 샤먼과 볼을 맞댄다/ 적절한 소문이 무성해서/ 불편한 나비들이 몰려와 아름다워졌다/ 나는 계단 깎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땅의 깊은 온기,/ 흰검정



- 생각되되 생각될 것


공이 던져지고// 나는 관객 된 도리로, 연기되는 나를 잘 지켜보는 편이다 지루함을 견디는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독백하며 저쪽의 내가/ 떨어지는 공을 받는다// 놀라운가, 아니다/ 박수가 터지기 전에 다음 독백을 시작할 것이다 던져진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공을 던지기로 약속되었다// 생각이 가해지는 공과/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생각이 가해지는 공 사이에// 나는/ 온갖 예상되는 나를 해할 수 있지 죽되, 죽지 않는 선에서 칼을 쥐는 법을 알고 있으니 칼은 휘두르는 게 아니라 밀어 넣는 것이지 비틀며, 약속된 곳으로 반복 없이도 또다시 나(69쪽)로서 생각될 수 있다면 그렇지, 비틀며// (···)// 괜찮다 기대된 박수를 참는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 저 시체가 왜 나인지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공은 공으로 충분해진다 현재의 공은 아무런 힘도 가해지지 않은 생각에/ 멈춰 있다(가능하냐고? 내가 연민마저 참으며 모두라고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므로)// 생각되되/ 생각될 것이다 우연 없이도 던져진 공은 떨어지는 공으로 약속되었으므로, 건너의 내가 건너의 내 역할을 독백할 필요조차 없으니/ 어떤 자학도 기만하지 말 것// 보라, 던져질 공은 이제 내 손 위에 있다




제3부 상대성


- 검은 돌의 촉감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이 돌은 당위성을 따져볼 것도 없이 이 위치입니다 나의 선택도 돌의 선택도 아닙니다 돌은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갔을 뿐입니다 패배가 자연스레 이 위치에 놓여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스레라니,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압니다 실패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현명한 의자에 앉아 패배보다 실패를 실패보다 실수를 실수보다 검은 돌을 검은 돌보다 흰 돌을 흰 돌보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오래 연민합니다//(···)// 실수를 유발하지 않았습니다 돌은 그저 만져지길 원할 뿐입니다 나와 다르게 나와 같습니다// 돌은 변명합니다 죽고 싶어서일 겁니다/ 돌은 변명합니다 살고 싶어서일 겁니다// (···)// 나조차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만져질 수 없고 돌조차 만져질 수 없습니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자꾸 만져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반복하겠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 청사진 104-106쪽


건물을 올리며 네명이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은 보편적 각도와 높이의 계단을 구축하고 밟으며/ 차근차근/ 벽돌을 소모한다 삽과 젓가락을 소모한다 함바집 할머니를 소모하고 간이화장실과 병실 침대를, 시간을, 짱돌을 무더기로 소모하고// (···)//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을 올리며 세명이 더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는/ 일곱이면 선방이라고 생각했다 7은 모나미 볼펜을 한번(104쪽)도 안 떼고 그릴 수 있는 형태다// 청사진처럼/ 벽돌일 짊어진 젊은이는 아직/ 젊다/ (···)// 회복의 반대편으로, 계단이 될 허공을 오르는 저 젊은이는 차근차근/ 젊어서,/ 젊음이 소모되지 않아서 오랜 교육으로 축조된 희망과 기대가 아직 소모되지 않아서// 견고한,/ 저 크레인은 휘어지지 않아야 한다 새롭게 태어난 연골이 피동적으로 단단해진다 저 크레인은 휘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행복하다면 누군가 불행해야 해서/ 일곱을 인유한 젊은이가 7의 균형을 휘청, // 건물은 위보다 위를 오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 먼 밭 111쪽


마을에서 멀리까지 나가야 밭이 있다 돌과 나무뿌리가 뒤엉킨 밭이 있다 돌과 나무뿌리는 자라지 않는데 자라지 않는 걸 키우기 위해 나는 멀리를 걸어왔다 (···) 밭에서 멀리까지 걸어야만 집이 있다 오래 기른 돌을 가져와 커다란 불 위에서 뜨겁게 굽는다 뜨거움을 보다가 그들에게 뜨거움을 보러 오라고 붉어지지 않고도 뜨거운 나의 돌을 보러 오라고, 휘적휘적 걸어와 불에 들어가지 않는 그들과 함께 웃는다 나도 불에 들어가지 않는다 불이 불에 들어갔다가 불에서 나왔다가, 내일은 더 먼 밭에 다녀와도 되겠느냐고 그들에게 조용히 묻는다 나는 괜찮은데 그들이 나를 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소설
함정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함정임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 문학동네, 2020


이 소설을 읽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소녀와 어머니.



'순정의 영역'에서 계단에 앉아 있는 아이, '해운대'에서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으로 건너온 '호아'

는 이곳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다. 어느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고 말을 걸어주지 않는 존재들,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호아'처럼 스스로 내 이름은 호아, 라고 말하는 정도. 이들은 비단 화자나 독자들의 바깥에 있는 인물들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곧 우리들의 어린 시절 혹은 내가 누구보다

비참하다고 생각되어졌던 그 시절의 나를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소설이 고마웠다.



그리고 엄마.

'스페인 여행'은 엄마의 부음 때문에 결국 스페인으로 가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그의 애도가 특별한 것은 엄마의 부음 이전부터 이미 애도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의 애도가 부음을 예감하는 애도라면, 내가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애도는 살아 있는 자의 애도다.



2011년 췌장암 3기 발병으로 엄마의 부음이 코앞까지 닥쳤을 때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다행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지 않은 상태라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항암과 방사선 치료까지 경과가 좋아 지금까지 지방에서 잘 관리하고 계신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고, 안부전화나 영상통화를 제외하면 일 년에 몇 번 뵙지 못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나에게 엄마는 이미 돌아가신 존재다.



돌아가신 분의 안부를 묻고 생신을 축하하고 손을 잡아드리고 어깨를 안마해드리는 것

이처럼 사소한, 살아있는 엄마에 대한 애도. 나는 지금도 애도 중이므로 '스페인 여행'의 '나'처럼

부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을 수 있을까. 엄마의 죽음에 대한 대비는 연습과 준비로 가능한 것인가.



함정임 소설가의 등단 삼십 주년을 축하드린다.



* 순정의 영역



- 계단과 아이

그의 조부모 집에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계단 꿈을 꾸기 시작했다. 50쪽 (···) 꿈은 한동안 비슷한 장면들로 계속되었다. 그녀의 분당 옛집의 계단인지, 그의 조부모 집 계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계단에는 언제나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51쪽


-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영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같은 꿈이 거듭될수록 아이의 형상이나 장면이 생생해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스미듯 사라졌다. 그녀는 침대 맡으로 손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쥐었다. 자취가 묘연해지기 전에 메모 창에 썼다.


계단이 비어 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거기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벽의 넓이가 달라진다. 아이는 감나무에 기대어 서있거나, 계단 맨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가 거기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주위의 온도가 달라진다. 가로등은 저물기만큼 어둠을 잠식하고, 아이는 어둠과 빛의 경계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51쪽)다. 계단은 빛의 테두리가 끝나는 시점에서 시작되고 나는 아이를 지나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52쪽


* 용인



- “쿵, 하고 봉분이 내려앉을 때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거요, 순전히.” 봉분이 내려앉는다, 쿵! K는 귀를 의심했다. 78쪽

- “십오 년쯤 되면, 관짝이 풀썩 주저앉고 그 바람에 봉분이 쑥 꺼져 버린다오. 그래서 온 거 아니유?” 79쪽


- 네 살짜리 꼬마는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잠든 너를 위에서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84쪽) 있음을. 귓불을 스치며 속삭이고 있음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임을. 너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시선이라든지 신기루라든지 속삭임이라는 표현을,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느끼는 대로 잡거나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을 알지 못했다. 85쪽


- 기억의 내용들이 많아질수록 K는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묻어두었거나 몰랐던 사실들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지 기억 행위에 그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복원하거나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 K는 가장 먼 기억, 그러니까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지점을 생각했다. 그것은 잠든 사이 기분좋게 어루만져주던 달빛의 어른거림, 또는 K가 모르는 세상 하나가,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내 것인 듯 내 것(86쪽) 아닌, 기억이 배제된 시절의 행복, 또는 불행. 87쪽


* 스페인 여행


- 문제는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난 몇 년간 매일 엄마의 부음을 생각했다. 최초로 엄마의 부음을 생각해야 했을 때, 눈물의 둑이 터진 듯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날 이후, 엄마의 부음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일상이 되었다. 엄마의 부음을 생각하며 엄마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뺨에 입을 맞추고, 편안히 잠드시라 귀에 노래를 속삭여주었다. 몇 번은 진짜 부음을 준비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까지 갔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엄마의 부음이 내 가슴을 지나갔고, 나는 어느 경우에도 눈물 따위 흘리지 않게 되었다. 109쪽


- 그리고 일 년이 자났다.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내가 없는 그곳에는 오동나무 꽃이 피고, 또 졌을 것이다. 스페인 여행은 예정에 없었다. 110쪽


* 해운대


- G: 죽은 형을 위해 페루 방문, 3년 거주, 사진사, 카페 루카 운영

- 소녀(나): 호아, 베트남 할머니, 한국인 할아버지, 호아가 베트남계??


- 해수욕장의 분위기와 실루엣을 전하는 비슷비슷한 장면들을 훑어보다가 G는 메모지 아래에 있는 사진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진에는 한 남자가 한 소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해변을 달리는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 자전거의 속도에 실려 움직이는 피시체로 인하여 흐릿하게 흔들린 블러 상태였지만, G는 남자의 허리를 꽉 잡은 채 뺨을 그의 등에 대고 눈을 살포시 감고 있는 소녀를 알아보았다. 141쪽

* 영도



- 바닷가 절벽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서 실루엣만으로 보아 여인은 흡사 인어 소녀 같았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인은 해질녘이면 그 자리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도 바다도 어둠으로 수평선이 분간이 안 될 때까지 앉아 있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새벽이 오고, 수평선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는데, 여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배였다. 그 배는 차라리 안 오느니만 못했다. 재인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조아나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산책로 끝자락 바위 위에 조아나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아나가 바라보고 있는 수평선에는 하나 아닌 여러 척의 배들이 떠 있었다. 재인은 섬에 조아나를 두고 다리를 건넜다. 때로 엉뚱한 곳에 뜻밖의 삶이 깃들기도 했다. 어쩌다 사람을, 아니 사랑을 사랑하는 것처럼. 21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어령, 한국인 이야기(탄생·너 어디에서 왔니), 파람북, 2020


네 살배기 딸이랑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자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재밌는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 놀라는 이야기 뭘로 해 줄까? 대답은 늘 무서운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동화나 짧은 콩트를 딸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고 압축된 일상어로 바꾸어 들려준다. 이내 밑천은 바닥나고.


아빠랑 엄마랑 지윤이랑 한 집에서 살고 있었어. 아빠랑 엄마가 많이 아~야~ 하고, 배도 고팠어. 그래서 지윤이가 산에 빵이랑 과자를 찾으러 갔어. 캄캄한 굴 앞에 도착했는데 굴 속에는 초콜릿이랑 사랑이랑 빵이랑 과자랑 잔뜩 쌓여 있었어. 그런데 굴 안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어. 지윤이가 들어갔을 때 호랑이가 있을지도 몰라. 지윤이는 아빠랑 엄마를 위해서 무서운 호랑이가 사는 동굴에 들어가서 빵이랑 과자랑 가져올 거야?


딸의 눈빛이 흔들린다. 고민하는 눈빛. 그리고는 고개를 흔든다.

호랑이 무서워~


아이들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왜 조를까.

무서워하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러니.


이어령 선생의 “한국인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니 뱃속에서부터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타 문화권에는 없는 ‘태명’을 호명하는 것을 듣고,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꼬부랑 꼬부랑 지팡이를 짚으며 고개를 넘어가는’ 한국인 고유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책의 형식도 특이하다. 챕터의 하위를 구성하는 문단마다 아라비아 숫자가 매겨져 있고 어떤 문장에는 클릭문양의 하이퍼텍스트가 있어 미로를 찾아가듯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책의 구성과 상관없이 앞에서부터 쭉 읽어나가도 무리 없다.


- 혈연관계냐 사회관계냐의 한중일 성명 시스템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여자가 출가할 경우다. 이름은 없어도 성은 분명히 챙겨 결혼해서 출가외인이 되어도 성은 그대로다. 그러나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는 결혼할 경우 남편 성을 따른다. 일본 사람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는데, 누구의 딸인줄 어떻게 알지요?” 36쪽에서 고선윤, 《토끼가 새라고?》, 안목, 2016 재인용


- 그중에서 내 눈을 끌고 가슴을 친 이야기가 ‘까꿍이’라는 태명이다. “절박유산으로 아기를 보냈는데, 큰애가 배에다가 “까꿍 까꿍∼”했어요. 동생은 이제 좋은 곳으로 갔다고 설명해주니 “아냐, 있어. 까꿍 까꿍∼”해주더라고요. 근데 얼마 안 있어 자궁 상태를 보러 갔더니 진짜 새 생명이 이쁘게 집을 지어놨더라고요.” 48쪽


- 사람들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보면, ‘흙에서 흙으로’다. 사회복지적으로 보면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며 자연생물학적으로 살피면 ‘자궁에서 무덤까지’다. 그리고 우리의 탄생 이야기를 쓰는 나의 입장에서 문화 문명적으로 보면 사람의 일생은 ‘천에서 천으로’다. 새 생명이 ‘그 세상’의 자궁에서 산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온 뒤에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바로 베틀로 짠 ‘천’이다.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입는 수의 역시 ‘천’이다. (···) 태어나면서 배내옷을 입거나 혹은 강보로 감싸거나 또는 스와들링을 하고, 죽어서는 ‘수의’를 입는 인간의 일생이야말로 ‘기저귀에서 수의까지’ 즉, ‘천에서 천으로’다. 198쪽



목차)


이야기 속으로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1. 태명 고개 - 생명의 문을 여는 암호

쑥쑥이 말문을 열다/ 태명 또 하나의 한류/ 이름으로 영혼을 춤추게 하라/ 이야기로 시작하는 생명

2. 배내 고개 -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나는 한 살 때에 났다/ 어머니의 바다 이야기/ 화이트 하트, 초음파의 발견/ 태동, 발의 반란

3. 출산 고개 - 이 황홀한 고통

어머니와 미역국/ 산고의 의미, 호모 파티엔스/ 왜 귀빠진 날인가?/ 나를 지켜준 시간의 네 기둥

4. 삼신 고개 - 생명의 손도장을 찍은 여신

삼신할미의 은가위/ 지워진 초원, 몽고반점/ 삼가르고 배꼽 떼기/‘맘마’와 ‘지지’와 젖떼기/ ‘쉬쉬’‘응가’와 기저귀 떼기

5. 기저귀 고개 - 하나의 천이 만들어낸 두 문명

기저귀를 모르는 한국인/ 냉전의 깃발, 서양 기저귀/ 기저귀 없는 세상

6. 어부바 고개 - 업고 업히는 세상 이야기

스와들과 배내옷/ 포대기는 한류다/ 어깨너머로 본 세상

7. 옹알이 고개 - 배냇말을 하는 우주인

환한 밥 깜깜한 밥/ 공당과 아리랑/ 너희들이 물불을 아느냐

8. 돌잡이 고개 - 돌잡이는 꿈잡이

보행기에 갇힌 아이/ 네 손으로 운명을 잡아라/ 달라지는 돌상 삼국지

9. 세 살 고개 - 공자님의 삼 년 이야기

숫자 셋의 마법/ 우리 아기 몇 살/ 세 살마을로 가는 길

10. 나들이 고개 - 집을 나가야 크는 아이

자장가의 끝, 일어나거라/ 외갓집으로 가는 길/ 달래마늘의 향기

11. 호미 고개 - 호미냐 도끼냐 어디로 가나

빼앗긴 들에도/ 격물치지의 호미/ 호미보다 도끼/ 아버지 없는 사회

12. 이야기 고개 -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옛날 옛적 갓날 갓적에/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길 찾기/ 직선과 곡선/ 이야기의 힘

이야기 밖으로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 로쟈의 문학 읽기 2012-2020
이현우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현우, 책에 빠져 죽지 않기(로쟈의 책읽기 2012-2018), 교유서가, 2018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책을 사랑한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왼쪽 어깨에 바이올린을 올려놓고 계단을 올라가듯 머릿속의 각인된 악보를 짚어가듯, 책의 문을 두드리고, 활자로 가득찬 아무도 없는 집을 방문하는 일, 그러므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



책과 독서를 추종하거나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강가에서 주워온 작은 조약돌을 생각의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보는 일, 보드랍게 나의 체온을 내가 느끼게 해주는 그 촉감. 나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약한 '디지로그'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다.


유명 '서평꾼' 로쟈의 책은 '비독서'를 위해서 선택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서평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책을 안 읽어도 그 책의 메시지를 알게 하거나, 책을 읽은 척 하게 하거나, 그 책을 읽지 않도록 판단하게끔 하는 것. 이 서평집을 읽으면서 독서의 편식으로 인해 소흘했던 고전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여러 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성일의 "한 권의 책"과 "책으로 만난 사상가들"을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2012-2108년 기간의 여러 매체에 실은 비문학의 서평을 분야별로 담았는데,2016-2018년의 비교적 신간에 대한 서평은 드물고 주로 2010년대 초반의 책들이 많다. 최근에 출간된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와 짝을 이룬다.



로쟈의 서평집은 독자들에게는 험난한 책의 바다에서 독서의 방향을 잡아주는 종이로 만든 덫이다.




-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일종의 광기이고 도박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 본격적으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울 첼란의 시구를 제목으로 가져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책과 혁명’이라고 했지만 둘은 접속과 ‘과’ 보다는 ‘또는’을 통해 만난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에 관한 책’이나 ‘책’을 통한 혁명이 아니라 ‘혁명으로서의 책’ 또는 ‘책이 된 혁명’이기 때문이다. 33쪽 (···) 특히 그가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루터의 종교개혁, 무함마드의 혁명, 12세기 해석자 혁명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그는 “과거의 혁명이 아무리 피로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나 주권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3쪽


- 서평은 어떤 책을 한번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자료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즉 비평이 재독의 권유라면 서평은 일독의 제안이다. 90쪽

- 서평의 기능은 이런 필요에 의해 도출된다. 어떤 책을 읽고 싶게 하거나, 읽은 척하게 하거나, 안 읽어도 되게 해주는 것이다. 91쪽

- 읽은 척하게 해주는 용도라면 몇 가지 요건은 생각해볼 수 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서평자가 책을 제대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서평의 몫은 그것을 다른 독자에게 요렁껏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책이 어떤 주제의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다루고 있으며, 주요한 메시지는 무엇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갖는 의의는 또 무엇인가를 짚어주어야 한다. 92쪽


- 올바름이란 무엇인가(국가·정체(政體),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5)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펼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올바람에 대한 정의다. (···) 특이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취한 절차다. 올바름에는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 두 가지가 있을 터인데, (···)

그런데도 먼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따라가면 그는 국가를 구성 (177쪽)하는 세 계층이 각자의 역할과 직분에 충실할 때 국가가 올바른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생산자와 전사, 통치지가 그 세 계층이며 절제와 용기, 지혜가 그들이 가져야 할 각각의 미덕이다. (···) 국가의 올바름이 그렇게 가능하다면 개인의 경우는 어떤가.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혼 또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욕구와 격정, 이성이 그 세 부분이며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대응한다. (···) 결국 올바름은 훌륭한 상태로서 혼의 건강을 뜻하며 올바르지 못함은 나쁜 상태로서 혼의 질병을 가리킨다. 178쪽


- 철인통치론이 남녀평등론이나 처자공유론보다도 더 파격적인 주장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180쪽


- 신들은 어떻게 죽었나(‘니체와 철학’, 질 들뢰즈 지음, 민음사, 2012)

이 복수주의가 들뢰즈가 강조하는 니체 철학의 본질이다. 더 나아가 그는 복수주의가 철학의 고유한 사유방식이자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위대한 사건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복수적 의미를 믿었다. 모든 사건과 현상, 말과 사유는 다수의 의미를 갖는다. 185쪽


- 바우만에게서 배우는 희망(‘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궁리, 2014)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라고 해보자. (···) 그렇지만 바우만은 그런 상상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은 누가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궁색하다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 때문이라고 바우만은 말한다. 그의 예리한 통찰에 따르면 권력이란 ‘뭔가를 행하는 능력’이고, 정치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흔히 이 둘은 결합되어 있었지만 세계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따로 분리되었다. 권력은 초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공간으로 확산된 반면에 정치는 지역적 경(205쪽)계 안에 머물게 되면서부터다. 206쪽


- 정치적 진보주의와 지능의 역설(지능의 사생활, 가나자와 사토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2)

“지능이 높은 개인들은 진화가 우리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선호와 가치관을 갖고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 349쪽

지능의 역설에 따르면 이런 경우 지능이 높은 개인과 집단이 반대 경우보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욕구와 수용력이 더 크다. 달리 말하면 인구의 평균 지능이 높을수록 그 정부는 더 민주적이다.

정치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도 지능의 역설은 적용된다. “유전자적으로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들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으로 진보주의를 정의한다면 이것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 351쪽


- 국민 통합은 어떻게 가능한가(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마스 프랭크 지음, 갈라파고스, 2012)



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는가? 프랭크에 따르면 그들의 정치적 판단 기준이 경제가 아니라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보다도 보수적 가치가 더 우선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그 결과 선거는 ‘계급전쟁’이 아닌 ‘문화전쟁’의 장이 된다. 378쪽


-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맞서는 국가와 개인의 연대(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지음, 동아시아, 2017)



“가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이 가족주의는 가족 안팎에서 폭력을 생산한다. 저자의 구분법은 아니지만 ‘안에서의 폭력’과 ‘바깥으로의 폭력’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가족 안에서 가족주의는 자식을 소유물로 보게끔 한다. 그 결과 체벌과 폭력을 ‘사랑의 매’로 미화한다. (···)

다른 한편으로 가족주의는 가족 바깥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이른바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나누고 가부장적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비정상’과 ‘부도덕’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한국 가족주의의 양태다. 465쪽


저자는 스웨덴 모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부모의 체벌 금지와 아동 수당 지급, 아동 인권에 대한 강조를 통해 아이들도 부모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부모 자산에 대한 조사가 없는 학생 대출을 통해 청년들이 가족에서 독립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다. 부부의 개인별 분리과세, 보편화된 공공보육 시스템으로 여성의 배우자에 대한 의존과 종속의 여지를 없앴다.” 469쪽


- 새로운 사랑,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망(폴리아모리, 후카미 기쿠에 지음, 해피북미디어, 2018)


폴리아모리란 무엇인가. ‘자신의 교제를 공개하고 합의한 후에 만들어가는 복수의 사랑’이다. 요점은 공개와 합의다. 모노가미에서라면 “당신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라는 고백은 관계의 파국으로 이어지지만 폴리아모리에서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된다. 폴리아모리는 단지 섹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유대를 강조하기에 스와핑과 구별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특정 사람들과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471쪽


- 무성애를 말하다(무성애를 말하다, 앤서니 보게트 지음, 레디셋고, 2013)


먼저 무성애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이나 여성, 혹은 양성 모두에 대해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무성애다. 478쪽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니 모호하다. 무성애라고 해서 로맨스가 결여된 것은 아니며 성적 매력과 로맨틱한 매력은 다르다고 하기 때문이다. 섹스와 로맨스는 서로 관계가 있지만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신체적 흥분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성 경험 자체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무성애자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없다. 무성애를 결정하는 것은 성행위의 결핍이 아니라 욕망의 결핍이다. 479쪽


무성애자는 대략 70퍼센트가 여성이라고 한다.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여성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낮아서 자위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타인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빈도도 낮다. 479쪽 또 성애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하기 때문에 남성보다 사회적·문화적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발기는 명확한 반면에 질의 반응은 미묘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남성이 성애에 목표 지향적인 데 비해, 여성의 욕망은 좀더 모호한 것도 관계가 있다. 480쪽


-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즈 지즈코 지음, 은행나무, 2012)


우에노 지즈코의 정리를 따라가보면 세지윅은 먼저 ‘호모섹슈얼’과 ‘호모소셜’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한다. 호모섹슈얼이 남성 간 성애를 뜻한다면 호모소셜은 성적이지 않은 남성 간 유대를 가리킨다.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호모소셜에는 호모섹슈얼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기에 호모소셜리티(동성 간 유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모섹슈얼리티(동성애)를 엄격하게 배제할 필요가 생긴다. 즉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는 호모소셜리티의 필수적 구성요소다. 그리고 이런 남자들끼리의 연대로서 호모소셜리티(동성 사회성)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

남자들끼리의 연대가 성립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지속적으로 배제하고 차별화해야 한다. 이것이 여성 혐오의 작동 원리다. 세지윅에 따르면 남성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성적 주체가 된다. 491쪽


- 모든 책은 여행서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책세상, 2005)


“세계는 책이고 여행은 독서이며 모든 책은 여행서다.” 그러니 애초에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아니라 ‘앉아서 여행하는 사람’이고, ‘여행 가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다니며 책을 읽는 사람’이다. 594쪽


- 중년 이후의 삶(남자 나이 45세, 우에다 오사무 지음, 더난출판사, 2012)


저자는 46세에 법학전문대학원에 다시 입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딴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공부에서도 목표를 명확히 하고 최단 경로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독서의 경우에도 다양한 독서 대신에 그가 권장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기 위한 독서다. 목적의식을 갖고 책을 선택하되, 한 권을 읽고 나면 첫 번째 책과 다른 관점에서 쓰인 책을 읽어서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618쪽


- 프로이트의 원인론 vs 아들러의 목적론(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인플루엔셜, 2014)


프로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현재의 나를 지배한다고 보는 ‘원인론’의 입장이라면, 아들러는 정반대로 개인은 각자가 설정한 목적에 따른다는 ‘목적론’을 주창했다. 663쪽 또한 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663쪽 고 주장하며 타인과의 인정 투쟁에서 탈피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과제분리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 그런 분리를 통해서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대인관계에 대한 아들러의 처방이다. 66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