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신문‬

뜨겁고 고요한 아침
정확한 시각에 배달되는 신음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와 비명소리를 함께 내는 자명종

노려보고 흘기다가 악수하며 웃는 글자들
자음이 없어 받침이 없는 세상에서 둥둥 떠도는
아야 아야 소리만 들리는 박스형 기사
공기주머니를 찬 핏덩이 같은 크렌베리가 떠오르는 사진

나는 오늘도 흐물흐물한 비명을 밟으며 걷는다
닮아빠진 구두로 지하세계의 침묵과 사라진 시간과 
죽음의 악취의 밟는다

사냥꾼이 쫒아오고 있다
숨이 가쁘다

어둡고 닫힌 미로를 몇 바퀴 돌면 멀미가 난다
손을 따고 등을 쓸고 두드리고 토하고 손가락을 집어넣어도
멈추지 않는다 
청각과 시각의 불균형은 눈을 감아야 멈춘다
평형을 생각한다

나는 아큐도 
치숙을 둔 조카도 아니다
나는 본 것만 쓴다
본 것과 생각하는 것은 같다 
나는 생각하는 것만 쓴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떠도 감아도 똑같은 색깔인 벽을 더듬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스미고 베인 검은 물이 벽을 타고 흐른다
물 위에 떠다니는 뼈들은 빙산에 부딪혀
점점 가라앉는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

물방울은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했다
나는 어두운 독방에서 하루 종일 지난 몇 년간 내가 무슨 일을 했고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부족한 자극을 보충한다
현재를 즐기면 된다는 말은 전혀 자극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빛을 볼 수 있다는 말은 자극이 아닌 혐오다

나의 뇌는 바다에 떠 있다
나는 신문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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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닭장에 갇힌 닭들이 멀뚱멀뚱 밖을 응시하고 있다
먹고 싸고 자고 살이 찐다 살이 찌면 닭장 밖으로 나온다
밖에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장으로 간다
닭은 꼬끼오, 울지 않더라
닭은 살을 찌우라고 하도 닦달을 당해 그런지 '닥닥닥' 울더라
일 년에 수천 개씩 닭 튀기는 집이 생기고 열에 아홉은 망한다
튀겨진 닭은 닭장보다 더 좁은 종이 상자에 담겨
종이 상자보다 헐거운 닭장으로 배달된다
치킨은 더 이상 만만한 음식이 아니다
큰 마음을 먹고 만 오천원이 넘는 돈을 들여야 한다
튀겨진 닭이 왜 이렇게 작냐고 투덜거리면서
영계를 찾는 모순
영계는 이미 다 튀겨졌으니까 드물지
열 두명 중 열 번 째 아이, 날개가 있어도 오래 날 수 없는 짐승
모가지를 잡혀 방향감각을 잃어도 계속 뒤뚱뒤뚱 걸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치킨 집에 네 명이 들어오더니 주인에게 네 명이라 닭다리 두 개만 더 추가요청
주인은 닭이 다리가 두 개인데 어떻게 네 개가 되냐
개 같은 인생보다 더 한 것이 닭 같은 인생
닭은 한 번도 안방을 구경한 적이 없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지만 닭똥은 눈물에만 쓰인다
개보다 못한 인생, 개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존재
나는 닭의 해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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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사티
‪#‎에릭사티‬

길에서 추남과 미녀가 팔짱을 끼고 걸어온다
미녀는 추남을 지긋이 바라보고 추남은 신경쓰지 않는 척
미녀의 눈은 다르다 미녀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외국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가 손을 잡고 간다
외국인 여자와 한국인 남자가 손을 잡고 간다
외국인 여자는 다른 눈을 가졌다
'조르주 상드'는 '에릭 사티'를 정말 사랑했을까
왜 그렇게 허겁지겁 도망치듯 떠났을까
'에릭 사티'는 그녀가 떠난 뒤 평셩 독신으로 산다
그녀를 끝끝내 정리하지 못했는데
그녀와의 짧지만 강렬했던 과거 때문이었나 아니면
다시는 그녀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불안때문이었나
그는 무엇을 소유하고 싶었을까
무소유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유할 수 있었음에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는데 그는 무엇을 소유했을까 가지지 못함을 가졌나
문득
추남과 미녀의 만남은 선남선녀의 만남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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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마을

#고추장마을






매운 사람 맛을 보러 간 고추장 마을에 사람이 없다

거뭇한 장독대만 차렷자세로 어깨를 붙이고 삼열횡대로 웅크리고 

지나가는 한 두 사람을 쳐다본다

나는 수 년 채 무거운 지붕을 이고 햇볕을 보지 못한 고추장에게 

몇 살인지 물어본다 분명 외치는 것 같은데 울려서 알아들을 수

없다 

널찍한 도로와 서로 원조라고 우기는 간판들

고추장 마을에는 고추장이 없다

고추장은 건너마을 고추장 박물관으로 수 년 전 이사를 갔다

오랜 세월 부대끼며 살다가 생이별을 한 장독과 장이 흘리던

눈물을 풀어 국을 끓이고

산나물에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벼 먹으니 눈물을 쏙 뺀다

슬퍼서가 아니라 더워서 나는 열이 많다 눈물은 많지만

고추장은 장독을 떠나 치약같은 독방에 살다가 이민을 간다

여행객들은 여행지의 설렘을 상상하며 웃지만 고추장은 

우리말과 우리향을 잊지도 잃지도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주먹을 쥐고 장독보다 정없는 여행가방에 이중감옥살이를 한다

고추장 마을에는 고추장이 없다

내가 가면 밥 비벼 주시던 할머니의 손길도 새끼손가락을 장에 찍어

맛 보라던 훈훈한 인심도 없다

티브이 광고에 간간이 나오는 "고추장 마을로 오세요"라는 말은

오래전 보았던 기록영화같다 "잃어버린 잊어버린 고추장을 찾아주세요"라고 외치는 이산가족 같다

지금 못 오는 줄 알면서 "내가 죽어야 오겠제"라며 고개를 장독에 묻는 침묵의 외침같다

고추장은 독 속에서 독을 품고 독을 뿜고 독이 된다

독은 밥이 되고 독은 살이 되어 한 살 두 살 나이가 든다

독은 고독하게 끊임없이 땀을 낸다 땀은 증발하고 흡수되어

독이 된다

고추장은 땀이고 독이고 눈물이고 침이고 샘이다

고추장 마을에는 고추장이 정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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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도장 #인영



십년 째 쓰는 필통 속 도장 두 개
나와 엄마를 쏙 빼닮은 막도장 두개
엄마가 열 달 배불러 낳은 쌍둥이
나는 쌍둥이를 업고 집을 나선다



나는 매일 직사각형 도장을 판다





전봇대 옆에서 아침잠을 자는 통근버스에 출근도장
끌어안은 연인의 살구색 입술도장
시원섭섭하다며 돌아서는 이혼도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오선지에 퇴근도장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마에 얼굴도장





나는 매일 유언장을 쓰고 이름을 각인(刻印)한다
이름 옆에 누운 인영(印影)은 낯을 가린다
잠든 인영의 얼굴에 가만히 입을 맟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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