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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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 지음·김흥식 옮김, 징비록, 서해문집, 2003





430여 년 전의 국제정세를 오늘날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낯설지 않다. 자주 국방력을 없는 조선은 종주국 '명'에 도움의 손길을 구했고, 명은 명분상 이를 거절할 수 없어 참전했으나 언제든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불어 조선이 일본과 모의하여 자신들에게 등을 돌릴까 의심했다.



360여 년이 지나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났을 떄 역시 남한은 미국에 도움을 받았고, 미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에 상륙했다. 한반도 남쪽까지 물러났다가 서울을 수복하고 적을 추격하는 상황은 두 전쟁이 꼭 닮았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야욕을 정탐하기 위해 조정에서 보낸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상반된 견해를 말한 것, 북한은 핵무장과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이른바 우파와 끝까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법을 주장하는 좌파의 대립



임진왜란 당시 가난과 질병에 아버지의 인육을 먹고, 자식을 죽이는 반인륜적인 상황까지 내몬 전쟁의 짐을 고스란히 백성들이 짊어져야 했듯, 평화와 통일을 말하면 한쪽에서는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불안을 계절마다 옷처럼 바꿔 입어야 하는 국민들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



코로나19가 이념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전염되듯, 전쟁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전쟁의 적은 전쟁이다.









-- 메모


- ‘징비(懲毖)’란 『시경』「소비(小毖)」편에 나오는 문장, “子基懲而毖後患(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로부터 유래한다.


- 김성일을 만난 나는 물었다. “그대 의견이 상사(황윤길)와 전혀 다르니,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러자 김성일은 이렇게 답했다.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길의 말이 너무도 강경해 잘못하면 나라 안 인심이 동요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33쪽


-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180쪽) 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기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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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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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열두 발자국, 어크로스, 2018


- 최근에 정재승 교수가 출연했던 알쓸신잡 시즌 1을 다시 보았다. 유시민, 김영하, 정재승, 황교익 등 작가, 뇌과학자, 맛칼럼리스트, 음악인(유희열)이 전국 각지를 여행하고 모여 다양한 주제에 관해 난상토론을 벌이는 컨셉의 프로그램이다. 코로나19로 맘 놓고 여행을 떠나기 쉽지 않은 상황이고, 지적인 수다가 그리웠던 상황에서 그 프로그램을 재시청하면서 지적인 삶과 창의성에 대한 욕구가 솟아났다.



그 프로그램(2017년 방영)을 본 이후 이 책을 읽으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정재승 교수가 출연해 나누었던 많은 주제와 근거들이 이 책에 상당부분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당시 그렇게 말했던 것이 이런 맥락이었구나, 같은 뒤늦은 깨달음이랄까.



또한 한때 광풍을 불러 일으켰던 암호화폐 논란에 관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벌였던 논쟁과 텔레비전 토론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장래에 광범위하게 활용될 기술이고, 금융과 산업 생태계를 완전히 바꿀 테크놀러지이기 때문에 그 미래의 형상에 관해 현재적 관점에서 예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주된 논지였고, 암호화폐 투자에 대해 단순히 청년들의 투기적 열풍이 문제가 있다는 접근방식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유시민 이사장은 논지는 그 기술적 활용성과는 별개로 암호화폐가 실물적으로 구현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므로 이에 광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사회문제가 된다는 지적이었다. 정재승 교수가 말하는 기술 자체의 활용과 전망의 문제와 그 불확정적인 가능성만을 근거로 투기적인 행태를 보이는 사회현상은 다른 평면의 문제이므로 애초에 두 사람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달랐던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토론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유시민 이사장의 현상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말고도 이 책 안에는 과학을 철학적으로, 철학과 윤리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내용도 많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과학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오히려 열독해서 지적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데 좋은 책이며, 해당 챕터의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해도 좋을 것 같다.






□ 첫 번째 발자국: 선택하는 동안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 보통은 남성이 약지, 네 번째 손가락이 더 길고 두 번째 손가락이 짧아요. 임신 13주차 때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양이 많아지면 네 번째 손가락이 길어집니다. 네 번째 손가락이 길수록 위험 감수 성향이 강해 로또를 선택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35쪽


- 그렇다면 좋은 의사결정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만약 저에게 물으신다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의사결정을 한 후 빠르게 실행에 옮기고,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끊임없이 의사결정을 조정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48쪽


□ 두 번째 발자국 : 결정장애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 세 번째 발자국 : 결핍 없이 욕망할 수 있는가


- ‘마시멜로 테스트’

컬럼비아대학교 심리학교 월터 미셸 교수는 이 실험에서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15분을 참아낸 아이들이 참지 못하고 먹어버린 아이들보다 나중에 SAT점수도 평균적으로 무려 200점이나 더 높고, 연봉도 1만 5000달러 정도 더 많이 받는다고 했지요. 알코올중독에 걸릴 확률도 10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 범죄를 저지를 확률도 15분의 1밖에 안 된다고 추적조사를 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성취를 하는 데 있어서 충동을 억제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108쪽


□ 네 번째 발자국 : 인간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살펴보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혼자 노는 사람인가, 아니면 같이 노는 사람인가? 나를 가장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내가 어떻게 일할 때 가장 행복한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혼자 노는 게 즐거운지 함께 노는 게 즐거운지, 현실에서 놀 때 즐거운지 온라인상에서 놀 때 즐거운지, 나는 몸을 움직이면서 노는 사람인지 두뇌의 유희를 즐기는 사람인지, 이성적인지 감성적인지 말이지요. 124쪽


□ 다섯 번째 발자국 : 우리 뇌도 ‘새로고침’ 할 수 있을까


- 후회, 인간의 고등한 능력


다시 말해서, ‘A를 선택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거야’라고 해서 선택했는데 그 결과가 기대만 못할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실망이라면, A를 선택해놓고선 B를 선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 다음에 그때 예상되는 결과와 내 현실을 비교해서 내 현(147쪽)실이 그보다 못하면 느끼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이 후회인겁니다. ‘A를 선택하지 말고 B를 고를걸!’ 하고 말이지요. 148쪽


□ 여섯 번째 발자국 :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가


- 볼프람 슐츠의 보상심리 실험. 원숭이에게 오렌지주스를 보상으로 제시하고, 예측과 기대 여부에 따른 두뇌 반응을 측정했다. 예측하지 않은 보상을 받았을 때, ‘쾌락의 중추’로 알려진 측좌핵 신경세포의 활동이 가장 활발히 증가했다. 179쪽


- 이 실험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뭘까요?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라는 겁니다. 179쪽


- 회의주의자로 살아가기

회의주의적인 삶의 태도란 어떤 것도 쉽게 믿지 않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애쓰는 태도를 말합니다. 근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181쪽


□ 일곱 번째 발자국 :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 오늘처럼 여러분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런 발상의 기회를 가지세요. 그리고 그것들을 다른 곳에 가서 흉내 내세요. 결과물이 아니라 사고방식을 흉내 내세요. 똑같이 따라 하진 마시고 꾸준히 변형하세요. 그것이 창의적인 발상의 출발입니다. 208쪽


□ 여덟 번째 발자국 : 인공지능 시대, 인간 지성의 미래는?


□ 아홉 번째 발자국 : 제4차 산업혁명시대, 미래의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


- 제4차 산업혁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물인터넷을 통해 아톰 세계를 고스란히 비트화해서 비트 세계와 일치시키면 이 빅데이터를 클라우드 시스템 안에 저장해서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아톰 세계에 맞춤형 예측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산업으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251쪽


□ 열 번째 발자국 :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열한 번째 발자국 :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에 도전하는가


□ 열두 번째 발자국 : 뇌라는 우주를 탐험하며, 칼 세이건을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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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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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으로 알려진 재북 시인 백기행의 1957년부터 1963년까지의 일곱 해를 다루는 소설이다. 

서정시를 쓰던 시인이 공산주의에 기반한 1인 수령체제로 전환기에 있는 북한에서 

사상검증을 받고, 변방인 삼수군의 관평협동조합으로 유배에 가까운 파견을 가서 생활하는 장면까지 세밀하게 다루는데 그 사이에 1930년대의 평양과 함흥 시절이 회상으로 끼어든다.


당대에 기행과 친분이 있었던 인연들을 만날 수 있는데 특히 상허 이태준에 대한 분량이 꽤 많다.

또한 '현'으로 지칭된 실존인물인 신현중이 백석이 흠모했던 통영 '천희'(처녀) 박경련과 결혼한 에피소드처럼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더 재미가 배가 될 것이다.

(시인 안도현의 "백석 평전"을 같이 읽는 것도 좋겠다)


소설적으로 삽입된 허구는 러시아 시인 '벨라'와의 인연, 모스크바 유학파 옥심, 삼수에서 알게된 여교사 '서희' 정도인데, 첫 장면부터 등장한 '벨라'와의 관계는 기행이 삼수로 가는 원인을 제공할 뿐 기행이 함흥에서 '벨라'의 통역을 한 것과 서신을 주고 받은 설정 외에 그 관계가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그랬다면 꽤 분량이 늘어났을 테지만. 


언뜻 보면 꽤 심심한 소설이지만 작가가 고증과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 해낸 기행의 7년의 삶은 한겨울에 '푹푹 나리는' 눈처럼 순하고 고요하다. 특히 삼수 협동조합 시절 양을 살뜰히 돌보면서 마주하는 양의 눈빛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소설의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다. 


"백석평전"외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국가에 의해 핍박받는 과정과 예술가의 내면을 절절히 그린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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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9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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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소설집, 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사, 2018(재판)(초판은 1992)

 

소품, 단편 그리고 중편을 묶은 정찬의 소설집이다. 중심은 맨 마지막에 실린 ‘얼음의 집’이다. 시기적으로도(일제강점기), 분량 및 무게감으로도 이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한다. 권력과 인간, 권력과 종교, 권력과 사랑, 권력과 역사, 권력과 정치 (···) 권력의 문패를 단 대문을 열고 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 방들은 신기하게도 벽에 의해 구획되어있지 않고 마치 빈 소금 창고에 들어간 것 같은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독립적이면서도 거대한 끈으로 묶인 듯한 막막함.

 

이 소설집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6.25. 4.3. 유신, 80년 5월 광주의 액자들을 보게 된다. 어떤 그림 앞에서는 오래 머물렀고, 뚫어지게 그 속의 집과 길과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게 한다.

 

 

* 얼음의 집

 

- 천황의 죽음

 

1922년 12월, 내 나이 열세 살에 삼촌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감.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대역사건

 

내 나이 17세였던 1926년 9월, 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룹에 들어갔고, 거기서 정준영과 운명적인 해후를 했다. 145쪽

 

 

정준영은 후미코의 뼈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인 동시에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뼈를 입으로 가져갔다. 혀가 뼈에 닿았다. 그는 뼈를 핥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핥았다. 이 뼈는 그녀의 영혼이며, 이제 그녀의 영혼은 머나먼 여행을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기억과 완전히 끊어진 곳으로의 유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물질, 이 세상의 냄새, 이 세상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나는 혀로 뼈를 씻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후미코의 영혼이 평화로운 유영을 할 수 있도록. 157쪽

 

- 황금 사다리

 

 

“권력자이면서도 권력의 운명에서 벗어난 이가 천황이네. 하야시는 자신의 내면을 천황의 내면과 일치시키려 했네. 내면의 일치란 존재의 일치네. 이 일치를 통해 천황이 되고자 한 것이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천황을 향한 걸음이었네. 이것이 바로 그가 만든 사다리의 모습이었네. (···)” 220쪽

 

“하야시의 사상은 이러한 일본의 권력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부정이며, 냉소며 초월이네. 하야시는 박해받은 자의 고통과 비명은, 그 살과 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네. 하야시는 사상으로써 일본의 권력을 냉소했고, 실천으로써 천황을 향해 다가갔네. 인간에게는 종족 보존의 본능이 있듯이 사상을 보존하려는 본능도 있네. 그 사상의 혈맥을 하야시는 자네에게 잇고자 한 게 아닐까.” 225쪽

 

- 얼음의 집

 

내 삶의 공간이 어떤 곳이지 너는 알 것이다. 얼음의 공간이었다. 얼음은 따뜻함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자신을 지탱하지 못한다. 사랑이 스며들 수 없는 곳이야말로 내가 구축한 얼음의 집이었다. 그런데 그 속으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종이비행기처럼 작은 새였다. 그 새를 바깥으로 쫓아냈어야 했다. 생각을 해보라. 새를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새는 차가움에 체온을 빼앗길 것이며, 마침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얼음의 집은? 새의 따뜻함이 얼음 속으로 파고 들어 결국 집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새는 죽고 얼음의 집은 파괴된다. 234쪽

 

아들은 쓰라린 상처 속에서 자라고 있는 증오의 씨앗이 칼이 되어 내 가슴에 잫기 전에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들이 살아 있는 한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으며, 증오의 씨앗은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찌를 때까지 성장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날 (237쪽)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 살을 향해 달려왔던 칼은 바로 아들의 칼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젠가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아연했다. 10년 동안 아들의 칼을 기다리고 있었던 스승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238쪽

 

 

운명은 나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아들이 열여섯 살 되던 해 여름,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병원에 달려갔을 때 몸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슬프지 않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내의 비통 앞에서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등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없어진 것처럼. 나의 감정이 온당한 것인지 회의하기도 했지만 온당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권력의 법칙 앞에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하잘것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이성도, 도덕도, 정서도 권력이란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허공에 떠도는 티끌이 되어버리니까. 나는 운명에 순응했다. 철저히. 스승은 운명을 거스르다가 추락했지만 나는 냉혹히 운명을 실천했다. 243쪽

 

* 완전한 영혼


 

* 패랭이꽃


 

* 신성한 집


 

* 길 속의 길


 

* 영산홍 추억


 

-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 어둠 속에서 홀로 앙상한 뼈처럼 서 있는 말이었다.

 

“그동안 나는 역사라는 말을 수없이 해왔고, 또 들어왔지만, 그토록 무게가 실린 말은 처음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의 운동에 의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힘, 즉 권력으로 전화된다. 그러므로 역사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하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화로의 운동 때문이다. 역사가 수레라면 권력은 바퀴이며, 인간은 이 바퀴를 굴린다. 역사에 철저히 복무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하는 운동에 철저히 복무함을 뜻한다. 철저한 역사의식은 철저한 권력화 의지를 뜻한다.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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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김미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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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 소설집,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문학동네, 2019




​소설의 대세는 계속해서 젠더이슈에 관한 작품들이다. 여성 작가들의 페미니즘, 남성 작가들의 퀴어. 성별이나 성 정체성에 관한 차별이 사라질 떄까지 소설가의 말과 작품은 끊어져서는 안 된다.
한편, 김미월의 소설은 첫 작품집부터 최근까지도 여전히 세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것 같다.
20대의 여성으로서 작가가 20대의 주제인 젊음과 사랑,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세계 이전 작품들에서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집은 30대의 독신 여성으로서의 삶의 채취가 짙다. 물론 그 속에는 여성으로서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이 담겨 있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담긴 작품도 있다('선생님, 저예요' '연말특집')



20대인 작가는 30대가 되었으므로 자연히 30대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가 자신과 소설 속 화자 간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은 세계를 그려낸다. 30대의 삶은 10대나 20대의 삶과 섬처럼 분리된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다리로 연결된 연속적 세계이므로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고 내다볼 수 밖에 없는 시기다. 작가나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닌 그 시기를 거쳤거나 헤쳐나갈 사람들의 기억과 예상의 감각을 자극하면서 이 소설들은 묘한 쾌감을 준다.



사랑과 죄책감, 자존감에 대한 성찰을 원한다면 당장 이 책을 펼쳐야 한다. '아무도 펼쳐 보지 않는 책'이라면 당신이 최초로 열어보아야 할 때다.





*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 시간


- 이튿날이 귀국일이었다. 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길 지하철역에서 즉석사진 부스를 보았다. 새해를 맞아 서른아홉 살이 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평소 피사체의 진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믿어온 전형적인 지하철역표 증명사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는데 새삼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 그녀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겠지. 계속 혼자겠지. 혼자 아무도 모르게 늙어가겠지. 27쪽


- 양희는 아까보다 더 빨리 대답했다. 사진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찍어도 될 텐데 노인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나는 양희희 가방에 있는 사진을 떠올렸다. 양희가 그것을 노인에게 준다면 어떨까.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이게 저예요./ 그래./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문득 깨달았어요, 제가 혼자라는 것을요./ 그랬구나./ 앞으로도 혼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막막했어요./ 그래./ 내일이 시험이고 공부는 하나도 안했는데 벌써 밤이 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온 거예요. 아버지도 저처럼 혼자인지 알고 싶어서요./ ······ 33쪽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55쪽


*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 어쨌거나 담임선생의 중재로, 만약 그런 것도 중재라고 할 수 있다면, 친구는 상장을 가졌고 남자는 크레파스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중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얼마 안 있어 친구는 죽었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물론 남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랍 속의 크레파스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도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스스로 그것을 보면서 매번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0쪽


-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새카매졌다가 알 수 없는 색으로 덧칠되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인칭으로 쓸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97쪽) 오래전 마주앉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날처럼 그는 이번에도 삼인칭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어쩌면 그는······ 하고 말이다. 98쪽



* 2월 29일



- 그가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켰다. 아, 하고 나는 입을 벌렸다.

2월 29일이었다. 사 년에 한 번씩 윤년에만 찾아오는, 평년에는 2월 28일 밤과 3월 1일 새벽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오늘이 그날이었나. 등줄기가 서늘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특별하고 유일하며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119쪽


* 오늘의 운세


- 아, 정말이었다. 이윽고 세 종류의 알람 소리를 넘어, 먼 곳에서 희미하게 다른 알람 소리가, 곧이어 또다른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점점 더 크게 열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알람이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수백 개, 수천수만 개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침이란 알람의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끄지 않는다면 영원히 울릴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알람들의 시간. 154쪽


* 질문들


* 선생님, 저예요



* 도망가지 않아요



-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는데(237쪽) 그게 실패할 수도 있나. 그러니까 베트남 처녀에게도 거절할 권리가 있었단 말인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차고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238쪽


* 연말특집


-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그녀는 윌리엄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를 지나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가 눈으로 선의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방문이 있었다. 열린 문 안쪽으로 연분홍 시트가 깔린 침대가 보였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선은 윌리엄을 밀치며 일어났다. 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깨기는커녕 언니는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더 세게 흔들려고 하는데 윌리엄이 막았다. 그는 언니의 남자친구였다. 267쪽


* 만 보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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