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
#공범

밤에 깨어 있는 낮
두꺼운 외투가 맨가슴을 그리듯 밤을 기다리는 낮


밤이 출근하면 낮이 배웅했고
밤이 퇴근할 무렵 낮은 외출했다
낮이 잠을 자면 밤은 죽음에 대해 글을 쓰고


내가 너를 삼키지 않듯
밤은 낮을 가릴 뿐이다
밤은 낯을 가릴 뿐이다


밤은 가면을 쓰고
눈썹을 들어올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코를 훌쩍거리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심야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낮달은 희미할 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배는 불렀다가 꺼지는 것이고 꺼지면 꼬르르 소리가 나다가
쓰리다가 야윈다


졸면 죽음이다 졸음운전은 목숨을 건 도박
이라는 협락
최장기간 터널이 지나면 동굴이 나온다
동굴 속엔 호랑이를 삼킨 뱀이 산다
뱀은 온몸으로 바닥을 쓸며 대지의 신음소리를 저장하고


동기 고의 목적이 없는
낮과 밤의 상습적인 자리바꿈
그들은 공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셈을 알지만 샘을 모르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치는
한 번 틀린 문제는 꼭 맞추는 우등생


사춘기도 없는
중이염


음악을 크게 틀고 소설을 쓰며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좀비


더위도 추위도 모르는 
엣지 있는 패션감각


뚝딱뚝딱 금방 만드는 마이더스의 손


휴가도 안가고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수년을 알아도 
마음을 알 수 없는


유진아


너는 남자야 여자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방 


#모방



나는 재잘거리는 것을 좋아해 촉촉한 입술만큼

침이 마른 입술이 좋아

너는 말이 별로 없었지

그래서 좋았어





가끔 내 등에 턱을 갖다 대고 

어미처럼 쪼았어

내 심장 소리에 맞춰






너는 먼저 문을 여는 법이 없지






너는 가장 높고 뜨거운 날

바다를 건너와 한밤중에 몰래

구덩이를 파고 나를 낳았어







구덩이 위로 머리만 삐죽 내놓고

사방을 살피다가

손톱이 갈라지고 터져 피가 나는 줄도 몰랐어






너를 보기도 전에

너는 바다로 가버렸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는 너처럼

머리를 내밀고

너처럼 

피가 나도 몇 개 안 난 이빨과

손톱으로 벽을 긁어야 해





너처럼 바다로 달려가

너처럼 밑바닥에 몸을 얹고





너와 내가 태어난 그곳으로 돌아와

너처럼 구덩이를 파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날개부터 뜯어 먹었다 
  배불리고
  배불려야 할 너는 없었다


  배불러 너를 낳았다
  배불러 낳은 너를 죽였다
  죽이고 낳기를 반복하여 너를 얻었다
  네가 물어다 온 것을 먹고 아홉 형제를 낳은 후
길게 자란 손톱을 잘랐다


  왜 그랬는지

  난 어떻게만 생각했다



  집을 지었다
  잎을 반으로 접어 말아 올려 구멍을 뚫고
너를 낳았다



  계속 말아 올렸다
  다 만든 요람을 잘라 땅에 떨어뜨렸다


  너는 그 요람을 먹고
  수컷을 먹고 형제를 먹고
  새끼를 나의 몸을 잡아먹고 뜯어먹고


  그럴 때마다 나는 흥분했다
  목이 잘린채 허덕이는 나의 신경은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지금 문지방 위에 서 있다


  나는 부화하여 가물가물 현관을 나선다
  점에서 면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알에서 유충으로


  잠을 갉아먹다가 다섯 번을 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편지 #편지



나는 글씨를 보면 성격이 보인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글씨가 삐뚤삐뚤 하거든요

안경을 바꾸고 펜을 바꿔도 글씨가 똑같아요

꿈은 반대라는 말이 좋아요






나는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해요

여행을 가면 꼭 엽서를 사요 거기에 편지를 써요

썼다가 지웠다가 또 써요 그러면 기분이 좋아요

글씨는 삐뚤삐뚤하지만 상관없어요







나는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려요

편지를 쓰고 보낸 적은 없어요

그런데 가끔씩 답장이 와요







오늘은 아무 생각없이 생각나는대로 써 볼 거에요 

모래와 햇빛, 파도, 웃음, 눈물

그리고 마음에 관해 







삐뚤어진 내 글씨가 좋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볼 수 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