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 제4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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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로 마키아벨리(강정인, 김경희 옮김), 군주론(IL PRINCIPE), 까치, 2008(제3판)


 

제목만 듣고 이 책이 유명하지만 딱딱하고 지루한 책이라고 짐작하고 펼쳐보지 않은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서문에 해당하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는 헌정사만 읽어도 이 책의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적확한 비유를 사용해 군더더기가 없다. 실제적으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세와 통치의 방식을 조언하는 책이므로 읽기 힘든 만연체나 문어체를 구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15세기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 교황청, 밀라노에 세워진 개별적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거기에 외세인 프랑스와 스페인 왕국이 이들과 합종연횡을 통해 권력을 빼앗고 빼앗기곤 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둘러싼 역학관계를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적 사실과 당대의 현실을 적절한 예로 들어 논지를 펴고 있다.

 

철저하게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조언을 한 마키아벨리를 성악설에 기반한 피도 눈물도 없는 외교부 공무원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그는 비상시와 평화시의 대응을 구분했고, 인민들의 미움을 받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한 공화주의자였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고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용병은 무익하고 자기 영토의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강한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 늑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여우의 계략과 사자의 용맹함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등에서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떠올리게 하고, 적을 억누를 때는 감히 보복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짓밟아야 한다는 문장에서는 비정함이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이 책은 군주(지도자)가 읽어야 할 책인 동시에, 민주공화정에서 국민의 대리인인 정치인과 권력자들을 견제하고 감시해야할 이 나라 시민들이 읽어야 한다. 군주(지도자)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며, 어떻게 사고하는지 엿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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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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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황정은 소설집, 연년세세, 창비, 2020

 

  이순일(이순자)와 그의 남편 한중언, 그들의 딸 한영진과 한세진, 아들 한만수로 이루어진 한 가계에 대한 이야기의 외양을 가진 연작소설이다.

 

작가의 말) ...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그게 궁금한 적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읽히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185쪽

 

작가의 말과 곳곳에 배치된 ‘순자’라는 상징에 비추어 보면 이 연작소설은 단순한 가족에 관한 서사가 아니다. 이순일을 중심에 두면 6.25.전쟁의 비극을 겪인 전쟁세대의 여성에 관한 스토리로, 백화점의 이불매장 판매직원으로 일하면서 친정과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장녀의 이야기, 이상과 현실의 격차에 좌절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중년과 청년세대의 이야기(한세진과 한만수), 한중언과 김원상과 한만수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몰락과 무능력에 관한 페미니즘적 서사 그리고 가족이라는 경계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도 끝끝내 마음을 열지 못하는 현대인의 이야기 등등.

 

매 소설마다 시점을 바꾸어 각 인물들의 내면과 이야기를 중층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연작소설의 장점이다. 더불어 6.25. 전후부터 2016년 촛불집회 그리고 현재까지 현대사의 비극과 슬픔이 본격적이 아닌, 긁힌 상처 같은 형태로 곳곳에 새겨져 있어 더 좋았다.

 

 

파묘(破墓)


 

「하고 싶은 말」

 

-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쪽

 

-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를 유심히 보고 싶은 마음, 다음 표정과 다음 행동을 신기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 찡그린 얼굴을 가엾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관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인내심······ 모든 게 그 간격 이후에야 왔다.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한영진은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첫 번째보다는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금은 좋아했다. 이순일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한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75쪽

 


 

「무명(無名)」


 

- 니가 순자를 모른다고? 이순일은 어리둥절해 한세진을 바라보았다. 이 애가 순자를 모르는구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갈골에서 부모와 사별한 순자, 지경리에서 할아버지와 살던 순자, 그리고 그 순자가 열다섯살 때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에서 만난 순자. 내 동무, 이웃, 동갑이자 동명(同名)인 순자. 내가 순자의 뺨을 때렸고 순자는 울지도 않았다. 이 이야기를 다 어떻게 할까, 어디부터. 90쪽

 

- 배추밭을 혼자 기었다면 어른들을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혼자였다면 그 밭을 무사히 기어(102쪽) 어른들을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이 있었어. 그 아이가 조그만 양파 꾸러미처럼 내 등에 묶인 채 업혀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로 바닥을 밀고 엉덩이를 들 때마다 등에 업힌 동생의 머리가 달랑거리며 목 뒤를 짓눌렀다. 다섯 살 등에 업힌 세 살의 무게. 나는 그 밤 그 밭골에서 천근만근의 무게를 알았다. 백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아이는 내 등에 업혀 있었어. 마당으로 들어서서 달을 등진 채 한동안 서 있을 때에도, 다급히 짐을 꾸려 떠난 흔적으로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방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에도 그 아이는 있었다. 그뒤로 몇밤 더 지나고 마을 어른들에게 발견된 때에도 그 아이는 있었고 지경리 집 삽짝을 밀고 들어가 할아버지를 봤을 때에도, 흠투성이 개다리소반에 올린 삶은 감자와 동치미로 그 집에서 첫 밥을 먹을 때에도 그 아이는 있었다. 103쪽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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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 - 허수경이 사랑한 시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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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허수경,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허수경이 사랑한 시), 난다, 2020

 

2009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시와 짧은 감상에 관한 원고를 정리한 책이다. 보았던 시와 처음 보는 외국 시인의 시가 함께 실려 있다. 시보다는 시에 관한 저자의 글에 눈길이 더 갔다. 왜 이 시를 골랐으며, 그때 느꼈던 감정을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다. 마치 어깨를 맞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신문의 지면적인 제약 때문에 주로 짧은 시가 실려 있는데, 손이든 키보드이든 천천히 필사해보면서 읽어나가면 더욱 좋을 것 같다.

 

 

 

- 「로렐라이」, 하인리히 하이네

 

멜로디는 작은 배를 탄 뱃사람을/ 거친 슬픔으로 휘어잡았네/ 그는 암초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위를 올려다보았네.// 내가 알기로는 마침내 물결이/ 뱃사람과 배를 삼켜버렸다네/ 로렐라이가 부른 노래가/ 그렇게 했다고 하네. 65쪽

 

-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이성복 80쪽 , 2시집『남해 금산』에 수록, 김현의 해설 〈치욕이 시적 변용〉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종일 바람이 불어 거기 아픈 사람들이 모래집을 짓고 해 지면 놀던 아이들을 불러 추운 밥을 먹이다/ 잠결에 그들이 벌린 손은 그리움을 따라가다 벌레먹은 나뭇잎이 되고 아직도 썩어가는 한쪽 다리가 평상 위에 걸쳐 누워 햇빛을 그리워하다/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아직도 나는 그들을 그리워하다 발갛게 타오르는 곤충들의 겹눈에 붙들리고, 불을 켜지 않은 한 세월이 녹슨 자전거를 타고 철망 속으로 들어가다/ 물과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벌레먹은 그리움이다 그들의 입속에 남은 물이 유일하게 빛나다

 

 

- 「부빈다는 것: 도장골 시편」, 김신용, 96-97쪽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화음,/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입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 「사랑」, 김근, 102쪽

 

그러나 돌의 피를 받아 마시는 것은/ 언제나 푸른 이끼들뿐이다 그 단단한 피로 인해/ 그것들은 결국 돌빛으로 말라 죽는다 비로소/ 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서적」, 조연호, 107쪽

 

내 책읽기가 아름다워진 건 독서가 가장 낙후된 장르였던 시대의 일이었다. 황량한 이 별의 느낌이 좋아서 나는 옥상에서만 문장을 만들고, 필라멘트를 쥔 작은 전구는 가족들의 불면을 향해 좀더 걸었다. 두 발을 한쪽 구두에 집어넣는 기분으로 계단이 시작된다. 악연은 모두에게 신발과 같은 것이고 이제 난 그것 한 켤레로 걸음이 점점 편해질 것이다. 팔다리 자라는 소리가 하나 가득 귀를 울리는, 그보다 더 지루한 성장은 없었다. 문지른 책받침에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걸 여자애는 무료하게 한 올 한 올 들여다본다. 책을 읽는 당신은 푸른 공을 끌어안고 최초의 파충류처럼 태양에게 말을 걸었다: 우린 늘 태어나보지 못한 자들이고, 머리 타래는 잘라 반수(半獸)의 신(神)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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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 실크로드편 1~3 세트 - 전3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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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틈이 세 권을 차례로 읽어 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서안에서 카슈가르까지 펼쳐진 실크로드 초반 중간 지점을 횡단하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정보는 많고, 사진, 도판도 풍부해 '실크로드를 가지 않고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낙타의 등에 올라 모래바람을 맞으며 고도의 붉은 산과 일몰을 바라보는 것 같은 직접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직장과 가족과 일상을 접어 두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는 큰 결심이 필요하다. 심장 한 켠에 바람을 묻어두고 피가 순환할 때마다 그 바람을 파도처럼 상키시켜 주길. 최근 JTBC에서 방송된 유홍준 교수의 "차이나는 클라스" 김탁환의 소설 "혜초" 책에서 언급된 관련 다큐멘터리를 유투브로 같이 보면서 즐긴다면 조금 더 입체적으로 책을 즐길 수 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1(돈황과 하서주랑), 창비, 2019

 

- 하·상·서주 뒤이어/ 동주에 춘추전국/ 진나라 때 통일되고/ 양한·삼국 지나면/ 오호십육국이라/ 서진·동진·남북조에/ 수·당·오대십국 거쳐서/ 송·원·명·청 끝이라오 19쪽

 

- 이에 비해 두보의 시적 이미지는 서서히 고양되고 그 분위기가 쓸쓸하고 왠지 슬퍼서 무릎을 칠 일이 없다. 명랑하게 살면서 신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에 그런 고독의 분위기는 잘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보 시의 절묘함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시의 기승전결을 두고 말하자면 이백은 처음의 ‘기’가 웅장하고, 소동파의 시는 마지막의 ‘결’이 절묘함에 반하며 두보는 세 번째 ‘전’에 이르러 시적 이미지가 한껏 고양된다. 86쪽

 

 

- 한나라 이후 오호십육국시대가 되면 유목민족이 북중국을 지배하(233쪽)면서 만리장성은 국방의 의미를 상실하여 방치되었다. 수나라·당나라가 이를 일부 수축했지만 몽골족의 원나라 시대로 들어오면 장성이 아예 의미조차 없게 되어 사실상 폐허가 되었다. 그래서 원나라 때 중국에 온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234쪽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2(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창비, 2020

 

- 최연식 교수는 이어서 질문을 받아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인 『반야경』에 나오는 공(空)에 대하여 설명했다.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을 이루는 것은 공(空)입니다. 인도 불교에서 수냐타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무(無)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쿠마라지바는 이를 ‘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미 중국의 노장사상에 ‘무’라는 개념이 있는바, 이와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닙니다. 공은 작용이나 기능은 있지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 68쪽

 

-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침탈을 위해 총칼을 들이대기 전에 상인을 앞장세웠고, 다음에 종교를 퍼뜨렸고, 그다음엔 학자들이 들어가 그 땅의 역사와 지리와 민속을 연구하면서 정보와 지식을 넓혔다. 이는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도 전쟁을 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나름의 기초조사이기도 했다. 117쪽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3(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창비, 2020

 


- 쿠마라지바의 번역 중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는 ‘공(空)’에 관한 것이다. (···) 색(色)이란 형태가 있는 것을 말하고 공이란 실체가 없고 변해가는 것을 말하지만 결국은 둘이 같(229쪽)다고 말한다. 이를 쿠마라지바는 개념화시켜 이렇게 번역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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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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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시), 마음산책, 2010

 

읽다가 멈춘 책을 다시 들추었고, 오늘 끝까지 다 읽었다. 다시 읽어보려고 표시해둔 시를 살펴보는데, 2020년 10월 10일 새벽 별세한 이윤설 시인의 시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가 실려 있다. 시는 시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아니면 시인이 시를 닮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인은 외롭지 않겠다. 누군가는 시인이 낳은 시를 찾아 읽고 낭송하고 새겨볼 테니까.

 

 

-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63-64쪽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려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 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 전생이구나/ 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 봄// 저 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 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 그것을 꺼내어보는 일/ 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 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보내어보는 것/ 피 묻은 그것,//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 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

 

- 박준, 연, 76-77쪽 부분

 

··· 입술을 깨물던 당신의 꿈에 광부들은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날 나의 문명(文明)이었다 광부의 휘파람은 탄광 입구의 새 소리를 닮았다가 무너지는 갱도에서 새나오던 가스 소리를 닮았다가 혼들의 울음소리를 검게 닮아갔으니// 손이 찬 당신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번진 입술자국이 새가 날아오르기 전 땅을 깊게 디딘 발자국 같아, 아직도 살아남은 당신의 말들//

 

 

 

- 허은실, 물이 올 때 40-41쪽 부분

 

물금을 새로 그으며/ 어린 고둥을 기르는 것은/ 자신의 수위를 견디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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