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2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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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청하, 1988 복간본, 세 번째 시집)


1. 「그곳」연작 6편이 이 시집의 뼈대다. 이 시집이 처음 나온 1988년. 6.10. 민주항쟁과 6.29. 선언 이후라도 살아있던 권력은 군복을 벗고 기성양복을 입고 변신권력이 되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개 웅크려, 2017년 봄에 쓰여진 자서(自序)에 따르면 ‘뺨을 일곱 대 맞고 하숙집에 엎드려’ 쓴 시다. 시가 없었다면, 시라도 쓰지 않았다면 시인은 그 시절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별의 지옥’을 견디기 위해 시인은 자궁 속에서 소리쳤을 것이다.





- 그곳 1

그곳, 불이 환한/ 그림자조차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잠 속에서도 제 두개골 펄떡거리는 것이/ 보이는, 환한/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 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 엮어져 대못에 걸리는/ 그곳,/ 두 뺨에 두 눈에 두 허벅지에/ 마구 떨어지는 말 발길처럼/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 그곳,/ 밖에선 모두 칠흑처럼 불 끄고 숨죽였는데/ 나만 홀로/ 불 켠 조그만 상자처럼/ 환한/ 그곳,




- 한사코 시(詩)가 되지 않는 꽃

너무 차가운 것은/ 시가 되지 않는다/ 너무 뜨거운 것은/ 시가 아니다/ 끓는 물속에/ 두 발 담그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얼음 속에 누워/ 눈 뻐언히 뜨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중략)// 너무 아름다운 것은 시가 아니다/ 그날, 입을 벌려/ 처음인 듯 울 때/ 그것은 시가 아니었다/ 다만/ 한 도시 전체의 개화(開花)/ 지구 밭에 떠오른/ 한사코 시가 되지 않는 꽃!



- 소금 32-33쪽 부분

이편과 저편의 조용함/ 이편이 저편을 녹이고/ 저편이 이편을 마시고/ 부드럽게 섞여 돌아가는 봄/ 밤, 이편과 저편의 하염없는 삼투압/ 그러나 꿈, 깨뜨리면 없는/ 계란 속에나 있는/ 내일 아침 같은// 이편이 저편을 일으켜 세우고/ 머리끄덩이를 치솟게 하고/ 독방(獨房)에 처넣고/ 짠똥을 찔끔거리게 하고/ 소리를 다 꺼내게 하고/ 불안의 콩들을 핏줄기 속으로 쏟아붓는/ 대낮, 잠들고 싶지 않은 봄/ 물, 검은 뿌리를 두 발 아래 뻗치고/ 녹지 않으려/ 잠들어 섞이지 않으려/ 두 눈에 두 손가락을 쑤셔 박는/ 끓는 물속에 빠진 아편의 한낮/ 안 돼 안 돼 그러다가/ 짠물을 화악 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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