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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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1. 김혜순 시인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에 실린 49편의 시들이 출구라면 이 시집은 입구다. 컴컴한 뱃속에서, 감은 눈 속에서, 눌러놓은 돌멩이 아래에서, 다져놓은 밑바닥에서, 겨우내 말라있던 나뭇가지에서 ‘당신의 첫’이 태어나려고, 삐져나오려고, 빠져나오려고, 흘러나오려고, 싹트려고 한다.

대개의 ‘첫’들(첫사랑, 첫키스, 첫돌, 첫눈)은 시작과 출발, 부재의 아련함을 환기하는 상징이겠지만 이 시집의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우리는 돌아갈 수 있다. 초심으로, 처음 당신의 눈 속의 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처음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손깍지에서 처음 당신의 손가락이 흘러내렸을 때의 감촉으로.


- 지평선 7-8쪽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 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 첫 25-27쪽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 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의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 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중략)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 첫. 첫. 첫. 첫. 자판의 레일 위를 몸도 없이 혼자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 개.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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