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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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집,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1. 출근길에 전철 빈 좌석이 없어 난간에 기대어 가방에서 책을 막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맞은편 끝 좌석에 앉은, 생김새로 보아 인하대 학생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보다 꽃무늬 매듭이 있는 검은 두와 청바지 사이로 드러난 발목에 눈이 갔다. 양말도 바지도 덮어주지 못한 발목의 표정,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바닥에 심으며 다녔을까. 손이나 발은 흔적을 남기지만 발목은 얼굴 없는 가수처럼 숨어 살아왔을 것 같았다. 다섯 발가락 식구를 위해 중심을 잡는 기둥으로 베흘림의 유연함까지 요구 받는 발목.


너에게 매달리거나 너를 붙잡고 놓지 않는 존재들을 위해 스스로 몸을 묶고 그루터기가 된 발목.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거나 발목을 삐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때라야 잠시 쉬어가는. 잠시 후 그녀가 내린다. 발목은 다시 몸을 숨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2. 나희덕 시인의 시집. 가냘프고 가녀린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어둠과 빛, 육체와 정신, 물과 불처럼 대립적인 이미지가 선명해서 쉽지만 쉽지 않은 시집. 한 삽 푹 떠놓고 꼬챙이로 조금씩 들춰가며 보고 싶은 시들.




* 메모

- 마른 물고기처럼, 14-15쪽 부분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 방을 얻다, 22-23쪽 부분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중략) //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 한 삽의 흙 24-25쪽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중략) 말의 지층// (중략)//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중략)//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



- 만년설 아래, 30-31쪽

녹지 않는 눈과/ 허공에 녹아 있는 꽃가루// 부동과 부유가 하나로 어우러진/ 그 장엄한 비행을 보려고/



- 재로 지어진 옷, 37쪽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 그림자는 어디로 갔을까 42-43쪽

아침마다 서둘러 출근을 하지만/ 그림자는 집에 있다/ 그를 두고 나오는 날이 계속되고/ 거리에서 나는 활짝 웃는다// 그림자 없이도/ 웃는 법을 익힌 뒤로는/ 내 등 뒤에 그림자가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중략)// 어둠 속에 우투커니 앉아/ 그림자를 기다린다/ 그가 나를 오래 기다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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