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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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1. 전통시장을 찾았다. 시장 입구에서 끼고 있던 이어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시장의 좌판에는 과일, 생선, 떡, 채소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나를 붙잡는 것은 ‘음성’이다. 상인들의 목소리보다 먼저 만두가 익어가는 소리, 미꾸라지가 파닥이는 소리, 떡갈비가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시장은 타자를 환대하는 공간이다. 손가락 한 두 개로 쇼핑을 끝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손바닥 전체에 연결된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야 비로소 물건 하나를 집을 수 있는 곳이다. 철학자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지’ 보다는 ‘인식’의 공간이다. 정상가격에 두 줄을 긋고 할인가격을 표시한 입간판이 아니라 흥정과 덤이 오가는 유혹의 공간에는 나를 향한 시선과 음성이 가득하다. 시장에서 나는 백화점이나 마트, 휴대폰 공동구매로 느낄 수 없었던 타자가 다가옴을 경험한다.



2. 저자는 타자의 부정성이 소멸시키고 무한 자기긍정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비판한다. 과거의 권력은 금지를 명했다면 오늘날의 권력은 작위를 명한다. 신자유주의의 ‘할 수 있다’라는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부작위의 자유가 없다. 아프면 힐링하고 치유하고 일어서야 한다.


저자는 소멸해 가는 타자의 회복을 주장한다.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시간의 회복과 공동체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은 들지만 경청, 공감, 연대, 공동체 실현의 방법론이 여전히 남는다. 물론 이 책이 거기까지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문제의식을 다시 확인하는 것만 해도 소득이다.



- 메모 -

* 같은 것의 테러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지옥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 오늘날의 병적인 시대의 기호다. 파괴적인 압박은 타자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7쪽





*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23쪽



* 두려움

활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49쪽



* 음성
- 카프카에게는 음성과 시선이 몸의 기호이기도 했다. 이 몸 기호가 없는 소통은 그저 유령들과의 교류일 뿐이다. “(···) 글로 쓴 키스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요. 도중에 유령들이 모조리 마셔버립니다.” 디지털 소통 수단은 편지보다 훨씬 더 몸이 없다. (···) 디지털 매체들은 타자로서의 상대를 매끄럽게 다듬는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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