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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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1. 벽으로 다가간다 벽은 높다 벽에서 이십 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되돌아가 이번엔 벽을 향해 뛰어간다 벽은 금방 뒤로 물러난다 벽은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점점 더 멀어진다 건널 수 없는 해자와 넘을 수 없는 성벽과 옹벽이 된다




다시 벽으로 다가간다 말갛게 씻은 사과 한 알을 건넨다 벽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긁힌 자국과 어젯밤을 마신 빈 병과 주르르 흘러내린 말의 자국들만 있다



발뒤꿈치를 든다 어깨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물들어 가는 지붕들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벽은 기억이며 시간이다 벽이 만들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시간은 또한 벽을 갉아먹고 무너뜨린다 그렇게 벽은 늙고 죽는다



2. 허수경 시인의 최근 시집《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읽으려다가 먼저 이 시집을 손에 들었다. 시집을 읽다가 메모한 단어들을 보니 “추운 여름, 황무지, 문명, 나비, 잠자리, 비행, 제국, 양(lamb)". 형식은 서정이지만 내용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담겨 있다. 한국을 떠나 독일에 거주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심경과 그곳과 고향 사이에서 궁싯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악에 전면적으로 대항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약한 것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묻어 있다.



레이먼드 카버가 생각난다. 이 시집과 분명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잃고 찾지 못한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찾으러 간 부부와 빵집 주인이 나누는 대화(「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맹인이 눈만 뜨고 있는 장님의 손을 잡고 같이 대성당을 그려나가는 모습(「대성당」)이 떠오른다.




3. 메모






- 카라쿨양의 에세이 59-61쪽 부분

나의 어머니는 꼬치구이였다. (···) 그녀의 털과 가죽은 인간의 시린 등이나 목과 발을 덥혀주었다.// (···)// 무리를 이루며 사는 우리들은 무엇보다 무리에 속한 이들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살아남기 위한 미덕. (···)// 오비스 아리에스(Ovis Aries). 가축화된 우리들의 학명이다. //그러나,/ 산악을 누비던 오비스 아리에스의 조상. 그 원모습은 얼마나 나에게 남아 있을까? (···) 지금, 우리는 고기와 털을 얻기 위해 개량된 카라쿨이다.// (···)//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다. 나에게 젖을 준 인간의 어미 덕분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육체의 어머니는 나를 자궁에 품고 살해 당했다.// (···)// 내가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여인은 인간의 여자였다./ 그녀는 제 젖꼭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던 불우한 인간의 어미였다. (···)// 아기의 연하고도 부드러운 가죽털을 얻기 위하여 인간들은 이제 수태 시기가 임박한 어미를 죽여 그 자궁에서 아기를 끄집어낸다. 그 아기의 털가죽을 벗긴다. 그 털가죽은 페르시안이라고 불리우는 고급 가죽이 된다. (···)// 어미는 나에게 젖을 준 어미이기도 하지만 개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개의 주인이고 개는 언제나 어미 곁을 어슬렁거린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나는 내 탄생에 내재된 공포를 알아차렸다.// (···) 이렇게 내 위에 따스한 젖을 부어주던 어미의 동종은 내 위를 저 눈빛을 가진 개에게 던져줄 것이다. 마치 내 어미의 위처럼.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126-127쪽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롱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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