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336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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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시집, 이별의 능력, 문학과 지성사
#김행숙


1. 빌려주면 돌려받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이를테면 친구가 입고 간 속옷이나 시험기간에 사라진 이름을 크게 적어놓은 교과서 같은. 점유하고 있어도 취득할 수 없는 것이 사랑, 점유하고 있지 않아도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사랑. 사랑은 특정 공간에 형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처럼 부유하는 존재 같다.



한 사람은 기름진 닭다리와 날개를 좋아하고 다른 이는 퍽퍽한 가슴살이나 목을 좋아해서 온전히 치킨 한 마리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는 당신의 편이었기에 당신이 편했다는 생각. 당신의 주장과 변론은 유려하고 빈틈없었다는 생각. 내 이름 두 글자 사이에 당신을 꼭 닮은 중간 이름이 있었을 것 같은 생각.



내가 권리 위에서 잠을 자는 동안에도 이런 기억의 소멸시효는 진행 중. 시간이 지날수록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채무까지는 아니라도 나의 책무였다는 생각으로 뒤틀리고.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으로 모습을 바꾼다.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이 오지 않을 때, 텅 빈 우편함에 자꾸 손을 집어넣게 되고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자꾸 소화전을 열어본다. 나는 비겁하게도 나의 주소를 적지 않았다.



2. 메모



- 발 11쪽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 다정함의 세계 49쪽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이별의 능력 12-13쪽 부분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 (···)



- 하룻밤 34-35쪽 부분

하룻밤만 재워줘. 밤은 충분히 길고, 너무 큰 가방은 언제나 이야기보따리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는 19세기 나그네처럼 오늘 밤에도 문을 두드려.// (···)// 그렇다면 얘야, 마구간이라도 괜찮단다. 말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동물이잖니. 우리들의 머나먼 할아버지가 말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갈 떄, 그는 비밀을 품고 있었단다. 그가 하룻밤을 더 달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테지// (···)// 하룻밤은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지나가버린단다. 그렇지만 얘야, 영원히 눈을 감는다면 하룻밤은 계속해서 흐르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의 미소와 함께.



- 초대장, 66-67쪽

오늘 밤에도 사건 속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빨려들어 오고 노인들이 갑자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립니다.// 그리고 만두피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 심장을 얼리기 위해 냉동실로 걸어간 사람들도 만두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 우리는 아픔 없이 잘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섞일 수 있습니다. 만두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별빛.//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석들이 요리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 썩은 과일은 술이 됩니다. 우리는 만두가 됩니다. 끓는 물에 둥둥 떠오를 수 있습니다. 환하게 터질 수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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