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접시의 시 - 나희덕의 현대시 강의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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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접시의 시(나희덕의 현대시 강의), 창비, 2012
#나희덕


그립던 이의 집을 방문 했을 때 그가 깎은 과일을 접시에 놓는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접시위에 사과와 배와 감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다. 피부가 다 벗겨진 몸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겨울을 맞으며 잘려나간 그들의 껍질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둑한 구멍 속으로 사라질 것임을. 그와 내가 꼭꼭 씹어 삼킨 사과와 배와 감처럼 우리도 껍질을 다 벗고 같은 접시 위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희덕 시인이 현대시의 구조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 대가들은 쉽게 쓰고 쉬운 듯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의 본질에서부터 착상, 주체, 리듬, 묘사, 서사, 진술 등 시를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2012년에 출간된 책임에도 당시를 기준으로 비교적 근간의 시들을 담고 있어 지금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좋은 시들의 감상은 덤. 목차를 잘 보자.




(목차)
1. 시는 어떻게 오는가(시적 언어와 상상력)

- 어떤 강연에서 사랑과 연민의 차이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청중들이 내놓은 대답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랑이 여명이라면, 연민은 일몰”이라는 비유였어요. 31쪽

- 이슬비 내리는 가을날 오후. 뻔득이 니야까 뒤에다 붙어 가는 초등학교도 못 가는 아이의 찢어진 고무신 사이 흙탕물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는 때의 딱한 마음. (서정주, 「내 시정신에 마지막 남은 것들」) 35쪽 재인용



- 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스닥 이제 날개가 없다 (···) 나도 삽입하고 싶은 유전자가 있다 (···) 프린터 아래의 내 무릎 위로/ 쿠폰이 동백 꽃잎처럼 뚝 떨어진다 나는/ 동백 꽃잎을 단 나를 클릭한다 (···)



2. 누구를 통해 말하는가(화자와 퍼소나)



- 한 편의 시를 쓰고 읽는 일이란 다음과 같이 시인과 독자가 세 겹의 목소리를 주고 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함축적 시인→(현상적 화자→현상적 청자)→함축적 독자〕→ 독자


- 고형렬,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부분

머리를 두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 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 아우는 종이 위로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렸지만/ 그날 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
참고) 백석의 「수라」



3. 소리는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구조와 리듬)



- 허수경, 바다가, 부분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3연)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4연)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4. 대상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묘사와 이미지)

- 김기택, 사무원

“내가 시적인 관심을 두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의 어떤 ‘행동’이에요. 예를 들면 울음이나 웃음, 하품, 앉아 있는 모습 등 얼핏 당연해 보이는 그 움직임 속에 내재해 있는 어떤 ‘본능’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좀 더 정말하게 보려고 하지요. (중략) 「사무원」같은 시도 의자아 앉아 있는 생활을 다리가 여섯 개라고 표현하면서 의자 다리와 사람 다리가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고착화된 상태를 아이러니적으로 보여 주려고 한 것이지요. 본능이 가장 극단적으로 억압된 상황 속에서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제겐 흥미롭게 느껴지곤 해요. 138-139쪽




5. 감추면서 드러낼 수 있는가(은유와 상징)

- 이성복, 극지(極地)에서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6. 시와 이야기는 어떻게 만나는가(서정과 서사)

- 송찬호, 기린

길고 높다란 기린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조개들은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인 별들이 아아아아 - 노래하며 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 한번 궤도 열차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어 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그걸 주워다 아이에게 갖다 주었으면, 걷고 걷다가 기린의 뿔을 닮은 하늘나리 한 가지 꺾어 올 수 있었으면// 기린이 내게 다가와, 언제 동물원이 쉬는 날 야외로 나가 풀밭의 식사를 하자 한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에 고깔모자 쓰고 주렁주렁 목에 풍선 달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다시 겅중겅중 뛰어가는 저 우스깡스런 기린의 모습을 보아라 최후의 시(詩)의 족장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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