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안에 담은 것들 - 걷다 떠오르다 새기다
이원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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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 산문집, 산책 안에 담은 것들, 세종서적, 2016



1. 이원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제목처럼 그녀가 살았던 홍대, 한강 주변, 학창시절을 보냈던 명동, 시장, 갤러리에 대한 섬세한 감상이 한 축을 이루고, 후반부로 갈수록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환경 보다 내면에 대한 서술이 많은 느낌이다.

‘시장과 묘지’ ‘손’에 대한 글이 기억에 남는다. 조금 된 밥인데 빡빡하지 않고, 씹을수록 밥에서 단맛이 나는 문장. 오래 씹어야 맛있는 밥 한 공기.




2. 2015년 10월 1일 홍대 서교예술센터 오후 7시30분 와우북 페스티벌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퇴근 후 지하철에서 1,500원 짜리 와플을 우걱우걱 씹으며 늦지 않기 위해 홍대로 가던 길이 생생하다. 그해 모토인 ‘글쓰기 글램핑’ 중 강연 주제는 ‘자화상, 아이처럼 내가 나를 신나게 골똘히 들여다보기’. 그때는 시(詩)도 모르고, 시인도 처음 봤고, 작은 교실 같은 공간에서 십여명이 모여 있는 그 자체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창의적, 인문적이란 말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데요. 저는 인문적 글쓰기란 표면과 안을 동시에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겉과 속의 공존을 인정데서 출발하는 것이죠. 흔히들 글쓰기는 내면, 안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표면도 중요해요.”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인사’라는 글쓰기 시간.
( )을 놓치고, ( )에서 내린다. 그리하여 ( )을 바꾼다.

꿈을 놓치고 일에서 내린 사람, 혼기를 놓치고 웨딩카에서 내렸다는 사람, 일을 놓치고 자유에서 내린 사람. 나는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린다. 그리하여 얼굴을 바꾼다.’ 라고 썼다고 씌여 있다.



3. 메모


‘사이는 사랑이다. 채워도 채워도 비어 있는 것,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것이 사랑이다. 채우지 않으면 비어 있는 곳도 없으니, 주지 않으면 모자라는 것도 없으니 채우기 시작하면 비로소 탄생하는 공간. 주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결핍되기 시작하는 시간. 사랑. 사랑은 나를 사라지게 한다. 사랑은 내가 사라질 때만 지속된다. 당신의 손이 먼저이고 당신의 안색이 먼저이고 나는 점점 사라진다.’ 24쪽


‘길이 없이 나타나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을 산책하는 일은 미끈한 계란 위를 연속해서 딛는 것과 같다.’ 123쪽

- 시장은 상점 밖에 물건을 내놓는다. 어떤 상점은 상점 안보다 상점 밖에 물건을 더 많이 쌓아둔다. 상점 안에 진열하더라도 밖에서 많이 보이게 최대한 많이 보이도록 쌓아둔다. 백화점의 고급 상품과는 정반대의 진열 방법. 명품은 희소가치를 강조하므로, 몇 개. 어느 경우에는 하나를 새로 발견한 섬처럼 진열한다. 백화점은 당신만, 특권화를 지향하고, 시장은 누구나, 보편성을 지향한다. 유세를 할 때 백화점이 아닌 시장을 도는 이유. 시장은 어디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140-141쪽


- 손이 말한다. 얼굴보다 더 수줍은 것은 손이다. 얼굴이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을 때에도 손은 제 손끝을 만지작거린다. 길을 걸을 때도 닿을까 말까 하고 있다. 손은 제비꽃처럼 수줍어한다. 아기 토끼의 두 눈알처럼 수줍어한다. 수줍은 손은 계속 찾는다. 드러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찾는다. 찾는 손은 멈추지 않는 손이다. 손에서 수줍음이 없어질 때 손은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않게 된다. 아니 찾지 못하게 된다. 사회적 악수는 수줍음을 잃어버린 손이며, 호감으로 잡는 손은 수줍음으로 주춤주춤 두근두근한다. 손을 잡는다는 표면적 행위는 똑같지만 사회적 악수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손을 다 잡지도 못하고 살짝 닿은 손은 밤잠을 설치며 며칠을 생각하게 한다. 잡았던 손에 찾고 있던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줍은 손은 두근거리는 손이다. 손이 수줍지 않다면 그것은 의례적인 말과 같이 의례적인 손이다. 손은 늘 수줍어하는 방향이다. 수줍은 손 안에 심장이 있다.



- 엄마 173쪽
세상에 와서 제일 많이 발음한 단어. 나를 세상에 나타나게 한 장본인. 엄마와 나는 하나에서 분리된 둘. 하나가 품었던 하나. 큰 하나가 품었던 아주 작은 하나.
부르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사람. 내 몸이 커진 만큼 자신은 쪼그라들어가는 사람. 오늘도 힘들어서 어쩌니. 나보다 먼저 나의 하루를 살아보는 사람. 내가 걸을 밤길에 마음이 늘 마중 나와 있는 사람 엄마라고 불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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