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480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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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 문학과 지성사, 2016


1. 2016년 3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시집이다. '피어라 돼지' 제목만 보면 달구어진 불판에 삼겹살의 육즙이 베어나오면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장면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시집의 제1부를 구성하는 '돼지 연작시'를 읽고 나니 한동안 삽겹살을 먹지 못할 것 같다.자기 몸속으로 간장이 스며드는 순간 어미가 품고 있던 알들에게 '이제 잠잘 시간이야'이라고 달레는 어느 시를 읽고 간장게장을 한 동안 먹지 못했다는 누군가의 글이 이제서야 공감간다.





2. 피어라 돼지 45-48쪽 전문,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훔치지지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동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금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긴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에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있다! 뱀처럼 살아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피어라 돼지;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었다. 공산주의 이념과 극단화된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의 모순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시간의 울타리를 넘어 현 시대에 다시 재현된다. 늙은 수퇘지 '메이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전략) 자, 동무들, 동물들의 삶이 어떤 겁니까? 우리 똑바로 봅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달프고, 그리고 짧소. 우리는 태어나 몸뚱이에 숨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먹이만을 얻어먹고. 숨 쉴 수 있는 자들은 마지막 힘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일을 해야 하오. 그러다가 이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겨지면 그날로 우리는 아주 참혹하게 도살당합니다. 영국의 모든 동물들은 나이 한 살 이후로는 행복이니 여가니 하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의 어느 동물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비참과 노예상태, 그게 우리 동물의 삶입니다. 이건 아주 명백한 진실이오. ... 10쪽... "

그런데 우리는 왜 계속 이 비참한 조건 속에 살아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동무들,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거기에 있소.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오. 11쪽


3. "열심히 했지만, 열심히 안한 것으로",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인 것으로" , 변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세상에서 화자는 "이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한다. 정지용의 '향수'에서 똑같은 말이 그리운 고향이라면 '피어라 돼지'에서는 몸서리치는 암흑의 땅이다. 똑같은 표현이 다른시('키친 컨피덴셜')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명한 가곡의 가사와 멜로디가 이렇게 암울할 수 있다니.



김혜순 시인은 '돼지 연작시'들을 돼지들이 살처분 되는 광경을 보고 나서 썼다고 한다.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고" 화자는 부끄러워서 운다. 네발이 아닌 두발로 서서 운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 않다. "네 발은 좋고 두발은 더 좋다"는 동물농장의 양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두발로 걷는 어른들이 네 발로 걷는 아기들과 동물들에게 분명 죄를 짓고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라고 소망하는 일 밖에 없다. 같이 울고 소리쳐야 한다.
"피어라 사람아! 날아라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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