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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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사람



튜브에 바람을 가득 넣고 폴짝 뛰어, 바닷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파도는 수유 쿠션을 베고 잠든 아기를 깨우지 않을 만큼 잔잔하고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라면 좋겠습니다만, 튜브가 풍선이나 훌라우프 반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바람을 넣느라 머리가 쨍, 하거나 자꾸만 무너지는 후프를 끌어올리는 일, 반지를 밀어넣다가 손가락이 부르트는 일도 상상일 뿐이니까요 그렇다고 생각을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은 '불꽃'을 생각합니다 '불꽃' 뒤엔 으레 '놀이'가 달라붙곤 하지요 하지만 나에겐 '놀이'가 애당초 없기에 '불꽃'이라는 낱말 뒤에 붙일 낱말을 생각합니다 그 낱말이 풍선이나 훌라후프 반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잠시 부풀었다가 힘이 빠지고 한 평도 안되는 허공의 울타리에 갇히고 동전보다 눈동자의 끈이 나를 묶는 일은 매한가지입니다 '상처' '흉터' 같은 낱말도 그럴싸 하겠네요 우리는 모두 사그라드는 운명을 타고 태어납니다 튜브나 풍선 훌라후프 반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언젠가는 쪼그라들고 바닥에 내던져지고 얇은 껍질이 벗겨지는 운명입니다 다만 흔적은 남기는, 불꽃이 사라진 뒤의 하늘을 사랑합니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서 섰을 때 구겨진 몸과 허리를 두르는 검은 띠와 햇볕이 손가락에 남긴 환한 그림자를 사랑합니다 문득, 나의 전생은 매미였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날이 있었습니다 허물을 벗고 유충이 되어 나무를 기어오르는 매미, 그 매미의 전생은 눈이 어둡고 지느러미가 긴 심해어였다는 확신이 든 날이 있었습니다 수 년을 물속에서 땅속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을 상상하고 귀를 기울이다가 물밖에서 보름을 사는 물고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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