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게 인생에 대한 스포일러!

Memento Mori. 그 옛날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행진을 할 때, 노예들에게 이 말을 큰소리로 외치게 했습니다. 라틴어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오늘은 승리해서 살아있더라도 언젠가는 너도 죽을 수 있으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고 합니다.

비록 개선 장군은 아니지만 종종 '죽음'을 떠올립니다. 이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오만가지 감정들이 교차합니다. 견솜한 마음이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밀려오는 두려움과 허무, 회한 때문에 잠 못 이루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프롤로그 : 아침에 죽음을 생각한 이들의 연대기』 7~8쪽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 김영민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에 비누칠을 하면서 "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을 보면서 웃어보라고 하는데, (어쩌면 희망찬 하루가 될지도 모르는) 아침 댓바람부터 죽음을 생각하라니. 도대체 이 상충된 조언은 뭘까요?

아침을 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비누를 가득 칠한 채 중얼거리는 거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속한 정치공동체도 이미 죽었다"라고. 무슨 말이지? 나는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세수를 하고, 정부는 어김없이 세금을 걷어가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변함없이 그다지 질이 높지 않은 쇼가 상연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여도,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 있다. 별이 폭발하기 전에 발산한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우리가 그 별을 지금 보고 있을 뿐. 나와 공동체는 이미 죽었는데 현재 부고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7~18쪽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인생에 대해 스포일러를 당합니다.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죽게될 것이라는 것. 그 순간이 바로 1초 뒤일 수도 있고, 내일 아침일 수도 있고, 어쩌면 100년 뒤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결말은 '죽음'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자는 아침을 시작하면서 '죽음'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절에 아침을 열 때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째, 이미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다. 화전민이나 프리라이더가 아니라 조용히 느리게,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 주체로 살아보고야 말겠다는 열정을 가져보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이란 그 자체로 지나치게 큰 야망처럼 보인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9~20쪽

매일 아침 '죽음'을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먼 미래 대신 지금 당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성공해서, 나중에 부자가 되면 누리게 될 (큰) 행복이 아닌 눈 앞에 있는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게 될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근심도 즐기게 될 수 있습니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을,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23쪽

이렇게 보면 감정적인 내용의 책 같지만, 사실은 냉소적이고 시의성 짙은 칼럼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는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 구석구석, 혹은 일상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때론 날카롭게, 또 때론 재미있게 써내려 갔습니다. 특히, 추석 때 결혼은 언제 할거냐,고 묻는 건 위헌적 처사며 콩을 싫어하는데 콩 넣은 송편만 먹어야 한다는 건 자유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거라고 한 「명절을 보내는 법」라는 칼럼이 인상적입니다. 사실 그가 유명해진 것도 바로 이 칼럼 때문이라고 합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송편 속에 콩을 넣을 만행이 지속되고 있다. 송편을 한입 물었는데 그 속이 꿀이 아니라 콩일 경우 다들 큰 좌절감을 맛보지 않나. 「추석을 즐기는 법 :명절을 보내는 법2」 64쪽

취직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라고 묻는 친척의 '위헌적 처사'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보너스를 털어 비행기를 타기로 하자. 기내식 송편에는 콩이 없다. 「추석을 즐기는 법 : 명절을 보내는 법2」 65쪽

게다가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부문 심사를 맡았던 박완서 선생님이 "난 다른 부문 심사위원이었지만, 내가 맡은 부문 글들보다 당신의 글이 제일 좋았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있었으며 논문자격시험을 치르고 잠시 귀국했다가 평론을 써서 응모했는데 당선됐다고 합니다. 학위 때문에 이후 평론가로서 활동은 할 수 없었지만,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놓치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는 비자발적으로 태어났고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 사실은 바꿀 수도, 선택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즉 소멸의 방식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멸해야 할까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소멸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소멸의 방식. 어떤 소명과도 무관하게, 어떤 심미적 흔적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소멸해가는 길이 있다. 마치 상한 달걀을 깨뜨렸을 때 비린 냄새를 풍기고 흐물거리며 퍼지는 노른자처럼. 두 번째 소멸의 방식. 스스로 자신의 소명을 설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뒤, 그 소명을 달성함을 통해 존재 이유를 잃고, 스스로 소멸해버리는 방식이 있다. 마치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고 나서 검은 우주 속에서 밝게 소멸해버리는 로켓추진체처럼. 「서울대학교의 정체성」 125~126쪽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 없이 연장되고 있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다. 이것은 어쩌면 새로운 관광자원이다. 한국으로 여행 오시면 멸종 위기의 공동체를 구경할 수 있어요, 한국은 사라지는 중이에요,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P18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 P22

"또 한 해가 가고 오네요."

"당신 나이가 되면 모든 게 선명해질까요?"

"아니요."

"그럼 더 혼돈스러워지나요?"

"그냥 빨리 흘러가요. 비 많이 왔을 때 흙탕물처럼."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 - P27

그동안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에너지원 삼아 살아왔다지만, 이제 여생을 살기에는 다른 종류의 에너지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좋아서 미치겠는 어떤 것 때문에 기운을 쓰면서 살아가야, 제 명에 죽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식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 - P54

누가 그랬던가, 휴식의 궁극은 죽음이라고. 쉬고자 하는 욕망의 끝에는 죽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만화책으로부터 우리가 휴식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칫 죽음을 통해서라도 휴식을 취하려 들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P90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게 인생에 대한 스포일러라면, 진리를 결국 다 알 수 없다는 게 학문에 대한 스포일러입니다.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요」 - P93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책을 좋아할 뿐 아니라 내심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죠. 나도 책을 읽으면 행복하지만, 책도 나에게 읽히는 게 분명 행복할 거야, 라는 충족감이 들죠. 그리고 직장인들이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할 때, 창문을 열고 ‘월요일이란 무엇인가!‘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어요.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요」 - P95



왜 해석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는가?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쓸쓸해서 해석을 하고, 초조해서 해석을 하고,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해석을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불안해서 해석을 한다. 「설원에 핀 장미 아닌 꽃 : 홍상수의 초기 영화」
- P265



글에서 읽고 싶은 것을 읽는 것은 저자가 어찌할 수 없는 독자만의 특권일 터. 책을 출판하면, 독자들이 너무 그럴싸한 메시지를 책에서 읽어낼까 두렵습니다.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그러한 책들의 주장에는 특히 확신이 없거든요. 그런 책들은 확신할 근거가 없는 것들까지 확신하기에, 그런 책들을 확신할 수 없죠. 「에필로그 : 책이 나오기까지」
- P34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9-03-27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마저 의미 심장하네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진지하고 견고하게 한다는 것을 알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저자 말 대로 큰 근심 대신 작은 근심으로 보내는 소소한 일상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고요.
딱 하나 제가 공감못하는 대목은, 저는 꿀 들어 있는 송편보다 콩 들어 있는 송편을 더 좋아하는데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것이요 ^^

뒷북소녀 2019-03-27 12:57   좋아요 0 | URL
저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울에 빠지곤 하는데... 저자는 그게 아니라고 해서 놀라웠어요.
저는 콩 들어간 송편을 너무 싫어해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말에... 완전 감탄했다죠.
엄마가 콩 들어간 송편을 사놓으면 써먹을려고... 키핑 중입니다.

레삭매냐 2019-03-27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멘토 모리 !

누구나 다 알지만, 부인하고 싶은 시츄?

뒷북소녀 2019-03-27 12:58   좋아요 0 | URL
그런데... 부인해도, 억만장자가 되어 불멸의 삶을 꿈꿔도... 어쩔 수 없다는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