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시골 마을의 술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남자, 바텐더 '테레자'는 그가 이 술집에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봅니다. 테레자는 옆구리에 『안나 카레니나』를 끼고 프라하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찾아갑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와 토마시는 이렇게 만났습니다.

우연히 만난 전 여자친구 '썸머', 애인도 싫다며 떠났던 그녀가 이제는 유부녀라고 합니다. 그녀가 식당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책 내용에 대해 물었고 그가 바로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화 《500일의 썸머》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상실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최고의 책으로 꼽는 와타나베, 아쉽게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배 나가사와라가 이렇게 말합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하면 유독 그 부분만 잘 기억하게 됩니다. 가끔씩 “그래서 그 둘은 어떻게 되었어?”라고 묻는 분들이 계셔서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책의 줄거리나 핵심 같은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시간 죽이기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시간 죽이기가 아닌 일이 뭐가 있을까. 게다가 나는 나름대로 애서가이기도 했다. 11쪽

삶이 결국은 갖가지 시간 때우기의 퇴적이라면, 틈틈이 몰두할 수 있는, 혹은 몰두한 척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나쁘지 않다. 12쪽

『그래도 우리의 나날』 또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시작합니다. 헌책방에서 H전집을 발견한 후미오는 완간 된지 한달 밖에 지나지 않은 H전집을 놓칠 수가 없어서 사버립니다. 마침 아르바이트로 받은 그달치 돈이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서 이번에는 반만 구매하고 한달 뒤에 다시 와서 나머지 반을 구매하겠다고 헌책방 주인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약혼녀 세쓰코는 후미오의 집에서 새로 산 H 전집을 살펴보다가 낯익은 장서인을 발견합니다. 대학생 때 '역사연구회 합동연구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반강제적으로 빌려준 책이 한 권 있는데, 그 책에도 똑같은 장서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쓰코는 '사노'라는 선배의 책이라며 후미오와 같은 도쿄대학교 출신이니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한번 알아봐달라고 합니다. 한달 뒤 H전집의 나머지 반을 구매한 후미오는, H전집을 내다판 사노의 사연이 궁금해서 그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행복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사람은 그중에서 자기 몸에 맞는 행복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잘못된 행복을 잡으면 그건 손바닥 안에서 금세 불행으로 바뀌어버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24~25쪽

이즈음, 후미오의 약혼녀 세쓰코는 묻습니다. 그녀가 왜 후미오를 위해 밥을 지어야 하는지, 후미오가 왜 그녀가 만든 밥을 먹는지, 그리고 이 일들은 얼마나 계속되어야 하며, 이 일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면 세쓰코는 뭐가 뭔지 몰라서 불안하다고 합니다. 후미오는 결혼을 앞둔 여자가 느끼는 흔한 불안감이라 여기며, 그녀와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무역회사의 평범한 직장인으로, 후미오와의 결혼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세쓰코도 대학생 때는 당시 학생모임 중에서도 가장 좌익이라고 알려졌던 도쿄대학교 역사연구회 합동연구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사노를 만났고, 사노가 잠행하기로 결정한 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책을 그녀에게 준 것입니다. 어차피 앞으로 읽을 일도 없다면서 말이죠.

나는 당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당원이었기 때문에 배신자가 된 거다. 그래, 너처럼 무당파이면 절대 배신자가 될 일이 없잖은가. 나 역시 당을 떠나면 그때는 그냥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나는 당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만약 당에서 떠난다면 그때의 나는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 자신에게 긍지를 가졌던 유일한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64쪽

한편, 후미오와 세쓰코는 사노의 소식을 쫓다가 그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살 직전 사노는 한 친구에게 유서와 같은 편지를 남기는데, 후미오와 세쓰코는 그 편지를 얻어 읽게 됩니다. 그 편지 속에는 그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왜 잠행을 결정했는지, 잠행 이후 그가 옳다고 생각해서 따랐던 조직이 얼마나 허무하게 해산됐는지, 그리고 그가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모두 쓰여 있었습니다.

사노의 편지가 내 마음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갔을 리는 없다. 나는 H전집을 산 날 밤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헌책방 책꽂이에서 H전집이 내 마음 한구석에 감춰졌던 공허함에 호소한 것 같은 그 기묘한 체험. 그것은 죽은 이가 마음으로 한 호소였던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걸 지워버렸다.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과 죽음이 있다. 사노의 삶과 죽음은 어차피 그의 삶과 죽음이었다. 혁명가이고 싶었지만 혁명가가 되지 못한 사노. 99쪽

사노는 물론이고, 사노의 편지를 읽었던 후미오, 결혼을 앞두고 종종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세쓰코까지, 그들은 결국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합니다. "내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106쪽)

후미오는 세쓰코를 만나 약혼을 하기 전의 일들을 세쓰코에게 고백합니다. 충격적이게도 후미오에게는 한 여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후미오는 얌전한 결혼 상대를 찾았고, 그렇게 만난 것이 바로 세쓰코였습니다.

결혼을 하면 세쓰코는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고 후미오를 따라가야 합니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던 세쓰코는 후미오와의 만남도 피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다가 지하철 플랫폼으로 추락해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후미오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이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세쓰코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후미오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를 경험한 세쓰코가 이미 마음을 정리한 뒤였습니다.

사노 씨의 유서가 내 손에 전해진 날 밤, 내가 그 유서를 펼쳤을 때, 그 속에서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하는 의문이 못처럼 내 가슴에 콕 박혔어. 마치 내게 던지는 질문 같더라. 그리고 그 대답을 찾았을 때, 나는 내가 그런 무서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갖고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게서 떠나지 않는 피로감의 의미를 깨달았어. 우리 사이, 우리의 생활은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날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생은 각자 다른 사실과 현상이 우연히 연속해서 일어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무의미함 속에 나는 지쳐버렸다, 내 생은 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만 하고 있으니 죽음에 임박해서 움켜쥐려는 손에 뭔가 남아 있을 리 없다……그 한 가지의 물음으로 나는 모든 것을 깨달은 거야. 175쪽

후미오의 고백과 세쓰코의 선택이 충격적이었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덮으면서 저 또한 그들이 도달했던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과연 저는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 무서운 질문에 저 역시 답을 갖고 있지 않네요.

당신은 내 청춘이었다는 것! 아무리 괴롭고 답답한 날들이었어도 당신은 내 청춘이었어. 내가 지금 당신을 떠나는 것은 오로지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야. 190쪽

우리 세대는 분명 늙기 쉬운 세대다. 늙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194쪽

머잖아 우리가 정말로 늙었을 때, 젊은 사람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어땠냐고. 그때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우리 때에도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어려움이기는 하겠지만,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려움에 익숙해지며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 중에도 시대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로 용감하게 진출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젊은이 중 누구든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지금 우리도 그런 용기를 갖자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간 우리의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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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02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도서관에 가서 시바타 쇼의 책
드디어 빌려 왔습니다.

오래 전에 신형철 씨가 인생책이라고
하면서 문동 팟캐에서 야그해 주셨
는데 인제사 나왔네요.

전공투 시절 이야기라 지금하고는 좀
맞지 않는다는 리뷰가 있어 굳이 구매
는 패스했습니다.

책은 읽는 게 중요하니까요.
물론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은
바로 질렀습니다만.

뒷북소녀 2019-03-15 12:54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창백한 불꽃> 지르러 갑니다^^
요즘 너무 핫한 거 같아서 제 취향은 아닌 것 같지만
도서관 찬스로 읽어봤어요.

쟝쟝 2019-03-14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여러가지 감정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여주인공 이름이 ... 바퀴벌레 잡는 회사 이름이라.. 내용은 진지한데 자꾸 웃었던... 리뷰 잘 읽었습니다!

뒷북소녀 2019-03-15 12:55   좋아요 1 | URL
아! 세상에! 어쩐지, 여주인공 이름이 낯설지 않다 했어요.세스코라뇨.

쟝쟝 2019-03-15 14:42   좋아요 0 | URL
약간은 썰렁한 저의 웃음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