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밀란 쿤데라 전집 7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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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

'밀란 쿤데라'는 아베나리우스 교수를 기다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헬스클럽의 실내 수영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영 강습을 받고 있던 한 부인이 쿤데라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 부인은 예순이나 예순다섯 살쯤으로 보였는데, 수영 강습이 끝나자 수영복 차림으로 풀 가장자리를 따라 수영 강사를 지나쳐 걷다가 강사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합니다. 그 미소, 그 손짓이 마치 스무 살 아가씨 같아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쿤데라의 심장까지 졸아들 정도입니다.

나의 심장이 졸아들었다. 그 미소, 그 손짓, 바로 스무 살 아가씨 같지 않은가! 그녀의 손은 눈부시도록 가볍게 날아올랐다. 마치 그녀는 장난하듯 울긋불긋한 풍선 하나를 연인에게 날려 보낸 것 같았다. 비록 얼굴과 육신은 이미 매력을 상실했다지만, 그 미소와 손짓에는 매력이 가득했다. 그것은 매력 잃은 육신 속에 가라앉아 있던 한 몸짓의 매력이었다. 그 부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이제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녀는 그 순간만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통해서 시간을 초월하여 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 10쪽

그때 나의 뇌리에 아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녜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이름의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 11쪽

그 부인의 미소, 손짓으로부터 『불멸』의 주인공 '아녜스'가 탄생합니다.

만약 우리 지구의 인구가 800억을 넘어섰다면, 그들 각자가 자기만의 몸짓 일람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다. 산술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의 사람 수에 비해 몸짓 수가 비교도 안 될 만치 적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충격적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즉 몸짓이 개인보다 더 개인적인 것이다. 이를 격언 형태로 얘기하면,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가 된다. 16쪽

『불멸』은 작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소설 속 '쿤데라'는 친구인 아벨리우스 교수를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 수영장을 관찰합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자신의 매력을 미소와 손짓으로 발산하던 한 부인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불멸』은 크게 세 가지 층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바깥쪽 이야기는, '밀란 쿤데라'가 화자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이것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쓰기 작법처럼, 혹은 자전적 에세이처럼 읽힙니다. '나는 이렇게 소설적 인물을 창조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모티프를 얻어 이야기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안쪽으로 그가 창조한 '아녜스'의 이야기와 불멸의 작품을 남긴 '괴테'의 일화가 교차돼 등장합니다.

쿤데라의 소설 속 '아녜스'는 변호사인 '폴'과 결혼을 해 딸 브리지트를 두었고, 자신보다 8살 아래의 여동생 '로라'도 있습니다. '아녜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서가 아버지에게 보냈던 미소와 손짓을 목격한 뒤부터 그것을 자신의 몸짓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미소와 손짓은 '쿤데라'가 수영장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를 모방하기 좋아했던 '로라'가 똑같은 몸짓을 하는 걸 보고는 다시는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로라'는 언니가 사고로 죽은 뒤에 형부인 '폴'과 재혼을 하기도 합니다. '폴'은 '로라'의 몸짓을 보고는 '로라'만의 몸짓이라고, 자신에게만 보내는 몸짓이라고 감탄합니다.

갑자기 그녀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팔 하나를 허공으로 날렸다. 그 동작이 너무도 경쾌하고 너무도 매력적이고 너무도 잽싸서 마치 금빛 풍선 하나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날아올라 문 위에 걸려 머무는 것처럼 보였다.

즉시 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가 아베나리우스의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보았소? 저 몸짓을 보았소?"

(…) "아, 로라! 그녀만의 것이야! 아, 저 몸짓! 그녀의 전부를 함축하는 몸짓!" 542~543쪽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또다른 이야기는 불멸의 작품을 남긴 '괴테'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미 아내가 있던 괴테에게 한 젊은 부인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그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베티나, 괴테가 23세 때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기도 한 그녀는 스스로 '괴테의 딸'이라고 여깁니다. 괴테는 베티나 때문에 (물론 작품도 그러했지만) 사후에도 끊임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불멸'을 누렸습니다.

불멸. 괴테는 이 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 "옷차림이 가벼운 한 인물이 사원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에게선 어떤 비범한 구석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선구자 없이, 다른 위대한 모델들에게는 무관심한 채,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불멸을 만나러 걸어간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였다."

물론,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 81~82쪽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불멸에 이를 수 있으며 모두가 청년 시절부터 불멸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만난 헤밍웨이는 '불멸'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삶이 힘들어서 혹은 싫어서 권총으로 자살한 헤밍웨이에게는 영원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끔찍할 정도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불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일단 불멸의 배에 오르고 나면 영원히 내릴 수가 없지요. 나처럼 두개골을 권총으로 쏘아 버려도 자살한 모습 그대로 그 배 위에 머무릅니다. 끔찍한 일이에요. 요한. 정말 끔찍해요. 138쪽

이쯤되니 밀란 쿤데라 자신은 '불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집니다. 분명 그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속적인 불멸'을 누릴텐데, 그에게 '불멸'은 어떤 의미일까요?

쿤데라는 '불멸'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작은 불멸'과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큰 불멸'이 바로 그것인데, 예술가와 정치가는 대부분 '큰 불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셰익스피가 가장 먼저 그 길을 걸었고, 괴테와 헤밍웨이도 그 길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82쪽) 않습니다. '아녜스'는 죽은 뒤에, '작은 불멸'로 남았습니다. '폴'과 '로라' 모두에게 잊혀진 것 같았지만, '로라'의 몸짓으로 '작은 불멸'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아녜스를 생각했다. 처음으로 그녀를 상상한 게 벌써 이 년 전이다. 그때 나는 클럽의 긴 의자 위에서 아베나리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내가 포도주를 한 병 주문한 것은 그래서였다. 나의 소설이 끝났기에, 첫 발상이 이루어진 곳에서 이를 자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550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제목은 이 소설에 붙여야 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쓸 때 '7'이라는 숫자에 집착합니다. 그의 첫 소설인 『농담』을 쓰고 난 후부터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6부로 구상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7부로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 역시 7부로 구성되어 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보여줬던 기법을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6부에서 먼저 엔딩을 보여준 뒤에 7부에서 왜 그런 엔딩이 나왔는지 되짚어줍니다.

제 소설들은 7이라는 숫자 위에 세워진 동일한 건축술의 변형인 셈이죠. 『소설의 기술』 126쪽

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화자 뒤에 살짝 숨어 있었던 '쿤데라'가 『불멸』에서는 소설 앞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는 『삶은 다른 곳에』를 쓴 작가로 등장하며, 심지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눠 독자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비교할 수 밖에 없도록 (혹은 읽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6부를 기다리며 안달하네. 새로운 인물이 내 소설에 등장할 걸세. 그 6부가 끝날 때쯤 그는 등장할 때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릴거야. 그는 무엇의 동기도 아니며, 어떤 효과도 낳지 않네. 내 마음에 드는 게 바로 그런 거라네.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아베나리우스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키다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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